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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촛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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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촛불 속으로

[프레시안 books] 고원의 <촛불 이후>

정치학자 고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촛불 이후 : 새로운 정치 문명의 탄생>(한울 펴냄)란 책을 냈다. 그는 지난겨울 1600만 사람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서 있었다. 축제가 벌어진 134일 동안 고원 교수는 광장을 오가며 그 광장의 모습과 촛불이 일기까지 과정과 그 의미를 생각했다.

고원은 촛불을 들고 있는 자신과 사람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리고 손수 먼 길을 찾아온 각양각색의 사람들로부터 자율과 질서, 환희와 분노, 배려와 엄정, 소통과 압박, 집회와 축제, 리더십과 팔로워십, 지성과 용기의 어울림을 발견한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서 우리가 오랜 동안 찾아 헤매던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만들고 싶은 나라'의 모습이 마치 연극처럼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고원이 '섬광'이라고 표현했듯이 광장의 그 모습은 잠깐 모습을 드러내고 이내 바람처럼 사라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광장과는 너무도 달랐다. 아직 세상은 춥고 바람 부는 날씨만큼이나 매서웠다. 여전히 양극화, 불평등, 저성장, 고용불안으로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고령화, 인구절벽, 복지 빈곤, 지체되는 평화 등 산적한 과제들은 뒤로하고 여전히 고루한 이념의 틀에 갇혀 주도권 싸움만을 일삼고 있는 낡고 한심한 정치권의 모습, 1%가 10%를 갑질하고, 그 10%가 다시 90%를 갑질하는 신판 다단계 노예 사회, 불안·불의·불평등이 일상이 되어 더 이상 희망을 찾기 어려운 삶들, 광장을 벗어난 우리 삶의 모습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그동안 선진화가 답이라고 달음질쳐 왔지만, 우리가 롤모델로 삼아 왔던 선진국들조차 세계화·정보화라는 미증유의 사태 앞에 휘청거리며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문제로 부심하고 있다. 아직 새로운 길은 열리지 않고 있다.

▲ <촛불 이후 : 새로운 정치 문명의 탄생>(고원 지음, 한울 펴냄) ⓒ한울
고원은 촛불이 의미하는 바를 찾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촛불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2008년 광우병 촛불, 2004년 탄핵반대 촛불, 2002년 월드컵과 효순·미선이 촛불과 만나고, 더 거슬러 올라가 1980년 광주의 짧지만 강렬했던 해방공동체와 마주하게 된다. 이어 4,19혁명, 3.1운동, 만민공동회와도 만난다. 여기서 고원은 촛불은 이미 20세기 초에 발화되어 온갖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역사의 질곡을 깨고 나라다운 나라, 헌정질서 위에 반듯하게 세워진 나라를 만들고자 자신의 몸을 태우며 독립, 자유, 민주, 복지의 지평을 열기 위해 전진해 왔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지난겨울 비로소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시에 근대국가 건설을 향한 20세기의 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게 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고원이 발견한 촛불의 의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촛불 속에서 근대의 완성뿐 아니라, 우리가 열어갈 미래를 현시(顯示)하게 된다. 그리고 촛불이 우리만이 아니라 근대의 덫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있는 세계를 향한 은총(恩寵)임을 선언하게 된다. 또한 그는 촛불 속에 국가 폭력을 대체할 새로운 권력, 다중(多衆)이 나눔과 소통을 통해 만들어 내는 새로운 힘, 잠재력을 발견한다.

고원의 진짜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찬란했던 광장은 흩어지고, 촛불은 이내 꺼진다. 비틀린 일상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이 척박한 현실에서 촛불이 향한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방향과 내용, 과제와 실천이 필요했다. 촛불이 제시한 방향은 생명 정치이고, 그 내용은 소통하고 공감하는 정치, 가치에 입각한 정치, 연대와 협력을 통한 거버넌스, 작은 것에 주목하는 생활 정치였다. 고원은 새로운 리더십 형성과 정치의 전면적 전환을 핵심적 과제로 제시한다. 독재와 민주, 가해와 피해,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에 갇힌 낡은 리더십을 삶과 생명에 천착하고 과정을 중시하는 민주적·포용적·통합적인 리더십으로 대체할 것, 모든 사람이 소수자가 되어가는 현실에서 다수결에 입각한 갈등적 정치 질서를 합의에 입각한 협력적·상생적 정치 질서로 전환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고원의 글은 우리를 다시 촛불 광장으로 불러내고, 우리가 서 있는 광장과 주변을 보여주고, 그 찬란했던 촛불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속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와 우리가 가야할 세상의 모습을 말해준다. 그리고 일상에 메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토닥이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제시한다.

그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그건 아마도 그가 평생 놓지 못했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예의, 절망에 굴하지 않으려는 의지 때문 아니었을까? 그의 글에는 지적인 통찰력과 원숙함 못지않게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예의, 희망을 낚으려는 간절함이 독자에게 물씬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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