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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을 보낸 게 아닙니다. 인신을 내준 겁니다"

[심층 취재-한국 해외입양 65년] 2. 입양의 정치경제학 ⑧

※이 기사는 이경은 고려대학교 인권센터 연구교수, 제인 정 트렌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 입양인 모임 대표의 도움으로 취재, 작성되었습니다.


"우리가 '해외입양'이라고 표현을 해서 그렇지,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입양'을 보낸 게 아닙니다. 한국에서 한 일은 그저 아동의 인신을 내준 것 밖에 없습니다." (김도현 '뿌리의 집' 목사)

2013년 전까지 한국 아동은 미국으로 입양될 때 IR-4 비자를 받았다. IR-4 비자는 '미국 시민에 의해 미국에서 입양될 예정인 고아(orphan to be adopted in U.S. by U.S. citizen)'에게 주어진다. 이 비자를 받은 아동은 '입양'이 아니라 '입양 예정'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것이고, 양부모에겐 2년 동안의 '후견권'이 주어진다. '입양 예정'인 아동과 부모는 미국에서 별도의 입양 재판을 해야 법적인 '부모 자식' 관계가 된다. 출생국에서 입양이 완료된 아동은 IR-3(orphan adopted abroad by U.S. citizen) 비자를 받고 입국한다.

미국 정부는 양부모가 아동을 직접 만나 입양 절차를 밟았느냐는 사실을 근거로 '입양 완료' 여부를 판단한다. 2013년 전까지 한국 아동의 입양은 입양기관이 모든 절차를 대신해줬다. 입양부모는 한국에 한 번도 오지 않아도 한국 아동을 입양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시작된 '대리입양' 관행…2100여 명의 아기가 전세기에 실려 단체 입양


이는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해외입양 행태에서 기인한다. 종교적 신념을 갖고 한국 아동 8명을 직접 입양하기도 한 해리 홀트는 1955년 홀트씨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외입양 사업에 뛰어들었다. 홀트는 미국 난민법을 근거로 한국의 혼혈아동들을 미국에 대규모로 입양 보내면서 '대리입양'을 추진했다. 한국 아동의 입양 부모가 되기를 원하는 대다수의 부부들이 한국을 방문해 입양 절차를 밟을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당시 전세기를 빌려 입양아동을 한꺼번에 최대 129명까지 이송하는 과정에서 사망 아동도 발생(총 5명)하고 한 비행기를 탄 아동 23명이 집단적으로 발병하는 등 사고가 일어나고, 양부모 심사 과정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게 되자 미국 사회복지계 내에서는 '대리입양'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반발이 일어났다.


<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홀트아동복지회 펴냄, 2005)에 따르면, 홀트는 1956년부터 1961년까지 26편의 전세기를 띄워 총 2010여 명의 아동을 미국으로 보냈다. 또 1963년과 그 다음 해 2편의 전세기로 입양부모들을 한국으로 실어나르기도 했다. 1972년 여름에 100여 명의 입양 아동을 실어나르는 전세기까지 포함해 2110여 명의 아동이 홀트의 전세기를 통해 집단으로 미국에 이주했다.

▲ 1950년대 홀트씨양자회가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미국으로 이동하는 입양 대상 아동들.ⓒ홀트아동복지회 50년사


결국 1961년 미국 내에서는 '대리입양'이 법적으로 금지됐으나, 같은 해 한국에서 고아입양특례법을 제정하면서 '외국인은 각령에 정하는 기관으로 하여금 입양절차의 일부를 대리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또 미국에서도 1961년 이민법상 '고아' 규정이 생기면서 양부모가 입양할 예정인 아동에 한해 미국으로 이주가 가능해졌다. 이는 해리 홀트를 비롯해 해외입양을 원하는 부모들이 활발히 정치적 로비를 한 결과다.

이처럼 입양 대상 아동과 부모를 선별하고 아동과 부모에게 적절한 상대를 찾아주는 핵심적인 업무는 공적인 사회복지체계에서 벗어난 사적인 입양중개기관이 전담을 하며, 국가는 아동의 '몸'이 국경을 건너는 '이주' 과정에만 개입하는 '사영화된 국제입양 모델'은 한국과 미국에서 탄생했다. 한국 정부는 외교부의 업무 영역에 포함되는 국외 이주 허가를 국제입양에 대해서만 보건복지부로 넘겼다.

