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0월 25일(구력) 레닌을 지도자로 한 볼셰비키가 '2월 혁명'으로 태어난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10월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바로 이튿날 혁명 지도부는 1차 대전 교전국들에게 강화협상을 제안하고, 지주와 교회와 황실이 소유했던 땅을 농민들에게 넘겨준다는 '토지령'을 공표했으며, '소브나르꼼'으로 불린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를 구성했다. 그 세 가지는 1917년 2월에서 10월로 전진한 러시아혁명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호들, 즉 평화와 토지,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400만 명의 군인을 동원하면서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간 전쟁은 즉각 중단되어야 했고, 땅은 무위도식하는 지배층이 아니라 그것을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주어야 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시킬 사회주의 체제의 수립은 러시아 혁명가들이 수십 년 동안 시베리아 유형을 마다 않고 줄기차게 추구해 온 목적지였다.
전쟁 중단이 국제적 과제요, 사회주의체제 건설이 궁극적 과업으로 일정에 올랐다면, 굶주리는 인민에게 빵의 공급을 좌우할 토지 문제는 대다수 러시아인의 기본적 요구였다. 그것은 체제와 이념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사회 문제였다.
농촌에서 전통적인 농민공동체를 해체하고 부농의 육성을 통해 농업 문제를 해결한다는 과거 차르 체제의 정책은 결국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버려졌다. 따라서 토지와 빵의 공급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따라 혁명으로 들어선 새로운 체제의 정당성과 국가-사회관계의 성격이 규정될 것이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체제'의 운명을 가른 문제이기도 했다.
실제로 러시아혁명은 전 기간에 걸쳐 식량의 배분과 생산의 조직화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인식에 기초한 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토지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 농업생산의 전체 체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혁명의 성공과 새로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문제였다. 바로 여기에 러시아혁명과 그 결과로 탄생한 소련체제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반 러시아 농민운동을 깊이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놓여있다.
러시아혁명은 1905년에 폭발하여 거의 2년 동안 제정러시아를 뒤흔들었으나 결국 전제군주제의 경찰봉에 잔인하게 진압 당했다. 그리고 1917년에 다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거센 파도로 되돌아와 세상을 삼켜버렸다. 그 혁명은 사회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혁명 연구자들은 주로 도시의 노동자 및 군인들의 봉기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당의 역할에 주목해왔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은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유럽에서 태평양까지, 북극에서 흑해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유라시아제국의 파열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민족혁명의 성격을 띤 것이기도 했다. 제국의 수도였던 뻬뜨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만 민중봉기가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변방의 민족들은 자결과 독립을 추구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이 바로 볼가강 연안에서 우크라이나,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 걸친 거대한 제국의 영토에서 불타올랐던 농민봉기의 치열함과 그 사회적 성격이다. 작고한 러시아의 역사학자 V. 다닐로프가 1980년대 말부터 열리기 시작한 방대한 소련 시기 문서고 자료를 접하면서 새롭게 개념화한 작업이 바로 농민혁명론, 즉 1917년 러시아혁명의 본질은 농민혁명이라는 주장이다. 다닐로프 교수와 협업했던 영국의 사회학자 T. 샤닌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 작업을 계속해왔다. 최근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깐드라쉰, 바바쉬낀 등 여러 후학들에 의해 농민혁명론을 뒷받침하는 비중 있는 저술들이 연이어 집필되고 각 지역에서 관련 자료들 또한 속속 발굴되고 있다.
농민혁명론의 근거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혁명 전후 러시아 사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주민이 바로 농민이었고, 바로 그 농민들이 혁명 과정에 적극적으로, 그것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농민들의 행태와 새로운 농업체계가 소비에트 체제의 성격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먼저 1897년의 센서스에서 농민층은 러시아제국 인구 전체의 84%인 약 1억 명을 헤아렸다. 혁명의 직접적 계기가 된 1차 대전 전야 1914년 제국 인구의 18%만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도시민의 다수도 이제 갓 농촌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1917년 시점에서 러시아의 공장과 광산, 건설공사장 노동자들은 다 합쳐도 약 35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 3년 동안의 격렬한 내전을 치르고 난 뒤 1921년 노동자들의 숫자는 150만 명에 불과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상실' 현상이었다. 혁명 전후 러시아는 명백히 '농민의 나라'였다.
