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유의해야 할 점. 자기 자식처럼 아주 친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한 '급식-'이란 말을 접두어로 쓰는 것은 금기다. '급식-'은 본디 비하적 의미였다. 10대가 스스로를 때로는 자조 섞어, 때로는 또래 집단의 동질성을 과시하면서 '급식'이라고 말하는 것이야 별문제지만, 남의 자식 보고 '급식' 운운했다간 욕 먹어도 싸다. 미국에서 흑인이 흑인보고 '검둥이(niggers)'라고 하면 좀 과한 친근감 정도로 받아들일지언정, 백인이 흑인더러 그렇게 말했다간 총 맞을 일인 것과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급식체'는 우주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인터넷과 SNS의 발랄함이 기본이 됐지만, 사실 급식체 유행 전에 이미 있던 말들도 많이 포섭돼 있다. 어원을 따져가면 이제 '아재 세대'가 된 어른들 일부에게 더 친숙한 맥락도 있다.
예컨대 의존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각(角)'이라는 표현은 원래 당구에서 유래됐다. 당구를 쳐본 사람이라면, 공을 어떤 각도로 보내야 득점에 성공할 수 있을지 자장면 먹던 젓가락을 턱에 대고 심각하게 고민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의미의 확장이 거듭된 결과, 청소년들은 이 말을 '공부 하나도 안 해서 이번 시험은 망할 각', '예고편 영상을 보니 이 영화는 딱 노잼(재미없을) 각'처럼 쓴다.
'평타치'라는 말도 야구, 골프에서 쓰던 '평균 타율', '평범한 타구', '평균 타수' 등의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이 말은 그대로 쓰이지 않는다. 초성만 따서 'ㅍㅌㅊ'라고 주로 쓰인다.) 이 말은 스포츠에서 게임으로 먼저 전이됐다. '필살기'나 특수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게임 캐릭터에 기본적으로 주어진 공격기의 타격값이 '평타치'라고 정의됐다. '아재 게임' 스트리트파이터나 철권 같은 것을 예로 들면, 장풍을 쏘거나 주먹에서 불이 나가는 필살기 말고 그냥 버튼 하나를 눌렀을 때 나가는 기본 주먹치기, 기본 발차기로 상대방에게 입히는 타격(데미지) 값이 '평타치'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이 말은 (주로 여성인)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는 말로 뻗어나갔고, 평범한 수준을 '평타치'라고 하는 것에서 파생돼 '상(上)타치'. '하(下)타치'라는 신조어가 발명되기에 이르렀다. 이 말들의 초성만 딴 'ㅅㅌㅊ, ㅎㅌㅊ' 앞에 때로 쌍시옷(ㅆ)이 붙는 이유는 별도의 설명이 불필요하리라 본다.
'개-'는 원래 하잘것없는 것, 정도가 심한 것을 뜻하는 접두사로 본디 부정적인 말에만 쓰였다. '개꿈', '개살구', '개망나니' 같은 게 그 용례다. 청소년들은 '정도가 심한' 이라는 뜻만 받아들였다. '개-맛있다', '개-멋지다' 같은 말은 기성 국어의 용법에는 맞지 않지만, 이대로 통용되는 게 최신 풍습이다.
'-부분'이라는 말을 어미(語尾)처럼 쓰는 것도 이들이 발명해낸 새로운 국어의 사용법이다. 다만 맥락은 좀 씁쓸하다. '고객님'께 상품을 팔거나 불만 사항을 상담해 주는 텔레마케터들의 말투라는 점이 그렇다. '고객님, 그건 저희가 어떻게 해 드릴 수 없는 부분이구요'까지는 그렇다 치고 '이게 이 상품의 특장점인 부분'('점'과 '부분'은 원래 같은 뜻)을 운운하는 말투가 못내 불편하더라니, 이제 고등학생들이 '이거 인정하는 부분이냐', '그 쌤(선생님)은 별로인 부분'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모띠'는 여러 매체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주로 일본 성인물에서 빈발하는 '기분이 좋다(기모치 이이)'는 대사가 축약되고 변형된 말이다. 하지만 중학생이 해맑은 얼굴로 '엄마가 맛난 거 해줘서 기분이 모띠모띠하다'는 데 대고 심각한 얼굴로 '훈장질'을 해야 할까 말까는 좀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이밖에도 여러 '급식체' 어휘에 대한 설명은 tvN 방송 <SNL>이 '급식체 특강'
'급식체'의 문제로 지적되는 것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올바른 국어 사용법에 반한다는 것. 둘째, 어원을 따져 들어가면 '모띠'나 '(ㅆ)ㅅㅌㅊ'처럼 여성혐오의 맥락에 닿게 되는 등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어라는 것.
첫째 지적은 사실 난센스다. 또래 집단에서만 쓰는 은어는 어느 세대에나 있어 왔다. 다만 최근에는 SNS나 인터넷, 핵심적으로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의 등장으로 인해 '은어의 전국화된 프로토콜'이 생긴 것 정도가 특이한 사항이다. 예컨대 지금 30대 이상의 세대가 어릴 적에 썼던 유행어나 은어는 옆 학교나 옆 지역까지만 건너가도 '그게 무슨 말이냐'며 역으로 조롱받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전국적으로 통용된다.
또래 집단의 은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해소'된다. 1990년대 PC 통신이나 인터넷 카페를 즐기던 그때 젊은이들은 통신 게시판뿐 아니라 '오프라인 정모(추억의 단어다)'에서도 '하이루', '방가방가'를 외쳤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의 부모 세대 때는 연인을 '유(you)'라고 부르거나, 이름의 끝 글자만 따서 부르는 다소 닭살돋는 유행도 있었다. 60대 여성이 과거의 연애편지를 우연히 찾아 다시 읽거나, 40대 남성이 하드디스크를 뒤지다가 '통신체'를 남발하며 썼던 글을 발굴해 내게 된다면 잠자리에서 이불을 차게 될 것이다. 장담하건대 '급식체'도 그들이 '학식(대학 학생식당)'족이 되고 '월급'족이 되는 순간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둘째 범주의 비판은, 말이 되기는 하지만 비판의 대상을 잘못 잡고 있다. 기성 세대가 여성혐오, 장애 차별, 지역비하, 이념 대립, 부의 양극화, 노동자의 소외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놓고, 10대 청소년들이 이를 재치있게 비틀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만든 신조어를 문제삼는 것은 위선이다. 중학생이 '모띠모띠'를 외치거나, 고교생이 옆 학교 '얼짱' 친구의 외모를 'ㅅㅌㅊ'라고 평가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면 우리 사회의 외모지상주의와 여성 대상화의 현실을 돌이켜(反) 살필(省) 일이다. 생각 없이 해맑은 청소년들보다, '반성'하지 않는 어른들의 모습이 더 문제다.
그런데 일부 어른들은 이들의 말이 재밌다며
도착(倒錯)이란 말이 있다. 뭔가가 거꾸로 뒤집혀 어긋났다는 말이다. '급식' 먹던 친구들이 대학교에 가고 취직해 월급을 타면서 점점 언어와 생각을 성숙하게 가꿔 가는 게 순리이지, 월급 받는 어른들이 스스로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10대들의 말을 따라하는 것은 그래서 도착적이다. 10대들은 윗세대마저 철없이 따라하는 '급식체'라도 만들어 냈지, 우리 어른들은 다양한 방법의 폭탄주 제조 비법 외에 어떤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있는지 돌아볼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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