이런 한국과 미국의 법과 제도적 틀 안에서 한국에서 많은 아동들이 '입양 예정 아동'으로 IR-4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입국하면서 보장 받은 것은 10년 기간의 영주권이다. 이 아동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려면 '입양 예정'이 '입양 확정'으로 바뀌어야 하며, 이는 입양을 약속한 양부모가 미국의 주법원에서 입양 재판을 완료해야만 한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아동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 출신 입양인 1만9000여 명이 미국 시민권 미취득자로 추정된다. 이는 전체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 출신 입양인(2016년 기준 11만1148명)의 17%에 해당하는 숫자다.

미국은 왜 전 세계 아동을 입양할까?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아동을 국제 입양하는 국가다. 2015년 미국은 5648명의 아동을 해외입양했다. 해외입양이 가장 활발했던 2004년에는 2만2884명의 아동을 해외입양했다. 미국의 국제입양에서 특이한 점은 부부가 통상적으로 입양을 생각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인 '불임'이 주된 동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제입양에 관한 미국의 한 전국 조사에 따르면, 입양부모들은 불임을 입양 이유 중 네 번째로 꼽은 반면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부모 노릇' 그리고 '인도적.종교적 동기'를 첫 번째 이유로 들었다. (김동수, "한국인의 시각에서 본 국제입양", 2015)

국제입양을 하는 미국 부모들에 대해 심층 취재한 책인 <구원과 밀매-복음주의 기독교의 선의와 국제간 아동 입양의 현실>(캐서린 조이스 지음, 2014)에 보면 '인도적.종교적 동기'로 입양을 하는 여성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가 만난 샤론이라는 여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자녀는 모두 낳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피임을 하지 않아 이미 7명의 친자녀를 둔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였다. 그녀는 '고아'를 구원해야 한다는 열망으로 국제입양을 열렬히 희망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양을 희망했던 과테말라와 라이베리아는 모두 늘어나는 입양수요를 채우기 위해 아동 납치, 밀매 등 문제가 발생하자 미국으로 해외입양을 중단했다.

그러자 샤론은 국내입양으로 눈을 돌려 텍사스에서 흑인 여자아기를 입양했다. 입양절차가 끝난 직후 그녀는 또 다른 아이를 입양하러 나섰고, 샤론은 1년 반 동안 세 아이를 입양했다. 먼저 텍사스에서 온 여자아기가 있고, 다음으로 라이베리아 출신으로 원래의 입양가정에서 파양된 후 샤론의 집에 온 소년이 있었다. 끝으로 남녀 성기를 둘 다 지니고 태어난 건강상 문제가 많은 아이를 입양했다. 이렇게 입양을 하고도 이들 부부는 다른 아이의 입양을 생각했다. 가정 위탁을 받고 있는 어느 자폐아 소년을 만나려고 두 사람은 미국 끝에서 끝까지 차를 몰고 갔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워싱턴 주에서 장애아를 입양했으나 나중에 행정 절차상의 문제로 다시 돌려줘야 했다. 한번 파양 경험이 있는 라이베리아 소년은 입양된 다른 아이가 되돌아갈 때마다 울었다. 샤론은 언젠가는 자신이 직접 입양기관을 만들거나 고아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시점인가, 샤론의 가족은 파양 경험이 있던 그 라이베리아 소년을 미주리에 있는 부적응소년 쉼터로 보냈다. 정서적으로 둔감하고 이상 행동으로 다른 가족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샤론은 자신의 가족은 다음 번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에이즈 양성반응자인 십대 한 명을 입양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 캐서린 조이스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입양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입양은 낙태를 반대하는 친생명(pro-life) 정치의 확장이다. 이들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에게 낙태를 하지 말고 입양 보내라는 요청을 하는 운동을 벌인다. 또 이들에게 입양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찾도록 인도'하는 선교 행위다. 이들은 전 세계 곳곳에 미국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면서 입양을 기다리는 수억 명의 고아가 있는 '고아 위기' 상황이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현실은 교회 입양운동이 복음주의 신자에게 구원할 아이들을 찾아 나서라고 열심히 권하다보니 이에 따라 더 많은 '고아'가 양산되고 있으며, 국제입양은 하나의 커다란 산업이 됐다. 샤론이 입양을 희망했었던 과테말라의 경우, 한때 신생아 100명 당 1명꼴로 미국에 입양을 보내기도 했다.

