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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빙고 자본주의'서 신자유주의로 점프한 한국, 앞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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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빙고 자본주의'서 신자유주의로 점프한 한국, 앞날은?

[강연] 김상조 교수의 한국경제론

다가오는 15일이면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보호 신청을 한 지 정확히 1년이 된다.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본격화된 미국발 금융위기 직후 한국경제도 크게 요동쳤다. 원-달러 환율이 1600원 턱밑까지 치솟으면서 '이러다가 제2의 외환위기가 오는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됐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09년 9월 한국경제는 어떤가. 주식과 부동산시장 등 금융시장은 위기 이전 상황으로 빠르게 되돌아가는 듯한 모양새다. 소비도 일부 회복되는 낌새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수출, 고용, 투자 등 실물경제의 선순환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분야는 여전히 냉각돼 있다. 이런 한국경제의 현실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위'를 쳐다보고 위기가 곧 끝날 것이라고 해야하나, '아래'를 쳐다보고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해야 하나. 또 대외의존도가 큰 한국경제는 미국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 흐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라는 현 글로벌 경제위기의 끝은 어디인가.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현재 한국경제 앞에 놓여진 질문들이다.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를 경험하며 보수와 진보진영 모두 잇따른 강연과 토론회를 개최하며 각자의 시각으로 금융위기를 분석하고 이를 벗어날 방법을 제시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전경련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젊은 세대가 자유 시장경제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갖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 역시 진보진영에서 많은 강연을 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후 김 소장은 아쉬움을 느꼈다고 한다. 일회적인 토론회나 강연을 통해 한국경제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각자의 입장만 되풀이할 뿐이고, 듣는 청중들은 혼란과 동시에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맛보기' 토론회가 아닌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결과가 3일부터 경제개혁연구소가 주최하는 '2009 시민사회 경제교육'이다. 총 12회로 진행되는 이번 강연은 한국경제의 과거와 현재를 부문별로 분석하고, 서구의 경제사상이 한국 경제에 끼친 영향을 김상조 소장의 시각으로 풀어낸다.

1부는 한국 경제의 거시적인 순환 구조를 분석하는 시간을 갖는다. 국제비교가 가능한 통계로 작성된 국제수지, 환율 등 거시지표부터 산업연관표, 기업경영분석데이터 등 미시지표까지 살펴보며 한국 경제만의 독특한 특성을 분석한다. 2부는 한국 경제에서 항상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왔던 재벌의 기업지배구조, 중소기업 하도급 문제, 금융, 노동 분야를 집중 조망한다.

3일 진행된 첫 강의에서는 서구의 경제사상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화됐는지 훑으면서 현재 한국 경제의 모습을 진단한다. 김 교수는 한국 경제가 '중상주의에서 한번에 신자유주의로 뛰어오른' 결과 공동체·법치주의·복지 등의 가치를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고 정의한다.

그 결과 서로 상대방을 설득할 힘은 갖추지 못하면서 반대로 비토권은 그대로 유지돼 조정과 타협이 불가능한 사회가 된 것이다. 이를 해결할 리더십의 등장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채 우리 사회는 구(舊) 자유주의의 결핍과 신자유주의의 과잉이 남긴 모순된 과제들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다음은 3일 강연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서대 교수)이 3일 서울 종로 한국건강연대에서 열린 2009 시민사회 경제교육에서 '신자유주의와 한국경제 - 도발적 문제제기'란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프레시안

"다이내믹 코리아, 밑으로부터의 개혁 여지 남겨"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300~500년에 이르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빨리 압축·비약의 성장을 달성했습니다. 최근 들어서 우리 사회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불안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다이내믹 코리아'라 불릴 정도로 역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만이 가진 특유의 장점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해 볼까요? 2000년에 장하준 교수의 추천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2년간 안식년을 가졌습니다. 당시 영국은 마거릿 대처 전 총리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철도 민영화가 이루어진 상태였습니다.

