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는 지난 10월, 제4기의 문을 열었습니다. 서울학교 제4기는 앞으로 20강 내외의 답사를 통해 서울의 뿌리 깊은 사연의 현장을 샅샅이 훑으며 깊은 의미와 재미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서울학교 제4기 제3강(전체로는 제60강)은 서울의 안산(案山)이자 남산인 목멱산과 청학동천에 남아 있는 문화유적을 둘러보고, 저물어가는 2017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남대문시장에 있는 유명한 맛집 <막내회집>에서 조촐한 송년회도 가질 예정입니다.
서울학교 제60강은 2017년 12월 10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서 장충파출소(서울시 중구 동호로 256) 앞에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충단-박문사터-벌아현-남소문터-남산소나무길-이태원 조망-경봉수대-목멱신사터-잠두봉전망대-조선신궁터-안중근기념관-백범광장-숭례문-점심식사 겸 송년회(남대문시장 <막내회집>)-상평창/선혜청터(남대문시장)-동래정씨세거지-남산골골목길 탐방-통감부터-통감관저터-옛중앙정보부터-청학동천-한옥마을-천우각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 답사지인 <목멱산과 청학동천>에 대해 들어봅니다.
목멱산 또는 남산의 내력
목멱산(木覓山)은 한양(漢陽)도성의 내사산(內四山)으로 북쪽의 백악(白岳),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남쪽에 위치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안산(案山)의 역할을 합니다. 이 산줄기에서 북쪽 사면인 도성(都城)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청학동천(靑鶴洞天)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남산(南山)으로 부르고 있지만 본래 이름은 목멱산이고, 동쪽의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峯)이라고도 합니다. 누에의 머리가 향하는 한강 건너편에 지금의 국립양잠소(國立養蠶所)와 같은 ‘잠실도회(蠶室都會)’가 조선 초부터 설치되어 있어 이곳을 잠실리(蠶室里)라 불렀는데, 행정개편으로 서울에 편입될 때 이미 송파구에 잠실동이 있으므로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 ‘잠(蠶)’자와 가까이에 있는 신원리의 ‘원(院)’자를 따서 잠원동(蠶院洞)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고속터미널 부근의 잠원동이 그곳입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遷都)하면서 백악을 호국(護國)의 상징인 진국백(鎭國伯)에 봉하고 그곳에 백악신사(白岳神祠)를 짓고 백악신과 삼각산신을 모셨으며, 목멱산에는 국사당(國祀堂)을 세워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고 나라에 큰일이 일어났을 때 하늘에 제사지냈기에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산(南山)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일반명사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전통부락인 마을은 대개가 전해져 오는 풍수지리적 생각에 따라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좌향(坐向)을 남향(南向)으로 하고, 큰 마을이라 할 수 있는 고을들은 대부분 주위가 산으로 둘러쳐지고 앞에는 내(川)가 흐르는 분지형(盆地形)의 형국(形局)으로,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모든 고을의 앞산은 남산(南山)일 수밖에 없으며 도읍인 한양도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국사당(國祠堂)이라고 불리던, 목멱대왕을 모신 사당(祠堂)은 일제가 국사당 아래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인왕산 선바위 부근으로 강제 이전하여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국사당이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팔각정이 들어서 있습니다.
조선의 통신체계는 파발(擺撥)과 봉수(烽燧)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목멱산에는 봉수의 최종 종착지인 경봉수대(京烽燧臺)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파발은 말을 타고 가서 직접 전하는 방식이고 봉수는 불을 피워 연락을 하는 방식인데, 불을 피우는 봉수대는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烽]을 피워, 낮에는 연기[燧]를 올려(晝煙夜火)’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위급한 소식을 궁궐에 전달하였습니다.
봉수제도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의종(毅宗) 때 확립되었으므로 봉수대의 시설도 그 때 확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1422년(세종 4)에 각 도의 봉수대 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1438년(세종 20)에 완비해서 5개 노선에 650여 개의 봉수가 설치되었습니다.
제1봉수로는 경흥을 기점으로 함경도, 강원도의 봉수를 양주 아차산봉수대(신내동)에서, 제2봉수로는 동래 다대포를 기점으로 경상도의 봉수를 광주 천림산(천천현)봉수대에서, 제3봉수로는 강계를 기점으로 평안도, 황해도의 내륙봉수를 무악 동봉수대에서, 제4봉수로는 의주를 기점으로 평안도, 황해도의 해안봉수를 무악 서봉수대에서, 제5봉수로는 순천을 기점으로 전라도, 충청도의 봉수를 양천 개화산봉수대에서 받아서 목멱산에 있는 경봉수(京烽燧)로 전해줍니다. 그 정보는 병조(兵曹)에 종합보고하고 병조에서는 승정원(承政院)에 알려 임금께 아뢰었습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잇는 노선이 두 개인 것은 당시 조선이 중국을 사대(事大)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의 통신망이 발달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봉수는 전황(戰況)에 따라 5번을 올렸습니다. 이상이 없는 평상시에는 1홰,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침범하면 4홰, 접전 중이면 5홰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래서 각 봉수대마다 5개의 굴뚝이 있으며, 안개가 끼고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화포나 나팔 등과 같은 소리를 이용하여 전달하기도 하였고 이 방법도 여의치 않을 경우 깃발이나 봉수군이 직접 다음 연락 지역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했습니다.
