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도 서슴지 않고 '6·25이후 가장 심각했던 사태'라고 단정한 '난리'였다. 마치 일년 내내 계속된 것으로 착각될 만큼 질긴 충격으로 남아, 그 '안보 불안'이 새해로 건너간다. 언론들이 뽑은 10대 뉴스에서도 '연평도 사태'는 이른바 '천안함'과 함께 묶여, 첫 머리 자리를 차지했다.
▲ 연평도 사태 이후 보고를 받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연합 |
그래서일 것이다. 그가 생각난다. DJ다. 그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 안보문제로 국민을 이토록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MB식 대북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정리되어 가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그런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홍사덕·정두언·남경필 의원, 모두 지각 있는 당내의 중진 들이다. 뒤이어 입을 연 정몽준 전 대표까지, 표현은 달라도 모두 방향은 같아 보인다.
"햇볕정책에도 일정부분 '성과'가 있고, MB의 대북정책에도 일정부분 '단점'이 있다"고 했다. 누구나 지금까지의 주장내용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할 때, 꼭지를 따는 '도입부'의 어법(語法)이다. 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적인 변화의 시작이다. 햇볕정책은 '퍼주기'로 '안보해이'만을 초래한 '이적행위'라는 게 한나라당의 '발성법'이었다. MB의 생각은 물론 지금도 그렇게 추호의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MB는 이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생각해야 한다. 국민을 안심시키면서 나라를 이끌고 가야하는 준엄한 책무를 깨달아야 한다. 문제는 그러지 않아 보이는데 있다. '남북 정상'끼리의 6·15와 10·4선언을 깔아뭉개 버렸다. '비핵·개방·3000'이란 현실성 거의 없는 대북정책으로 극도의 긴장구도를 연출했다. 남북관계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
우리의 처지를 살피지 않은 채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에 매달렸다. 중국·러시아와 불필요한 갈등 관계를 불러들였다. 한·미·일이 한편이 되고, 북·중·러가 반대편에 섰다.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손해를 자초하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오늘은 그래서 그가 더욱 생각난다. DJ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미·일·중·러를 돌면서 등거리 외교의 연결고리를 얽어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평양에 갔다.
2001년 10월 필자가 공직에 있으면서 그를 수행해 상해에 갔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석 때였다. 진지앙 호텔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DJ에게 "따꺼(大兄)"라 불렸다, '형님'이란 말이었다(DJ는 1924년 1월생이고, 장쩌민 주석은 1926년 8월생이었다).
그리고 두 정상은 농담을 섞어가며 회담을 이어갔다. 마치 오래된 친구 사이 같았다. 더 할 수 없이 따뜻한, 그래서 부럽기까지 한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가 '빨갱이 나라' 된 것도 아니고, 그런 우애 가득찬 회담 때문에 이 나라가 '국격(國格)'이 훼손되거나 손해본 것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관계였다면 요즘 같은 한·중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명백한 범법선원들을 그저 비행기 태워 보내는 '쪽팔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남북관계와 주변국외교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DJ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독재시절 감옥생활을 할 때 독방에서 김일성 주석과 무수히 '장기'를 두었다고 했다. 물론 상상 속의 장기다. 나라의 이해관계를 다투는 장기다. 그리고 그는 '4대국 보장론'을 창안해냈다. 미·일·중·러 4대국이 남북한의 안전을 우선 보장한 뒤, 통일로 가는 문제가 모색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바로 남북한과 미·일·중·러가 참석하는 오늘날의 '6자회담'이다.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 전에 DJ는 그랬다. 그때도 DJ는 '사상'을 의심 받았다. 독재세력이 그랬다. 2000년 6월1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마친 그가 서울공항에 돌아왔다. 그때의 귀국보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다. 그때 그는 남북교류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철통같은 안보태세가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고 단호하게 못 박았다.