영국은 철도 운송 비율이 굉장히 높은 나라인데 민영화 이후 레일의 유지·보수가 되지 않아 많은 사고가 났습니다. 몇 달 사이에 큰 규모의 사고가 집중 발생해 수십 명이 숨지면서 정부가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전국에 약 5000군데 레일에서 금이 가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영국에 갔을 때는 정부가 전국의 레일을 수리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머물던 곳에서 런던까지는 100마일(160㎞) 떨어져 있었는데 승강장에서 2시간을 기다려야 기차가 왔습니다. 한 시간 걸릴 런던을 몇 시간씩 기다려 콩나물시루 같은 열차를 타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하철이 2시간 연착했다면 어땠을까요? 10분만 늦어도 역장 나오라고 하면서 유리창을 깼을지도 모릅니다.(웃음)

하지만 영국에서는 아무도 항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대신 나서서 떠들어 주고 싶을 정도로 반응이 없더군요. 영국인들은 신사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살펴보니 모두 '워킹 클래스'였습니다.

제 느낌에는 사람들이 항의를 하는 의욕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다이내믹'이라고 한 건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사회적으로, 집단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욕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영국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처 시절에 반대세력을 공권력으로 강제 진압하면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일본도 비슷하게 '제도피로현상'이라고 해서 고착화된 제도 속에서 밑으로부터의 변화가 없는 특징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엘리트가 사회를 끌고 가는 개혁이 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네가 대통령이면 다냐'하는 식으로 대통령 욕하는 것이 국민스포츠가 될 만큼 너무나 다릅니다. 그렇게 다른 사회구조를 가진 이 나라에서 끓어 넘치는 대중의 에너지를 어떻게 모아나갈 것인지 리더의 역할을 고민해야 합니다.

영국의 예를 한 가지 더 들어볼까요. 한 지인이 작은 사고를 당해 머리에 혹이 났습니다. 엑스레이라도 찍어보자고 해서 케임브리지 대학 병원에 갔습니다. 노벨의학상 수상자도 여럿 배출한 유서 깊은 병원인데 엑스레이 찍고 이상 없다는 얘길 듣기까지 5시간이 걸렸습니다. 의사도 간호사도 별로 없습니다. 그나마 일하고 있는 의사들도 영국인은 별로 없습니다. 영국의 의료보험시스템에서는 의사와 간호사의 수입이 런던에서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적어 대부분 외국으로 나갑니다. 미국 못지않게 영국의 의료 시스템도 문제가 많습니다.

5시간을 기다리면서 난 속이 타는데 정작 다친 친구는 아프다는 소리도 없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제가 다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왜 이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병원에 가면 5시간 걸리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다쳐도 전신 스캔이니 하면서 온갖 검사를 다하기 때문이죠. 5시간 걸리는 건 같지만 전혀 다른 양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어떤 개혁정책이 진행된다면 그 양상도 달라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전 우리나라에서 대처나 고이즈미 총리와 같은 개혁 방향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서빙고 자본주의'에서 외환위기까지

한국 경제가 최근에 왜 정체하고 있을까요? '다이내믹하지만 5시간 걸리는' 정체 말입니다. 전 '성공이 실패의 원인'이 됐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 경제는 과거에는 언제나 '정부주도', '대외종속' 같은 단어로 설명이 가능했습니다. 재벌 총재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서빙고로 끌려가 몇 대 얻어맞고 나오면서 깨끗이 해결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런 데서 나온 게 압축·비약의 성장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성공이 성공의 전제조건을 무너뜨렸습니다. 정부는 개별 산업자본에는 불이익이 가더라도 국가 규모의 총 자본에는 이익이 되도록 각 경제 주체의 역할을 제약했지만 지금은 조정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재벌은 후진적인 지배구조를 유지하면서 독점자본으로 성장했지만 천민자본주의의 속성이 잔존하고 있습니다. 금융 분야는 필요한데 돈을 집어넣는 관치금융으로 성장을 떠받치다 나중에 자유화되었지만 경제 위기의 원인으로 전락했습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1987년 대투쟁을 통해 현실세력으로 부상했지만 대안세력으로는 미약한 모습입니다.