정자와 시단(詩壇) 즐비했던 청학동천
목멱산의 북쪽자락 중앙에 위치한 청학동천에는 출사(出仕)하지 않은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북촌에 있는 출사한 사대부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던 정자(亭子)와 시단(詩壇)도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이안눌(李安訥)의 집에 있었던 동악시단(東岳詩壇)이 유명하였는데 동산 기슭에 단을 쌓고 당대 명인인 이호민, 권필, 홍서봉 등과 어울려 글을 외우고 시를 읊기도 하였는데, 그 단(壇)을 이안눌의 호를 빌러 동악시단이라고 불렀고 동악선생시단(東岳先生詩壇)이라고 바위에 음각한 글씨가 지금의 동국대학교 중문 근처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영조 때 문신인 조현명의 귀록정(歸鹿亭)과 고종 때의 영의정인 이유원의 쌍회정(雙檜亭), 정원용의 화수루(花樹樓) 등의 정자가 있었으며 특히 남별영(南別營) 계곡물에 세워진 천우각(泉雨閣)은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집터를 잡아준, 조선의 건국공신(建國功臣)인 권람(權覽)의 집이 있었고 그 집터 위에 소조당(素凋堂) 유적이 있었는데 후에 후조당(後凋堂)이라 했다가 녹천정(鹿川亭)으로 이름이 바뀌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녹천정에서 동쪽으로 필동 골짜기에는 둔덕 바위 위에 ‘청학동이상국용재서사유지(靑鶴洞李相國容齋書舍遺址)’라 새긴 암각글씨가 있는데 이곳이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 불리는 이행(李荇)의 집터입니다. 이행은 우의정, 대제학의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몸이건만 이곳에 공부방을 꾸미고 퇴궐 후에는 망건에 무명옷 차림으로 동산을 거닐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곳에 남산한옥마을이 들어서 있습니다.
남산한옥마을은 1993년부터 1997년까지 4년여 간의 공사 끝에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해풍 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오위장 김춘영 가옥, 도편수 이승업 가옥 등 전통한옥 다섯 채를 복원하였고, 그 주변에는 남산의 산세를 살려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으며 정자, 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습니다.
그리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청학동천 아래 마을에 함께 살았는데, 그 인연으로 임진왜란 때 유성룡에 의해 충무공이 발탁되어 임진왜란의 영웅이 될 수 있었으며, 충무공이 자란 곳이라고 해서 청학동천 아래를 ‘충무로(忠武路)’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목멱산의 동쪽자락에는 훈련원(訓練院)이 있어 하급장교들이 많이 모여 살았고 그들에게 월급 대신 필요한 의복을 공급하였기에 그 의복을 그냥 내다 팔기도 하고 그 천으로 댓님과 띠, 그리고 댕기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한 난장(亂場)이 들어섰는데 이것을 배오개[梨峴] 난장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발달하여 지금의 광장시장(廣藏市場)이 되었습니다.
훈련원 옆에 있었던 군사훈련장인 예장(藝場)은 목멱산 남쪽 자락의 녹사장(綠莎場), 북악 아래 경복궁(景福宮) 신무문(神武門) 밖의 공터(지금의 청와대)와 더불어 조선시대 씨름대회 장소로 유명했었는데, 지금의 예장동이라는 동명(洞名)과 녹사평(綠莎坪)이라는 전철역 이름이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처럼 청계천 하류에 해당되는 목멱산 동쪽 산줄기 아래 지역에는 훈련원이 있어 무인(武人)인 하급장교들이 많이 모여 살아서 이곳을 ‘아랫대’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경복궁의 궐내각사(闕內閣舍)에 출근하는 문인인 경아전(京衙前)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인왕산 아래 청계천 상류지역을 ‘우대’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되며 조선시대 하급관리들에게도 문무(文武)의 차별이 있었나 봅니다.
장춘단, 일제에 항거했던 순국자들의 초혼단
같은 동쪽 기슭에 남아 있는 장충단(獎忠壇)은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여러 장병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 1900년에 만든 초혼단(招魂壇)입니다. 그 이후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甲申政變), 그리고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서 순직한 장병들도 함께 합사(合祀)하였는데 이곳에 제향(祭享)된 인물은 대부분 일제에 항거한 고종을 호위하던 사람들입니다.