따라서 농업 문제의 해결, 그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와 행태는 1917년의 세계를 뒤흔든 사건에서, 그리고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한 강제적 농업집산화와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한 '위로부터 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심적인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이 문제를 제쳐놓는다면 러시아혁명은 그 주된 사회적 성격을 상실하고 극소수가 기존 권력을 뒤엎은 쿠데타라는 사건으로 축소되어 해석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 과정에서 러시아 농민들이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려고 했는가? 자신들이 보유하고 경작할 수 있는 토지와 가축(축력)의 태부족으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던 농민들에게 혁명은 무엇보다 지주 편에 섰던 구체제의 종말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혁명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권력은 즉시, 주요하고 긴급한 사회문제, 즉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1917년 봄에 농민들의 요구를 집약한 최대, 최고의 전국적 조직 형태는 '농민대회'였다. 주도 세력은 각 지역의 협동조합이었던 바, 그 조직은 전쟁 기간에 오히려 역량이 강화된, 다수의 농민들을 조합원으로 거느리고 있던, 나라 안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진 조직이었다. 농민의 이해관계를 수호하겠다고 자임한 정당인 '사회주의혁명가당'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10월에 권력을 잡게 되는 볼셰비키는 농촌에서 눈을 씻고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러시아 각 지역 농민대회의 공통 구호는 즉각-즉 임시정부가 계획하고 있던 제헌의회의 소집 전에-토지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폐지할 것, 지주·개인농·교회의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이양할 것, 모든 종류의 토지거래(매매)를 금지할 것, 기존 소유자로부터 수용한 토지를 농민들 사이에서 평등하게 분배할 것 등이었다. 또한 농민들은 각 지역에 농민의 권력기관을 설치할 것과 그 새로운 기관에 토지개혁 관할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2월 혁명의 산물인 임시정부는 농민들의 그런 과격한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력을 동원해 농민운동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민주정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즉 임시정부가 혁명정부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농민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농민들의 봉기는 1917년 여름을 지나면서 오히려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농민들은 이제 1905년보다 훨씬 더 급진적으로 행동했으며, 이제 막 전선에서 돌아온 무장한 군인-농민들이 그 선봉에 섰다. 그해 봄까지는 대체로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농민운동은 이제 토지 소유자들과 그 장원에 대한 폭력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저택과 농장에서 지주들을 쫒아냈다. 급진화한 농민봉기가 러시아 전역에서 토지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 농민 봉기의 와중에 기존 신분제 권력 체계가 제거되고, 러시아 각지에서 인민권력위원회, 연맹, 소비에트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농민 권력'이 수립되었다.(V. Kondrashin, 2017)
요컨대,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가 하루 밤 만에 권력을 잡기 전에 이미 전국적으로 진행된 '농민혁명'을 통해 당대 러시아의 최대 사회문제인 토지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새 정부의 '토지령'은 그러한 사태를 사후적으로 추인한 조치에 불과했다. 땅을 농민들에게 돌려준 것은 레닌도, 그 어떤 혁명 정당도 아니었다. 농민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얻어낸 것이었다. 3세기에 걸쳐 농노의 신분으로, 하지만 농민공동체를 통해 자치의 전통을 이어 온 '순박한' 러시아 농민들의 급진성과 자발성의 분출, 그리고 그 놀라운 조직적·정치적 능력의 성과물이었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의 성공은 직접적으로는 뻬뜨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지지를 받은 볼셰비키 무장봉기의 승리로 보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가 농민혁명의 성과를 '이미 확보된 현실'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기존 '사회주의' 이론으로 보면 그러한 조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줌으로써 그들을 소소유자(즉 소부르주아계급)로 만들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냉철한 현실주의 정치가 레닌의 판단은 주어진 기회를 직관적으로 이용하는 담대한 실천을 통해 이론의 회색지대와 제한된 인식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농민혁명론의 프리즘을 통해 러시아혁명을 다시 본다는 것의 또 다른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20세기 초 유럽 전체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부였다고 볼 수 있는 러시아 '임시정부'의 실패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그 하나이다. 그 정부에는 최고 수준의 러시아 지식인들이 모여서 향후 새 정부가 추진하게 될 '진보적 농업정책'을 작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르주아정부'는 폭발적인 농민운동과 적대적 입장에 서서 농민대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전문가들은 농촌 현장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즉각 토지혁명의 실시를 원하는 농민들의 요구를 소홀히 한 채 '사무실에서' 합리적 방안을 강구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혁명은 '합리성'을 뛰어넘는 범주의 사회적 격변이었지만, '이성적' 지식인들에게 그 현장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당장' 사회 문제를 해결하라는 대중의 요구는 무책임한 행태로 보였다. 결국 그들은 기회를 놓치고 10월의 마지막 날들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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