1960년대 이후 30년의 성장 구조가 지금은 바뀌었습니다. 성장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제 주체 사이도 수직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이건희 회장도, 이명박 대통령도, 조선일보 사주도 이젠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헤게모니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게 막는 비토권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다이내믹하지만 정체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회를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충분히 견제할 수 있는 힘만 가진 세력들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지도자가 그 힘을 모아가는 조정 메커니즘을 리더십으로 발휘하지 못하면 남은 건 실패뿐입니다. 정부와 재벌 등 지배세력들은 고속 성장을 통한 자본축적이 한계에 봉착하자 이를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시도했습니다. 이것에 1980년대에 규제 완화라는 대내적 자유화로 나타났고 1990년대에는 개방이라는 대외적 자유화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자유화의 시작이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못지않았던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것도 아이러니 입니다.

하지만 대내적 자유화는 3저 호황이 3저 불황으로 바뀌면서 난관에 부딪혔고, 이어서 김영삼 정권에서 추진한 세계화 역시 실패했습니다. 과거 자본축적 체계의 장애를 극복하려는 지배세력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고 외환위기를 맞았습니다. 전략이 실패했다면 다른 방향으로 모색했어야 하는데 외환위기는 우리의 의사결정권을 박탈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강요한 전략은 이미 실패한 그 전략을 더 강하게 추진하라는 것이었고 그 결과가 글로벌 경제위기 속 한국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대두된 시점 및 전성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 등장을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프로그램 탓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지만 사실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강요 이전에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필요로 했던 것도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식 개발정책에 한계 봉착한 지배세력들이 의도한 전략이 어쩌면 필연적으로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외환위기나 세계적 경제위기는 정치적 위기이기도 합니다.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시장에 맡길 것인가, 정부가 나설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를 해결하는 데 재벌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관철한다 해도, 반대로 민주노총이나 시민단체 의견을 수용하는 진보 사회가 들어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타인의 의견에 대한 비토권만 넘치는 사회에서 진보·보수 어느 정권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것 역시 진정성 문제의 차원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가 실패한다면 그것 역시 정책 기조만의 잘못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힘·도덕·논리로 다른 세력을 압박하고 설득할 수 있는 헤게모니가 없다면 정치적·경제적 조정으로 풀어야 하는데 이건 짧은 기간 안에 할 수도 없습니다. 한 정권의 임기 내에 푼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전에 칼럼에 '진보만이 한국의 진보를 이룬 것은 아니다. 진보·보수가 같이 이뤄야 할 시대적 과제도 필요하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잘못될 거라고 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실패한다면 "그것 봐라"라고 하겠지만 꼭 그런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정부의 모든 게 다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부의 성과마저 그들 세력의 치적으로만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의 과잉 현상과 동시에 구 자유주의의 결핍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기 강의 들으시는 분 중 시민단체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많은 데 평소 주장하는 말이 결국 정의하자면 '법대로 해라'입니다. 법치주의입니다. 그런데 법치주의 완성은 서구 역사에서 보면 지극히 부르주아적 과제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19세기 전근대적 요소와 20세기의 근대적 성과, 21세기 탈근대적 가능성이 공존하는 사회입니다. 법치주의가 아직 돼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가 실로 많습니다.

법치·투명성·공평성은 구 자유주의적인 것이고 보수의 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이른바 '수구꼴통'들은 이게 자신들의 과제인지 모릅니다. 제가 공개된 장소에서 하는 얘기들은 결국 '나이스한 자본주의' 하자는 것 아닙니까? 제 머릿속에서 갖고 있는 생각이 무엇이든 결국 말로 나오는 것은 이것입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문제인데 외면하면서 그걸 주장하는 저를 좌파라고 부릅니다. 서구에선 우파들이 이 문제를 담당했습니다.

