2006년 초, 박종식(가명)은 강원랜드 VIP룸에서의 꽁지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나름대로 시장조사와 인맥관리를 하기 위해 마카오를 자주 찾았다.
강원랜드가 위치한 사북에 살 때도 그랬지만 그가 있는 곳에는 늘 필리핀에서 데려온 유나가 함께 하였다.
사북의 소라아파트에 함께 살면서 강원랜드 VIP룸에 출근하기도 했지만, 그가 마카오에 갈 때에도 유나를 부인처럼 항상 대동하고 다니는 편이었다.
당시 재미난 일화는 강원랜드 VIP에서 유나가 종식의 부인으로 알려져 VIP룸에서 돈을 따는 고객들은 주변에 뽀찌(팁)를 돌리는데 있어 유나에게 500만 원을 주면 종식의 형수에게는 100만 원을 줄 정도로 유나는 잘 나갔다.
종식의 형수인 A씨의 회고.
“당시 강원랜드 VIP에서 가장 유명한 꽁지로 시동생인 종식이를 꼽았다. 필리핀에서 데려온 유나는 늘 시동생과 붙어 다녔기 때문에 강원랜드 직원이나 고객들은 시동생의 부인으로 알았다. 돈을 딴 고객은 기분이 좋아 팁을 주는데 유나에게는 500만 원을 주고 나에게는 100만 원을 주는데 그쳤다.
당시 유나는 팁으로 받는 돈이 한 달에 보통 1억 원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유나는 공짜로 생긴 돈을 베팅하느라 모두 탕진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꽁지들에게 몇 천만 원 씩 빌려 게임을 하는 일이 잦았다.”
당시 종식이 찾은 마카오에는 호남 송정리파 출신으로 알려진 이건주가 현지 카지노 정켓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2004년 이전부터 마카오에 정착한 이건주는 고객들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밑바닥 생활부터 시작해서 수년 만에 랜드마크를 비롯한 마카오의 유명 카지노 정켓 사업가로 성장한 인물로 알려졌다.
정켓업은 특성상 고객을 유치하거나 잔심부름까지 하는 직원들이 최소 수십 명이 필요한데 그는 2006년 30여 명 이상의 직원을 둔 마카오의 한국인 최대 정켓사업가로 발돋움 하였다.
이건주 입장에서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마카오에 강원랜드 VIP룸을 주름잡던 주먹세계의 대선배가 경쟁자가 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2006년 봄부터 마카오의 샌즈, 리스보아, 랜드마크, 총통카지노 등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에이전시들과 접근하며 꽁지를 시작하고 있다는 소문을 이건주가 듣고는 대책마련에 고심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해 11월 3일 오후 자신의 정켓사업장이 있는 랜드마크 카지노에서 박종식과 마주치면서 시비가 붙었다.
“어이! 이건주, 자네가 마카오에서 잘 나간다고 선배한테 인사도 안 하는 것은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가뜩이나 눈에 가시 같은 선배라고 생각하는 마당에 자신의 안방이나 다름 없는 곳에서 더군다나 직원들이 보는 면전에서 핀잔을 주자 이건주도 열이 받았다.
“아니! 언제 보았다고 선배, 선배 합니까! 여기는 내 구역인데 말조심하시죠!”
불같은 성격의 종식이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이 자식이 감히!”
하면서 쏜살같이 이건주의 뺨을 때리고 멱살을 움켜쥐자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를 본 랜드마크 보안직원들이 달려왔고 보안 책임자가 험악한 분위기를 해결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해서는 경찰에게 연락하였다.
경찰에 연행된 두 사람은 다시 시비가 붙거나 하면, 두 사람을 추방한다는 경고를 받고 각서를 끄고는 훈방조치 되었다.
경찰서에서 석방된 종식은 자신의 애인인 유나, 당시 마카오에서 거주하던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던 박문영(가명), 그리고 현지 에이전시인 남준(가명)등 4명이 평소 잘 가는 동대문식당으로 이동을 하였다.
동대문식당에서 술과 안주를 시킨 종식은 서울의 동생들에게 전화를 했다.
“야 뽀식아! 이 형님이 마카오에 와서 오늘 개망신을 당했다. 손 볼 놈이 있으니 힘쓰는 애들 대여섯 만 당장 마카오로 보내라!”
그러면서 종식은 씩씩 거리며 술을 마셨다.
이런 통화내용을 옆에서 전해들은 이건주와 가까운 한 여자 손님이 이건주에게 전화를 하였다.
“이 사장님! 여기 동대문식당인데 험악하게 생긴 한국 사람이 이 사장님 혼을 내준다며 서울에서 건달들을 오라고 전화하는 걸 들었으니 그렇게 아세요!”
