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민심이 우리 사회에 남긴 과제는 무엇일까.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 대표는 24일 "촛불 집회나 대선에서 복지국가라는 용어가 주요 슬로건으로 등장하지 못했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적폐 청산'이라는 단어가 '복지국가'를 대체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 보수 정권 9년 동안 위법적 적폐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적폐도 많다. 위법적 적폐를 만든 책임자들은 구속하고 처벌하면 되지만, 촛불 민심의 근본은 '먹고사니즘', 즉 경제 사회적 적폐를 해결하는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복지국가다.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사무실에서 이상이 대표를 만났다. 문재인 정부는 제대로 가고 있을까. 이상이 대표는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호위하는 게 제2의 촛불 과제"라고 주장했다. "목표치나 속도가 기대에 못 미치는 점은 사실이지만, '포용적 복지'라는 방향이 옳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증세에 너무 소극적인 것은 아닐까. 이상이 대표는 "재원 마련 방안이 불충분하지만, 정부가 야권의 공통 대선 공약만큼 '핀셋 증세'한다고 밝혀도 그조차 반발하는 야권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정부의 증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깨어 있는 시민들이 기꺼이 더 부담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도록 하는 것이 복지국가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상이 대표는 새 정부를 "포용적 복지국가라는 국정 방향을 담은 최초의 정부"라고 규정했다. 여기에는 새 정부의 인수위원회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복지국가주의자들이 대거 위원으로 들어간 점도 크게 작용했다. 국정기획자문위원이던 김연명 중앙대학교 교수, 이태수 꽃동네대학교 교수, 정세은 충남대학교 교수, 조원희 국민대학교 교수 등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한편, 올해는 '역동적 복지국가'라는 모토를 제시한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출범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오는 11월 2일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창립 10주년 기념 행사를 한다. 이상이 대표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지식인, 활동가의 조직에서 일반 시민의 조직으로 돌려드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문재인표 복지 정책, 속도는 아쉽지만 방향은 옳다"
프레시안 : 문재인 정부가 출범 6개월 차를 맞이하고 있다. 아동 수당, 기초연금 인상, 문재인 케어 등 많은 정책을 냈다. 복지 정책에 대한 총평을 부탁드린다.
이상이 : 문재인 정부의 보편적 복지와 복지국가를 이루려는 노력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방향이 옳기 때문이다. 시민 사회의 주장에 비하면 목표치나 속도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방향이다. 방향이 옳으면 속도는 조건이 성숙하면 빨리 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직후인 지난 5월 봉하마을에 가서 연설했는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 국민이 앞서가면 개혁에 더 속도를 내고, 국민이 늦추면 소통하면서 설득하겠다"고 했다. 국민이 버거워하면 속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겠지만, 복지국가를 위해 속도를 내고 싶다는 메시지를 낸 것이다. (☞관련 기사 : 文대통령 "노무현, 당신을 온전히 국민께 돌려드립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야 한다고 비유하면, 문재인 정부는 경부선은 제대로 탔다. 다만, 천안이나 대전까지만 가겠다고 발표했다. 진보 학계나 시민단체는 '대구까지는 가야 하지 않나'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 보수 정권 9년 동안 위법적 적폐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적폐도 많다. 부산으로 가야 할 열차가 지금 포천에 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때 시민단체와 학계는 이 한계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깨어 있는 시민들의 지지를 모아서 최대한 가보라고 새 정부를 격려하고 도와줘야 한다. 즉, '국민은 세금을 더 내겠다, 개혁의 어려움이 내게 오더라도 견뎌내겠다'는 깨어 있는 시민의 결의가 서면 왜 대구까지 못가겠나. 방향은 같기에 지금은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으로 복지국가의 길을 가도록 지지해야 한다.
반면 문재인 정부가 경부선을 타다가 갑자기 영동선으로 가버릴 수도 있다. 정부가 만약 소득 주도 성장, 보편적 복지, 경제 민주화 같은 개념들을 버리고 나중에 영동선을 타면 그때 비판해도 늦지 않다. 시민단체들도 지금은 그래서 문재인 정부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방향이 옳으니까.
만약 지금은 소득 주도 성장, 최저임금 인상 등 여러 개혁을 동시다발적으로 하는데, 만약 적폐를 청산하다가 포용적 복지국가로 못 가면 어떤 보수의 역풍이 불지 알 수 없다. 유럽 정계에서 극우파들이 대거 득세하는 이유는 기성 정치가 국민의 열망과 기대를 못 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렵다. 포용적 복지국가라는 국정 방향을 담은 최초의 정부가 촛불 민심을 잃는다? 상상할 수 없다. 우리의 운동 토대가 무너진다.
문재인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차이점은?
프레시안 : 우리나라 정치 지형은 이미 충분히 보수에 치우쳐 있다. 일례로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모두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 폭이 너무 크다고 정부를 질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단체는 정부가 더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채찍질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지 않나?
이상이 :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킨 시민단체 세력과 그에 동의하는 진보적 유권자들은 노무현 정부 집권 중후반기에 등을 돌렸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전국농민회총연맹이 데모를 제일 많이 했을 때가 노무현 정부 때다. 돌이켜보니 그때는 너무 심했다는 생각도 든다. 민주 진보 정권인데 민주 진보 쪽에서 너무 때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노무현 정부는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했다. 시민사회나 진보적 유권자들이 화가 난 것이다. 항의해도 안 되니까 지지를 철회해버렸다.
문재인 정부는 다르다. 복지국가 깜빡이를 켜놓고 복지국가로 가고 있다. 잘 가고 있다. 진보적 촛불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비교적 잘하니까 지지하고 있다. 민주노총이나 시민단체가 그때와 달리 지금은 조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진보 정권을 격려하고 지지할 때와 적대시하고 때릴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이 정권이 뭘하든 찬양하라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시민단체가 '문재인 케어'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목표치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80%으로 해야 하는데, 70%밖에 설정하지 않아 기대에 못 미친다는 비판은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 케어를 반대하면 안 된다.