진보 진영 일부에서는 그런 문제들이 '내가 그런 것을 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만드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진보와 보수 모두 자기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이에 생기는 공백을 소수 기득권 세력이 채워 넣으면서 한국 사회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위에서 하지 않으면 대중이 밑에서부터 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진보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구의 자본주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 "신자유주의 원인은 외환위기 뿐만이 아닙니다. 기존의 성장주의가 한계에 부딪힌 지배 세력이 돌파 수단으로 도입한 측면이 있습니다." ⓒ프레시안

"한국은 17세기 중상주의자가 경제 수장"

먼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경제사를 전공으로 하는 학자가 아닌 제가 이해하는 자본주의 역사라는 점을 밝힙니다. 시작하는 부분은 절대왕정을 떠받친 중상주의부터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윤증현이라는 희대의 코미디를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보수언론에서 윤 장관을 합리적 시장주의자라고 하고 진보 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자라고 하는데 전 전형적인 중상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 한국 경제는 17세기 중상주의자를 경제 수장으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민주노동당 산하의 새세상연구소에서 민족주의에 관한 토론회를 개회했더군요. 서구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민족주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내셔널리즘은 국가주의에 가깝습니다.

중세시대 유럽은 국가라는 개념이 희박했습니다. 통일된 국가·국민의 개념 없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적 사고는 지금도 서구에 남아있습니다. 유럽만이 아닙니다. 아르헨티나의 부유층 백인들은 자신을 유럽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라질의 메스티소나 아마존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브라질이나 볼리비아 국민이라고 생각할까요?

한국에서 민족주의로 번역되는 내셔널리즘은 어떤 의미일까요? 인기 드라마인 선덕여왕을 예로 들면 고구려·백제·신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민족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삼국유사를 보면 사신을 보낼 때 통역을 대동했다고 합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던 국가들이었는데 우린 왜 민족주의의 정서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유럽에서 대표적인 교통수단은 라인강 수로입니다. 경제사 교과서를 보면 라인 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통과할 때 관세를 40번 가까이 걷었다고 합니다. 그 주위 각 지방이 모두 쪼개져 분권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국가 경제라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던 게 한 명의 절대 왕에 의해 국경선 안에서의 경제 활동으로 바뀐 것이 중상주의가 갖는 함의입니다.

절대주의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아서 왕의 신화에서 원탁의 기사는 주종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대등한 관계를 의미했습니다. 봉건 시대에 왕은 영주의 대표자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짐이 곧 국가'인 시대로 넘어가는 힘은 결국 군사력입니다. 왕권신수설 같은 수사보다 말을 듣지 않으면 힘으로 누른다는 것입니다.

절대 군주가 영주들을 평정할 수 있는 군사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군대가 개병제로 모집된 것은 19세기 이후입니다. 로마의 카이사르부터 절대군주까지 군대는 모두 모병제였습니다. 노예나 농노는 권리가 없어 군역의 의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왕이 월급을 주는 체제의 군대는 재정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화폐는 은화입니다. 절대 군주의 창고를 은화로 채워야 중앙집권이 가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은화를 빼앗는 방법, 그리고 경제 활동을 통해서 나가는 은보다 들어오는 은이 많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상주의입니다.

중상주의는 들어오는 은이 더 많아야 하므로 수입 관세를 물리고 수출 상품은 보조금을 지불합니다. 이게 우리가 말하는 보호무역입니다. 유치산업 보호 때문에 보호무역론이 나온 게 아닙니다. 또한 들어온 은화는 궁극적으로 왕의 금고에 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왕에게 돈을 내는 제한된 이들에게만 독과점적인 상업 활동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제가 윤증현 장관을 중상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부국 강화를 위해 소수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기 때문입니다. 경제주체의 자유도와 후생을 높이는 정책이냐, 소수 기득권의 경제적 이득을 유지·강화하느냐가 중상주의를 가르는 핵심입니다. 시장 자유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윤 장관은 아직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장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제발 그를 시장주의자라고 부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자유주의는 중상주의에 대항한 혁명…도덕성에 기대 체제 유지"