이 전화를 받은 이건주는 직원들을 불러 박종식에게 찾아가 뜨끔한 경고를 하기로 하고는 일행 5명이 동대문식당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술을 마시던 종식 일행에게 이건주 사단의 대표인 이건주와 그 일행들이 동대문식당으로 찾아간 뒤 이건주가 말했다.
“마카오에서는 내가 터줏대감이니 형님은 정켓사업을 하려면 내 아래서 하시든지, 아니면 마카오에서 발을 빼도록 하시죠.”
랜드마크 카지노에서 분이 풀리지 않은 종식은 이 말을 고분고분 들을 리가 없었다.
“아니, 이 자식이 누구에게 함부로 명령이야. 너 죽고 싶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이건주의 행동대장으로 따라간 한 사람이 미리 준비해간 과도를 꺼내 종식의 허벅지 근처에 대며 위협을 하였다.
그러자 서로 욕설과 주먹이 오가는 가운데 허리춤이나 멱살을 붙잡고 패싸움처럼 상황이 전개되자 예리한 과도를 든 이건주의 행동대장이 종식의 허벅지(대퇴부) 몇 곳을 찌르고 말았다.
당시 사건에 대해 국내 한 시사주간지는 현지 취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피살자 박씨(50)는 3일 저녁 10시 경부터 친구 방씨 등 4명과 한국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날 밤 11시30분경 마카오에서 카지노 롤링 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이건주(43)가 부하 4명과 함께 식당에 찾아왔다.
평소 이건주와 박씨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날 오후에도 이미 한 차례 싸워 경찰서에 다녀온 뒤였다. 욕설이 오가던 도중 이건주 부하가 칼을 꺼내 박씨 허벅지에 대고 “앞으로 행동 조심하십쇼.”라며 위협했다.
이건주 일당은 평소 칼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박씨는 욕을 하면서 반항하였고 서로 엉키며 싸움이 벌어졌다.
목격자에 따르면 일당 중 2명은 박씨 친구 방씨를 때려 이마가 찢어지는 중상을 입혔고, 다른 3명은 박씨를 맡았다. 2명이 박씨의 양 팔을 잡았다. 이씨 일당은 박씨의 바깥쪽 대퇴부를 3번, 안쪽 사타구니를 1번 찔렀다. 사타구니 부근 정맥이 끊기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싸움은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바닥은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고 박씨는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수혈을 받았지만 끝내 과다 출혈로 숨졌다.
살해할 의사가 없었던 것은 아닌 듯싶다. 경찰 조사결과 범행에 쓰인 등산용 칼의 날은 유리테이프로 감겨져 끝만 3센티미터 가량 나와 있었다.
경찰은 가해자 일당 5명 가운데 현장에서 도망치던 김모(34)씨를 잡았다. 나머지 4명은 다음날 새벽 2시 배를 타고는 홍콩으로 도망쳤다. 구속된 김씨는 마카오 경찰조사에서 다 자기가 한 일이라며 책임을 덮어쓰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카오 경찰과 한국 당국은 실제 범행을 지시한 배후는 따로 있다고 본다. 롤링조직의 총책임자격인 이건주다.
왜 이건주 일당이 같은 교포인 박씨에게 그런 짓을 했을까?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교민들은 말을 아꼈으나, 마카오 현지인, 지역 언론인 등을 포함한 현지 취재를 통해 마카오의 한국인 조직 실태와 갈등구조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건주는 마카오 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건달로 알려진 사람이다. 광주 송정리파라고 하는데 한국경찰이 관리하는 송정리파 명단에는 없다. 이씨는 2004년 한국경찰에 구속되었을 때는 서방파 조직원이라고 보도되었다.
이씨가 데리고 다니는 조직원(식구)는 약 30명가량 된다. 마카오 전체를 놓고 보면 큰 세력은 아니지만 채 200명도 안 되는 교민 수에 비하면 많은 숫자다. 최근 필리핀에서 ‘동생(조직)’들을 많이 데려왔다고 한다. 필리핀 세부 카지노장이 환치기 단속으로 활동이 어려워져서 마카오로 몰려왔다는 말도 있다.
마카오에서 도박 롤링 일을 한지 15년이 넘는 이건주는 2004년 이후부터 난립하던 마카오 내 한국인 군소 롤링 조직을 흡수 통합해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는 이른바 ‘통일’작업을 해왔다. 살인 사건 발생 직전까지 거의 한국계 마카오 롤링 시장을 평정한 단계였다. 시사저널 2006년 11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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