아무리 '안보해이'를 부른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강변해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한다. 정말로 '잃어버린' 세월이라 쳐도, 자기들은 이른바 '되찾은 지' 3년이나 됐는데도 저토록 처참하게 당한 것을, 그리고 온통 국민을 불안의 늪 속에 밀어 넣은 '안보불량' 정권이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방통행'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사려 깊지 못한 편견'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균형감각의 상실'을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라를 사기업이나 사조직 다루듯 하면서 사적(私的) 감정이 판을 치는 이 별난 상황이 아슬아슬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심지어 안보분야에서까지 그렇다.
최근 육군참모총장을 바꿨다. 부동산 문제로 낙마한 총장 후임에 다른 것도 아닌 농지법 위반과 부동산 투기의혹이 있는 사람이 '당당하게' 임명됐다. 대통령과 같은 동지상고 출신이기 때문일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육해공군 참모총장이 모두 영남 출신으로 임명된 적은 YS 정권 이래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3군 참모총장 중 두 명과 요직인 수방사령관은 포항 출신이라 했다. 대통령은 '아주 공정한 인사'라고 했다.
동지상고는 포항시 북구 용흥동에 설립된 사립학교였다. 1946년 동지상공중학교로 문을 열고, 6·25직후인 1951년 중고교가 분리되면서 동지상고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 학교는 그 뒤 1984년 동지종합고등학교를 거쳐 1989년 동지고등학교로 인문계 고교가 된다. 따라서 지금 동지상고는 없다. 그러나 대통령과 그의 '형님'이 이 학교 출신이어서, 지금 있지도 않은 '과거의' 동지상고는 사후에 일약 막강한 '성골'고등학교가 되었다. '독식(獨食)상고'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이른바 영포라인도 그 핵심은 동지상고다
4대강 사업의 낙동강 공구에서 낙찰 받은 콘소시엄에는 9개 공구를 포항의 6개 기업이 차지했다. 그 중 8개 공구는 동지상고 출신기업이 거머쥐었다. 국회 이석현 의원은 "경상남북도에 374개의 고등학교가 있는데 왜 동지상고 한 개 고등학교 동문들이 낙동강 사업을 휩쓴 것이냐"고 물었다. 4대강 사업을 운하계획으로 바꾼 비밀팀에도 핵심에는 동지상고 출신의 청와대 행정관이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 쪽의 '예산독식'도 '형님' 말대로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년 예산 강행처리 직전 한나라당은 '형님예산'을 당초보다 1340억 원 늘려주었다. "너무 심하다는 말이 있다"고 기자들이 '형님'에게 물었다. "그 이야기, 작년에도 나왔고 재작년에도 나왔다"고 '형님'은 대답했다. 그것은 곧 금년 한번만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라 3년간 계속해 세 번이나 그랬다는 이야기가 된다.
내년 예산의 막판 증액과정에서 영남지역은 3084억 원이 늘었다. 호남지역은 55억 원 불었다. 충청지역은 5억 원이었다. 이런 건 절대로 '공정사회'가 아니다. 동지상고라는 특정 고등학교, 영일과 포항이라는 특정 도시, 영남이라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조직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는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다.
'대포폰 게이트'도 본질은 정부기구의 사조직화를 통한 불법 뒷조사 - 약점캐기다. 언론이 그려놓은 '관련자'들의 '계통도(系統圖)'를 보면 무슨 동창회나 향우회 조직 같다. 맨 위에 우선은 '형님'이 자리잡고 있다. 온통 나라가 '사조직의', '사조직에 의한', '사조직을 위한' '사설정치'에 휘말려 있는 것 같다. '사설(私設)'이 판을 치면 '공설(公設)'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공설'정치는 공론을 중시하는 정치다. 공설정치가 맥을 못추면 믿음(信)에 문제가 생긴다. 국민들이 정치를 믿지 못하면(信無) 나라가 바로 설수 없게 된다(不立). MB의 2010년은 그것을 교훈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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