프레시안 : 정권 초반이라 아직은 적폐 청산에 집중하는 느낌이고, 복지 성과를 꼽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기억에 남는 구체적인 정책이 있나?
이상이 : 구체적으로 정책 하나 하나를 거론하기에는 아직 집행이 안 됐다. 정책 한두 개 가지고 쇼맨십하는 것은 그만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 때는 '어린이 아토피 없는 나라'를 만든다면서 파편적인 개별 정책을 가지고 정치화시키고 정치적 지지로 전환시키려 했다.
문재인 정부는 정공법을 쓰고 있다. '이게 나라냐'는 질문은 법률적 적폐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률적 적폐는 구속하고 처벌하면 된다. 촛불 민심 이면에는 일자리, 보육, 의료와 같은 경제 사회적 적폐에 대한 문제 제기가 저변에 깔렸다. 문재인 케어를 발표할 때 대통령 연설문 전문을 읽어 보면 '아파도 병원 못 가는 사람 없는 게 나라다운 나라'라는 개념이 나온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게 바로 포용적 복지국가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제시한 개념으로 보면 역동적 복지국가이고.
복지국가는 정책 한두 개 달성하고 생색내는 게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 하나가 대단한 건 아니다. 소득 주도 성장, 보편적 복지, 경제 민주화와 같은 큰 원칙 하에서 개별 정책이 배치되는 것이다. 단, 위법적인 적폐 청산 과정에서 '정치 보복'이라는 야권 프레임이 있기에 개혁에 약간 속도감이 뒤쳐지는 느낌은 있다.
"'나도 세금 더 내겠다'고 말하는 시민 늘리는 게 복지국가 운동"
프레시안 :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전면적인 증세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는데, 재원 마련 방안이 불충분한 것 아닌가.
이상이 : 재원 마련 방안이 불충분한 게 맞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한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정부가 마련한 '핀셋 증세'조차도 야권에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극렬하게 저항하지 않나. 핀셋 증세에 대한 국민 지지가 85% 달한다. 야권 후보들이 이미 대선 공약으로 낸 안인데, 자신들의 대선 공약만큼 한다는데도 야당이 반발하는 상황이다.
만약 보편 증세로 가는 과정의 하나로서 증세 대상이 확대된다면 지지율이 많이 떨어지리라 본다. 집권 초반기부터 정치적 부담을 감수할 것인지가 고민인데, 이 고민을 덜어주는 게 시민단체의 역할이고 복지국가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복지국가를 위해 시민이 기꺼이 부담하겠으니, 용기 있게 나가달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확산해야 한다.
프레시안 : 반대로 지지율이 높은 지금 증세하지 않으면, 지지율이 떨어지는 중후반에는 더 증세를 못한다는 반론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상이 : 정권 초반부터 보편 증세하라는 것은 청와대더러 죽으라는 얘기지 않나. 정치적인 승산이 적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시민사회가 좀 달라져야 한다. 깨어 있는 시민, 국회의원, 시민단체, 언론도 세금 더 내자고 계속 얘기해줘야 한다. 그게 증세 운동이다. 복지국가 증세에 대한 국민 인식이 전향적으로 좋아지면 청와대는 전격적으로 단행할 것이다.
프레시안 : 보수 언론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소득 주도 성장' 개념 대신 최근 '혁신 성장'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 점을 반기고 있다. 4차 산업 혁명과 관련한 신산업 분야에서는 네거티브 규제 완화 정책을 펴겠다는 대선 공약도 있다.
이상이 : 혁신 성장을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에 공급 주도 성장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과거에는 혁신 성장 동력이 재벌 대기업에서만 나온다고 보고, 규제 완화와 감세하는 방식으로 대기업을 지원했다. 이러한 전략은 실패했다는 게 증명됐다. 진정한 혁신은 노동에서 나와야 한다.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을 확충해야 한다. 보편 복지, 적극적 복지, 경제 민주화와 같은 개념이 제도적으로 갖춰졌을 때, 사회적 자본이 갖춰져 혁신의 동력이 된다. 정부가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만들어서 인공 지능, 자율 자동차와 같은 특정 분야에서 규제를 완화해서 혁신 동력이 나오도록 조금 만들어주는 것은 협소한 아이템이다. 기존 신자유주의와 소득 주도 성장의 결과물로 나오는 혁신 성장의 개념은 다르다.
프레시안 :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지난 10년 활동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달라.
이상이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10년 활동을 한마디로 평가하면, 대한민국의 보편적 복지라는 용어와 복지국가라는 용어를 정치사회적으로 공론화하고 대중화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존재 이유는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국민의 행복할 권리가 보장되는 나라다. 행복추구권이 아니라 행복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흙유전자,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은 대부분 불행해진다. 내가 선택한 게 아닌데, 운이 나쁘다는 이유로 불행하게 살아야 하나. 이건 아니라고 본다.
앞으로도 복지국가 달성이라는 꿈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겠다. 특히 우리는 지난 10년간 참 고생을 많이 했다. 참여연대나 경실련은 민주 정부 10년 동안 좋은 정권에서 활동했지만, 우리는 보수 정부 엄동설한에서 활동했다. 5년은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부였고, 4년은 복지국가 노선을 기만한 국민 기만의 정부였다. 앞으로 문재인 정부에선 더 많은 '깨어 있는 시민'의 참여 속에서 더 좋은 조건에서 활동하면 좋겠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지식인, 활동가의 조직에서 일반 시민의 조직으로 돌려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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