중상주의는 언제나 유지 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 중에 경제적인 힘을 쌓은 계급, 부르주아의 등장 때문입니다. 그들이 힘을 얻었을 때 '왜 내가 이익을 왕에게 줘야 하나'라는 의문이 생기면서 자유주의·계몽주의 사상이 나왔고 시민혁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내외적이든 대내적이든 자유를 제약하는 것에 대항하는 헤게모니가 자유주의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은 주식회사이지만 모든 이가 자유롭게 주식회사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입니다. 회사가 다른 회사의 주식을 갖는 것이 허용된 것은 1890년대입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자본주의는 100년~150년의 역사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 자유주의는 기득권에 대항한다는 측면에서 혁명적인 이름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엔 보수주의로 불리고 있지만요.

애초에 혁명적이었던 자유주의가 지금 와서 왜 보수적 이념이 되었을까요? 요즘 경제위기를 맞아 재조명 받고 있는 케인스가 쓴 자유방임의 종말(The end of Laissez-Faire)'이라는 논문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자유경쟁이 경제적 번영을 가져올 것이다'라는 식으로) 자유방임 사상을 단순하게 설명한 적이 없다. 자유방임 사상은 세속적 정치가들과 조야한 경제학자들의 혹세무민의 결과물일 뿐이다"

자유방임, 시장자유라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느 경제학자의 글을 읽어봐도 그렇게 쉽게 시장경제가 작동한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시장은 오토매틱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죠.

자유주의 경제사상을 대표하는 학자는 아담 스미스입니다. 1776년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해인데요, 하나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입니다. 고대 로마 공화정이 무너진 이후 2000년 가까이 군주제를 유지하던 세계에서 최초로 근대 공화정을 만든 것입니다. 근대 정치의 시작이라 부르는 프랑스 혁명보다도 먼저 일어났죠. 다른 하나는 아담 스미스가 산업 혁명 결과 출연한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설명하는 <국부론>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중상주의에서 힘의 원천은 은입니다. 그래서 중상주의 이론은 은을 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는 화폐가 국부가 아니라 화폐로 살 수 있는 상품 자체가 국부라고 주장합니다.

아담 스미스가 또 하나 강조한 것은 사회적 분업입니다. 핀 공장의 사례처럼 분업을 통해 생산력이 올라가 상품을 많이 만들면 국가의 부가 확대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럼 상품을 팔 시장은 어떻게 찾죠? 1000페이지가 넘는 <국부론>의 대부분이 여기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결론은 중상주의의 폐지입니다. 자유무역에 의해 시장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흔히 자유무역을 이야기할 때 기득권의 논리로 생각하지만 아담 스미스가 주장했을 당시는 중상주의의 기득권 세력이 갖고 있던 견고한 성을 깨려고 한 것입니다.

남은 과제는 경제적 제약을 다 풀었을 때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조정할 거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국부론엔 그 메커니즘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만 말하고 더 이상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손이 국부론 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전에 저술한 <도덕감정론>에 있다고 봤습니다.

도덕감정론의 중심 단어는 'sympathy'입니다. 우리말로는 동정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가 사용한 의미를 정확히 번역하면 조금 다릅니다. 동정이 측은지심에 가깝다면 sympathy는 역지사지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는 마음이 근대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적 기초라고 강조했습니다. 자유주의를 이해하려면 국부론과 도덕감정론 두 가지를 정확히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조야한 자유주의자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sympathy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으면 사이비 자유주의자가 됩니다. 그런 사이비는 우리나라에 차고 넘칩니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보여줘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책임이 따릅니다. 만인의 자유가 만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자기파괴가능성이 있는데 이를 제어하는 조정 메커니즘이 체제 내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때 이데올로기가 완성됩니다. 계몽주의자부터 경제학자까지 평생을 바쳐, 대를 이으면서 공부하는 이유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나온 세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유선거입니다. 경제적 독점의 지위가 오남용 될 수 있으니 이를 견제하는 힘이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정말 자유롭게 선거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거는 치밀한 정치공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자유경쟁입니다. 우리나라에 자유경쟁이 어디 있나요? 어디나 독점화돼 잘 작용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한 게 도덕주의입니다. 모든 자유주의자는 궁극적으로 도덕에 기초합니다. 그것에 sympathy, 또는 막스 베버가 분석했던 청교도 정신입니다. 그런 요소가 작동하지 않은 자유주의는 위험합니다.

