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역사가 누군가에 의해, 무슨 이유로든 후대에 재해석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것이라면,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사건들은 당연히 그 앞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러시아혁명도 한편으로 1991년 소련체제가 무너지고 방대한 문서고(archives)가 열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20세기 말 이후 보편적으로 확장된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재평가될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고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지적을 상기할 만하다.
"요컨대 짧은 20세기의 역사는 러시아혁명과 그것의 직접적, 간접적 결과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상)』 중에서)
1917년에 극적으로 폭발한 러시아혁명과 뒤이은 소련체제의 성립, 그리고 2차대전을 통해 서구문명이 겪었던 파국적 위기와 구원의 과정은 말 그대로 역설의 세계사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지상에 나타났으나 그것이 실현한 사회는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가하면 10월혁명을 목도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볼셰비키정권을 용납할 수 없는 야만의 체제라고 전복하려고 했던 유럽의 자유주의-자본주의체제는 1941-45년 동안 바로 그 소련인민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파시즘의 군홧발로부터 벗어나고, 결국 20세기 후반기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과 그 거대한 세계사적 영향을 모르고서는 지난 세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홉스봄의 지적은 21세기 들어 기존의 서구-미국 중심 자유주의세계의 균열과 국제적 세력균형의 변전(變轉)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1914년 시작된 유럽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폭발했던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2월에서 10월로 진전됨에 따라 정치권력과 엘리트의 교체를 통해 사회계급 관계에 극적인 역전을 초래하고, '사회주의'를 깃발로 내세운 새로운 이념국가의 수립을 가져왔다. 나아가 그 체제는 내부적으로 토지혁명에서 공업화, 그리고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사회경제적·문화적 변동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정치혁명을 넘는, 최초의 사회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고, 나라 밖 국제질서의 구성과 대안적 정치경제체제의 제시라는 점에서 20세기의 역사에 매우 깊고 오랜 충격을 던졌다.
먼저 러시아혁명은 군주제-농노제, 또는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와 같이 당시까지 서구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정치·경제체제와는 다른 '국가중심 사회주의'라는 인간사회 조직의 대안적 발전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세계무대에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었다. 전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생산과 분배의 사회적 조직화, 그리고 역시 국가 주도의 인민 생활제도의 편성은 1914년까지 유럽에서 대세를 이루었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는 구조적으로 다른 사회조직 방식이었다. 독립적 개체로서 자신의 이익과 부를 추구하는 인간형은 공동체와 집단 속에서 사회적 평등과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를 당위로 여기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당대 자신의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대중의 불신을 자초하면서 지독한 불임 현상에 시달리고 있던 20세기 초반 의회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이념적·체계적 대안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지배 엘리트와 부르주아들에게는 근본적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혁명의 폭발적 계기와 현실이 강요한 사회주의 이념의 왜곡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전쟁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발생한 '전시(戰時) 혁명'이요, '전시 사회주의체제'였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충분히 발달된 상태에서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적·의식적 역량을 통하여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단계가 도래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예측했던, 그런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레닌이 분석했던바 '세계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에서 터졌던 제국주의시대 혁명이요, 안토니오 그람시가 칭했던바 ''자본(론)'에 반反하는 혁명', 즉 압도적인 농민의 나라에서 폭발한 '피압박 민중·민족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전쟁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혁명적 열기에 편승한 볼셰비키에게 권력장악이라는 호기가 되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러시아 국가성(stateness)의 수호자라는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동시에 '혁명 정권'의 생존과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에 심대한 위협과 제한을 가한 외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 점에서 또 다른 전쟁인 '내전(1918-21년)' 기간에 실험된 '전시 공산주의'는 1920년대 말-30년대 초 강제적 농업집산화와 급속한 공업화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 '스탈린주의'라는 리바이어던의 원초적 체험이요, 다수의 볼셰비키 활동가와 스탈린에게 충성을 바쳤던 청년 세대에게 극히 매력적인 '의지적 사회주의건설' 방식이었다. 