을사늑약을 감행한 일제는 1908년에 대일감정을 악화시킨다는 구실로 장충단의 제사를 금지시키고 민영환이 쓴 비석도 숲속에 방치하였으며, 1919년에는 장춘단 일대에 벚꽃 수천그루를 심어 공원으로 만들고, 장춘단 위쪽에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옮겨와 정문으로 사용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제사를 지내는 박문사(博文祠)를 세웠습니다.
장충단을 지나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목멱산에서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도성이 잘려나가고 지금은 그 언저리에 호텔이 들어서 있습니다만 조선 초기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남쪽의 작은 문으로, 광희문(光熙門)과 남소문(南小門)이 있었으나 남소문이 목멱산과 이어져 있어 도적의 출몰이 잦을 뿐만 아니라 위치가 너무 높아서 백성들이 이곳으로 잘 다니지 않고 광희문 쪽으로 돌아 다녔기 때문에 이 문을 폐쇄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소문이 있었던 고개는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더불어 벌아현(伐兒峴)이라고 불렀는데 사연은 이렇습니다.
한양(漢陽)의 종조산(宗祖山)에 해당하는 삼각산(三角山) 세 봉우리 중의 하나인 인수봉은 수려한 자태를 뽐내지만 허리 부분쯤에 조그마한 바위가 불거져 나와 있어 그 모양이 멀리서 보면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어머니 품속을 벗어나면 위험하므로 때로는 혼내주고 때로는 얼러줄 필요가 있어서, 아이를 혼내준다는 버티고개[伐兒峴]와 떡으로 달랜다는 떡전고개[阿峴]의 지명이 생겼는데, 그야말로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를 혼내고 달래며 엄마 등에서 가만히 있기를 바라던 마음에서 그리 하였을 것입니다.
벌아현은 지금의 약수동 고개에 세워진 지하철역인 버티고개역(‘벌주는 고개’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남대문시장 어떻게 생겨났나
서쪽 자락에는 중종(中宗)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 이후 12정승을 배출한 명당 터인 동래(東來) 정씨(鄭氏) 세거지(世居地)가 있었으나 지금은 우리은행 본점 앞에 큰 은행나무가 그 영광을 대신하여 쓸쓸하게 서 있습니다.
수령 500년이 넘는 이 은행나무에는 영험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정광필의 꿈에 하얀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흰 도포를 입은 선인(仙人)이 나타나 은행나무에 정일품이 두르는 각대인 무소의 뿔로 만든 서각대(犀角帶) 12개를 걸어놓고 홀연히 사라졌는데, 그 후 이곳에서 13대에 걸쳐 12명의 정승이 배출되어 그 꿈의 영험함을 증명하였다고 합니다.
정광필은 조선 중종 때 문신으로 1492년(성종 23)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의 길에 들어섰고, 부제학과 이조참의를 거쳐 1502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에게 극간하다가 아산으로 귀양 갔으며 이후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관직에 복귀한 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2차례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조광조(趙光祖)의 급진적 개혁정치에는 반대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다 좌천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선조(宣祖) 때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자인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형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이곳은 고종 때에 정원용(鄭元容)이 집을 호화롭게 가꾸면서 더욱 유명해졌는데, 정원용은 과거에 급제한 1802년(순조 2)부터 사망할 때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신 인물로, 그가 평생 기록한 일기인 <경산일록(經山日錄)>은 조선 말기 격랑의 정치사와 생활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12정승을 열거해 보면 선조 때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선조 때 우의정 정지연(鄭芝衍), 인조 때 좌의정 정창연(鄭昌衍), 인조, 효종, 현종 때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효종 때 좌의정 정치화(鄭致和), 효종 때 좌의정 정지화(鄭知和), 현종 때 우의정 정재숭(鄭載嵩), 영조 때 좌의정 정석오(鄭錫五), 정조 때 우의정 정홍순(鄭弘淳), 정조 때 영의정 정존겸(鄭存謙), 철종 때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순종 때 좌의정 정범조(鄭範朝)입니다.
숭례문(崇禮門)은 한양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달리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르는데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으며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습니다.
특히 세종 때의 개축은 기록에 표현된 대로 ‘신작(新作)’, 즉 새로 지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대규모의 중수를 하게 되는데, 숭례문이 위치한 자리가 낮아 정문으로서 품위가 없을 뿐더러 남쪽 목멱산과 서쪽 인왕산을 연결하는 이곳의 지대를 높여 경복궁이 아늑한 지세 안에 있게 하자는 풍수지리적인 이유에서 그리 하였습니다.