베버의 청교도 정신은 소명의식을 말합니다. 청교도에게 직업이란 사치를 위한 돈벌이가 아니라 신이 내게 맡긴 일입니다.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행해 돈을 많이 벌고 그 결과를 신에게 돌려주는 것이 소명을 받드는 길입니다. 베버는 이런 과정을 통해 미국이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도덕 문제로 자유를 회귀시키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공통된 습성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론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이미 19세기부터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보면 그 당시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점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10년 주기로 공황이 왔고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잊지 못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시 의회 청문회에서 한 광산 업자가 조사를 받는데 조사관이 "당신의 탄광에서 일하는 소녀들이 보통 하루 몇 시간 일하는가"라고 물으니 "보통 새벽 3시에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일한다"고 당연하게 답했습니다. 휴식시간은 얼마나 주느냐는 질문에 "아침 15분, 점심 30분, 저녁 30분으로 '충분히'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19세기 자본주의의 현실입니다. 근엄한 도덕에 의해 스스로를 조정해 나간다는 논리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산실인 영국에서 국민에게 충격을 준 것은 보아 전쟁입니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한 네덜란드인들을 보아족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이주한 지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었습니다.

영국은 군대 50만 명을 파견해 이곳을 점령했습니다. 총 70만 명의 보아족 중 싸울 수 있는 인원은 8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전쟁 뒤에 10만 명의 보아족이 수용소에 들어갔는데 1년 만에 3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 과정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서양 역사에서 보아 전쟁은 '더러운 전쟁'의 대명사로 꼽히게 됩니다. 우리가 문명국인가 하는 자성이 나온 것이죠.

"케인스식 복지국가는 노동계급과 자본가의 계급적 타협의 결과"

▲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 ⓒ프레시안
자유주의는 현실에 의해 붕괴되고 조정 메커니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시도들이 대안으로 조금씩 나오게 됩니다. 20세기 전반은 청말 참혹한 역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공황이 뉴욕의 주식폭락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대공황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죠.

1920년대에 경기 호황을 누린 나라는 미국뿐이었습니다. 요즘의 서브프라임 사태처럼 당시에도 주식과 부동산에 버블이 잔뜩 끼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유럽은 1920년대 이내 경기침체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뉴욕 증시의 폭락으로 가시화된 것입니다. 그 후에도 연방준비은행(FRB) 등의 대응이 공황을 장기화시켰죠.

대공황의 원인을 한마디로 글로벌 임밸런스(Global Imbalance)라고 하는데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실업(Unemployment)'이란 단어가 등재된 해가 1980년입니다. 20세 초 출간되어 14판까지 찍은 마셜의 <경제학 원론>이 700페이지 분량인데 한 학자가 직접 세어 본 결과 실업은 딱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실업이란 말 자체가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당시 실업은 개별적 실업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농촌지역에서 계절적 영향으로 할 일이 없어진 사람들이 도시나 다른 국가로 이주해 일하다가 다시 봄이 되면 돌아가서 농사를 짓는 등의 일시적 실업이었죠.