그것은 나아가 '제2의 내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농업집산화에 대한 농민들의 강렬한 저항과 봉기의 진압을 통한 사회적 안정성의 획득과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의 내부 식민지화 및 농민층의 2등시민화를 정당화해 준 '사회주의 건설' 방식이었다. 최종적으로 '전시 사회주의'로서 소련체제는 2차대전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독일파시스트집단의 침략을 영웅적으로 물리침으로써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정치적 정당성을, 내부적으로는 소련인민들의 국민주의적 결속을 결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20세기 사회주의'라고 불릴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러시아혁명은 그동안 전통적 관점이었던 '부르주아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발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든가, 또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서구의 반공주의 관점을 받아들여 "러시아의 정상적인 근대화 과정을 중단시킨 불행한 사건"으로 보는 것은 둘 다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차라리 그것은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변방의 소수민족 등 피압박민중·민족의 자발적인 "아래로부터 혁명"이 토지혁명과 사회관계의 변혁을 통해 상당 부분 성취되고, 이후에 볼셰비키정권, 특히 스탈린 지도부에 의해 "위로부터 혁명"을 통해 봉인되면서-특히 당대 러시아의 압도적 다수를 구성했던 농민의 사회적 요구와 노동자들의 기업체 자주관리라는 관점에서-, 국가 정책적으로 수용된-혁명 이전부터 추진되었던 서구식 공업화와 강력한 국가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양자의 단절적 연속성이라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의 스펙트럼 을 고려하는 복합적 관점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다음으로 러시아혁명은 유럽 국가들이 주도한 제국주의 시대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비서구권의 식민지·종속국에 민족해방의 열망을 분출시킨 깃발을 들어 올렸다는 점에서 세계질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폭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사회변혁과 민족자결을 향한 열망은 1919년까지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 터키, 중국, 인도, 한국, 쿠바, 멕시코 등등에서 첫 번째 혁명의 물결을 일으켰고, 2차 대전 이후 두 번째로 식민지해방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해가는 역사적 행진을 일으켰다. 혁명 직후 소련은 자신의 체제가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1919년, 즉 내전 시기)에서도 세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국제공산주의조직인 '코민테른'을 결성하고, 바쿠에서 '동방 피압박민족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유럽과 미국, 일본 같은 제국주의 세력에게 적대감과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20세기를 '러시아혁명과 소련의 세기'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2차 대전에서 다른 어떤 국가보다 바로 소련이 독일 파시즘의 침략을 주도적으로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벼랑에 몰렸던 서구문명이 구원되고, 1945년 이후 소련이 초강대국이 하나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체제의 극복을 목표로 했던 볼셰비키 공산주의 체제가 스스로는 2500만 명에 이르는 인민의 죽음과 국가산업의 황폐화 등 가공할 희생을 당하고 결과적으로 '연합국' 파트너였던 서구유럽의 자유주의 세계를 파시스트의 군홧발 아래서 해방시켰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설의 세계사 그 자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1930년대 독일의 파시즘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 일본과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에 대한 국제연맹의 무력한 대처, 민주주의 세력이 프랑코에게 압살당한 스페인 내전에 대한 서구의 방관, 그리고 계속된 소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살피다가 뒤늦게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이 국제관계에서 저지른 일련의 실수, 무능, 기회주의의 대가를 오히려 소련 공산주의체제가 훨씬 더 크게 치른 결과로서 정치경제적 파국에서 벗어나고 전후 30년에 걸친 평화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이후의 세계에서도 소련은 국제질서에서 세계자유주의-자본주의체제의 확고한 맹주로 부상한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서구식 복지국가라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체제에 수립에 외부 압력으로 작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보다 자본의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경제적으로는 노동대중의 구매력을 약화하고 사회적으로는 심각한 빈부격차를 통해 사회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는 체제인 자본주의 국가들에게는 소련 모델이 자국 대중들의 매력을 끌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위로부터 '수동혁명'을 촉진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던 것이다.
(이 글은 필자가 지난 10월 27일 한국정치학회 주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과 부분적으로 중복됨을 알려드립니다. 20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에 러시아혁명의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이 기획연재는 3회에 걸쳐 게재됩니다. 편집자)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