지금은 지붕 형태가 우진각 지붕이지만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으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화마(火魔)도 비켜간 현존하는 서울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木造建物)이었으나,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인한 화재로 2층 문루는 90%, 1층 문루는 10%가 소실되고 홍예문과 석축만 남았던 것을 2010년 2월 착공하여 약 3년의 복구공사를 한 뒤 2013년 5월 4일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한양의 조산(朝山)인 관악산의 형세(形勢)는 화성(火星)으로, 예로부터 ‘왕도남방지화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화기(火氣)의 산이었는데 이러한 화기를 누르기 위한 압승책(壓勝策)으로 남대문 밖에 인공 연못인 남지(南池)를 조성하였고 관악산 옆에 있는 삼성산에도 연못을 설치하였고 관악산 주봉인 연주대에는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단지를 놓아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양도성 사대문의 글씨를 모두 가로로 썼지만 남대문만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세로로 써 비보를 하였으며, 숭례문의 례(禮)는 5행(行)의 화(火)에 해당되고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상형문자(象形文字)이므로 숭례(崇禮)라는 이름은 세로로 써야 불이 타오를 수 있고 이렇게 타오르는 불로 관악의 화기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야말로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以火制火] 불로써 불을 다스리는[以火治火] 셈입니다.
한편 편액의 필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숭례문 옆에 있었던 상평창(常平倉)은 곡식의 가격을 조절하기 위해 곡식을 사들이고 내다 파는 일을 하던 곳입니다. 상평(常平)이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줄임말로 풍년이 들어 곡가가 떨어지면 곡물을 사들여서 가격을 올리고, 흉년이 들어 곡가가 폭등하면 상평창의 곡물을 풀어서 가격을 떨어뜨리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공납(貢納)과 진상(進上)으로 거둬들인 곡물이나 특산물을 보관하던 기관인 선혜청(宣惠廳)의 창고인 선혜창(宣惠倉)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상평창일 때는 곡물만 있어 난장(亂場)이 서지 않았으나, 선혜청 창고로 바뀌면서 많은 종류의 물건들이 거래될 수 있는 난장이 섰는데 이를 일러 ‘새로 들어선 창고[宣惠倉] 안에 펼친 난장’이라는 뜻의 ‘신창내장(新倉內場)’이라 하여 지금의 남대문시장을 말하였으며 그 흔적이 남창동(南倉洞), 북창동(北倉洞)이라는 동네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도로가 발달되면서 중앙과 지방간의 문서 전달 관문, 공세(貢稅)의 수송, 또는 관료들의 공무여행 때 마필의 잠자리나 먹이 등을 제공하기 위해 100리마다 원(院)을, 30리마다 역(驛)을 두었는데, 원은 주로 공용여행자의 숙소 및 식사를 제공하기 위하여 역 가까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도성 밖의 첫 번째 다다르는 원(院)은 동쪽은 흥인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서쪽은 무악재 넘어 홍제원(弘濟院), 남쪽은 목멱산 아래 이태원(梨泰院), 광희문 밖의 전관원(箭串院)이 있었으며, 이태원은 목멱산 남쪽자락, 지금의 용산고등학교 정문 부근에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원(院)의 역할을 하던 이태원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외국인들을 일컫는 이타인(異他人)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바뀌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미처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한 일본인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고, 병자호란 때 중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還鄕女]들이 얼굴의 모양새가 다른[異胎] 자식들과 함께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이태원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가까이에 있는 용산(龍山)이 일본군과 중국군과 미군이 차례로 점령하여 머물던 외국군 주둔지인 것도 한번 새겨볼 일입니다.
그리고 목멱산의 상징인 ‘남산 위의 저 소나무’도 이곳 남쪽 기슭에서 자생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곳을 보호구역으로 설정하여 훼손을 방지하고 조림, 육성하고 있어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의 멋있는 자태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북쪽 자락의 일본인 유적
목멱산 북쪽 자락에는 일본인들과 연관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남산3호터널 입구인 인현동에는 일본의 사신이 머물면서 묵었던, 지금의 일본대사관에 해당하는 동평관(東平館)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남산1호터널 입구, 옛 중앙정보부 자리에는 조선통감(朝鮮統監)의 관저(官邸)가, 남산순환도로 옛 한국방송 터에는 조선통감부가 들어섰으며 목멱산에는 조선신궁을 건설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목멱산 아래 본정방(本町坊. 지금의 명동)에는 일본인 상권(商圈)이 형성되면서 종로와 동대문의 조선인 상권을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목멱산 아래 명동 일대는 지금도 일본인 관광객들이 제일 선호하는 관광코스로서, 최근에는 인현동에서 남산순환도로에 이르는 가파른 언덕길 골목에는 일본 관광객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조선신궁 터 바로 옆에는 안중근(安重根)기념관이 들어섰고 그 아래 광장에는 백범광장이 새롭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등산 차림, 스틱, 모자, 장갑, 선글라스, 식수,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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