그러던 게 20세기에 접어들어 증기선, 철도, 정기 등 수많은 산업 기술이 생기면서 새로운 공장 형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젠 계절에 따라 도시에 거주하는 게 아니라 상시로 머무는 고급 노동자가 생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실업은 더 이상 개별적·지역적인 게 아니게 됩니다. 당시 산업구조는 그런 실업에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불균형에 1차 대전이 끝나면서 국제적인 공조를 이루지 못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정치적 불균형까지 모두 합쳐 글로벌 임밸런스라고 합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30년 후 터져 나온 것이 2차 세계 대전입니다. 국가의 자유주의와 경제 질서 모두 붕괴되고, 조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대안들이 나오게 됩니다. 사회주의, 파시즘, 케인스와 루스벨트로 대표되는 복지국가·포디즘 체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잠시 안토니오 그람시 이야길 할까요.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로 무솔리니 때문에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다 숨졌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옥중수고>라는 책에 '아메리카니스모(americanismo)'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영어로는 '미국주의(americanism)'라고 하는데, 오늘날엔 천박한 대중문화를 비꼬는 의미로 쓰이지만 원래는 포디즘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람시는 감옥 속에서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파시즘 체제였죠. 게다가 미국은 감당하기 힘든 체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현실은 참혹하고, 꿈은 멀고, 대항세력은 강고한 상황에서 만들어낸 것이 '대항 헤게모니'입니다. '기동전'이나 '진지전'이라는 말 역시 다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람시가 미국의 포드 자동차 회사를 보니 놀랍기 그지없는 겁니다. 생산 시스템의 자동화로 하루에 수백 대의 자동차를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람시를 공포에 떨게 한 건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사회 그 자체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당시 시행됐던 금주법이었습니다.

금주법은 연방법이 아니라 주법인데요, 주로 5대호 근처의 공업화 지역에서 실시되었습니다. 금주법은 시민사회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당시 미시간 주에 10만 명이 넘었던 여성단체를 주축으로 만든 법이기 때문입니다.

금주법은 표면적으로 술이 인간을 타락시키고 자력갱생을 막는 악한 존재라는 이유로 입안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람시에 따르면 금주법을 입안한 배후는 부녀자 단체를 지원한 포드였습니다. 왜냐면 일괄 생산체제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속한 단 한 명이라도 작업을 생략하는 순간 최종 완성품은 불량품으로 전락했기 때문이죠.

그 당시의 노동 규율은 지금과 비교하면 한없이 이완되어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일급체계로 생계를 꾸렸는데 하루 일당을 받으면 바로 술집에 가서 다 써버리는 겁니다. 처자식은 집에서 굶고 있는데 혼자 술 마시고 다음날 결근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현상을 막기 위해 노동 규율을 만들기 위한 자본의 요구가 금주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만든 수많은 자동차를 어디에 팔까요? 헨리 포드는 바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려면 자동차가 더 싸야 하고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올려주어야 합니다. 혁명적인 일급 5달러 체제의 등장입니다. 당시 평균 임금이 기껏해야 2~3달러인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남부의 가난한 흑인 노동자들이 디트로이트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레닌이 자본주의가 자기모순 때문에 스스로 붕괴될 거라고 믿었던 반면 그람시는 단 한 사람의 자본가의 의도에 따라 노동 규율이 만들어지고 소비시장이 만들어지는 게 자본주의의 힘이라고 보았습니다.

케인스식 자본주의·사회주의·파시즘은 모두 다 대공황을 거치며 만들어진 대안이었습니다. 어떤 게 가장 효과적으로 대공황을 극복했을까요? 사실 효율성 차원에서 보면 케인스의 복지국가모델은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대공황이 루스벨트가 아니라 2차 세계 대전으로 극복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요. 대공황을 테네시 강 유역 개발 사업 같은 걸로 극복하기엔 너무나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극복 수단으로만 봐서는 사회주의나 파시즘이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반대로 지속성 차원에서 보면 순위는 거꾸로 갑니다. 미국의 케인스식 복지국가 체제에서는 전미자동차노조(UAW)가 임금 협상에 나설 때 가장 먼저 사용자단체와 GM 산하 지부가 협상에 들어갑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가이드라인이 타 지부에서의 협상 기준이 됩니다. 이 시스템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가장 잘 굴러갔던 체제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성과 관계가 없었습니다. 포디즘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조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케인스식 복지국가가 전성기를 이뤘을 때 핵심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계급적 타협이었습니다. 노조가 임금 협상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는 대신에 사용자의 경영권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가장 빠르게, 가장 안정된 '골든 에이지'가 탄생하게 됩니다.