2012년 입양특례법 전부 개정..."입양은 뼈아픈 결별에 기초한다"


한국의 해외입양 제도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는 이명박 정권 때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의지가 아니었다. 성인이 된 입양인들의 경험과 주장, 시민사회단체들의 개입, 미혼모와 아동 인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의식 변화,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 등 국제 사회의 압력 등에 따른 '외과적 수술'이었다. 이경은 고려대학교 인권센터 연구교수는 "당시 민법에 아동입양과 파양에 대해 가정법원 허가제 도입하는 개정안을 추진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입양특례법 상의 해외입양도 같이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2011년 8월 민주당 최영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입양특례법 전면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 개정안이 아니라 당시 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 법안은 입양인 당사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법안이었다. 과거 '입양 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이었던 공식 명칭을 '입양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으로 바꾼 것 자체가 이 개정안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제인 정 트렌카 대표는 "입양이란 친생부모와 아동의 뼈아픈 결별에 기초해 시작되는 일이라는 점에서 입양을 촉진하는 패러다임을 폐기하고 친생부모와 입양 위기에 노출된 아동이 결별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권리를 보호하는 조치, 즉 친생가족 권리 보호를 정책의 핵심으로 다뤄야 한다"고 개정 취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2012년 8월 5일부터 시행된 이 법만으로 60년 가까이 누적된 해외입양의 문제를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다만 개정된 입양특례법은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역할은 할 수 있었다.

입양특례법 개정에 따른 가장 큰 변화는 법원, 보건복지부 등 공적기관이 전혀 개입하지 않고 사적 기관인 입양기관에 일임했던 해외입양 과정에 가정법원이 개입하게 된 것이다. 입양특례법 제11조에 따르면, 아동의 입양은 출생신고 증빙서류 등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 동법 2항은 '양자가 될 사람의 복리를 위하여 양친이 될 사람의 입양의 동기와 양육능력, 그 밖의 사정을 고려하여 입양 허가를 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입양특례법 시행 1년, 한국 아동은 여전히 IR-4 비자를 받았다


이처럼 입양이 가정법원의 입양재판을 통해 결정되는 '허가제'로 바뀌었지만, 지난 60년간 계속된 해외 '대리입양'의 역사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입양기관과 미국의 입양부모단체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들은 양부모의 한국 방문을 의무화할 경우 한국 아동에 대한 선호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티브 모리슨 한국입양홍보회 대표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해외입양을 추진하는 입양기관이 법원으로부터 '꼭 양부모가 법정에 오지 않아도 입양을 진행할 수 있다'는 문서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한국입양홍보회 측은 당시 양부모가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도 줄여 약 10일안에 모든 절차를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청원을 복지부와 국내 입양기관에 전달했다. ("입양특례법 개정에도 한국아동 '국제미아' 위기" , 연합뉴스 2013년 4월 4일 보도)

앞서 지적했듯이 양부모가 한국을 방문하지 않고도 입양이 가능했기 때문에 한국 출신 아동은 IR-4 비자를 받았고, 이는 입양 아동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가정법원에서 입양재판이 진행되더라도 양부모가 출석하지 않고 입양기관에서 대리할 경우, 한국 출신 아동은 IR-4 비자를 계속 받아야 한다. 입양기관과 미국 입양부모들은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에 방문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압력을 넣은 셈이다.

이 당시 한국을 제외한 상당수의 나라가 이미 해외입양 시 양부모 방문을 의무화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가나, 아이티, 온두라스는 외국인이 입양을 원할 경우 2차례 입국하도록 규정하고 있었고, 중국, 콜럼비아, 코스타리카, 인도, 홍콩은 양부모가 7주까지 국내에 머무르며 직접 입양절차를 직접 밟도록 하고 있었다. 국제입양 문제에 있어서 한국이 얼마나 자국 출신 아동 인권 보호 문제를 등한시 해왔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정법원은 '양부모 출석 여부'를 법 시행 후 9개월이 지나서야 확정했다. 입양특례법이 국회를 통과한 시점으로 따지면 1년 9개월이 지나서야 결론을 내린 셈이다. 덕분에 2013년에 미국으로 입양된 아동 중 68명이나 IR-4 비자를 받았다. 그해 IR-3 비자는 71명이 받았다.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시행되던 2012년에는 IR-4 비자를 628명, IR-3 비자는 단 1명만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통과된 후에도 696명이나 IR-4비자를 받았다.

▲ 2001년부터 2016년까지 IR-3와 IR-4 비자를 받은 한국 출신 아동 숫자. 미 국무부 통계를 집계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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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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