신자유주의 영원하지 않았듯 기존의 복지국가 모델 역시 대안 될 수 없어"

그리고 30년 후에 세상이 또 한 번 변하게 됩니다. 복지국가 체제에서 직접 임금이든 간접 임금이든 어떤 형태의 임금은 계속 지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임금 상승보다 더 빠른 생산성 향상이 필요합니다. 초기에는 포디즘·테일러리즘의 등장으로 생산성의 비약적 향상이 가능했지만 그 이후에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또 한 편으로는 수요가 차별화되면서 대량생산 시스템이 무너지게 됩니다. 유연한 생산시스템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이는 노동력의 수량적 유연화를 불러옵니다. 한 노동자가 복수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기능적 유연화는 도요타 시스템과 같이 예외적인 경우에 머물고 보통은 수량적 유연성 추구 현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이 과정이 무난하게 진행된 건 아닙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 기억이 나는데요, 애틀랜타는 노예제의 상징적인 도시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개막식 마지막 장면에 스탠드의 불이 다 꺼지고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연설 내용이 흘러나왔습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링컨 메모리얼 앞에서 한 연설이었습니다.

킹 목사는 1968년에 암살당했습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나왔듯이 당시에 재대 병사와 히피는 젊은이들의 고뇌를 상징했습니다. 킹 목사에 의해 표현된 인원·반전·환경·노동운동에 히피 문화까지 더해져 1960년대 후반에 집약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유럽의 68혁명과 더불어 현대사 형성에 매우 중요한 계기입니다.

1960년대 후반 포디즘이 경제적 삶에서 혜택을 줬지만 개인이 도전할 수 없는 사회구조가 지배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이나 인종차별이 대표적이었죠. 이에 젊은이들이 어떻게 대항하려 했는가를 살피는 건 유럽과 미국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68세대들이 나중에 토니 블레어, 빌 클린턴처럼 사민주의 정당의 정치지도자로 나서게 됩니다. 버락 오바마는 바로 그다음 세대입니다. 그 세대가 만드는 진보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경험을 가진 세대는 아마도 386세대일 것입니다. 한 사회에서 공통의 경험을 공유하는 차원에서요. 하지만 그 세대가 변화와 진보를 위해 자신의 경험을 소중한 자산으로 만드는 면에서 그들은 너무 준비 없이 참여했고 빨리 퇴장했습니다. 딱 10년이었죠.

어쨌든 복지국가 체제에서 노사 협약을 거꾸로 뒤집으면 신자유주의입니다. 임금·고용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고 수량적 유연화가 확대되고, 사회보장제도가 축소되며 수익기회를 늘리기 위해 민영화와 규제 완화가 시도됩니다. 대외 개방이 가속화되고 워싱턴 컨센서스를 통해 제3세계로 신자유주의가 전파되어 갔습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불가피했습니다. 이전의 케인스적 복지국가 체제가 유효하게 작동할 수 없는 한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계급과 시장의 힘이 관계가 역전된 것이 그들의 눈에는 불가피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논리를 뒤집어 보면 신자유주의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게 30년 후에 우리 앞에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몰락 쉽게 예측할 수 없다…고통 가중될 수 있어"

신자유주의의 한계가 불가피한 것이고 그 체제가 영원할 수 없는 이유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책에서 자본주의 시장에 특수한 성격을 가진 상품이 2개가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노동력이고 하나는 화폐입니다. 노동력은 노동자의 몸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화폐는 교환시스템의 지탱 도구이지만 돈 자체도 거래될 수 있습니다. 본래 상품이 아니었던 것이 상품이 된 것입니다.

▲ 이매뉴얼 사에즈 버클리대 교수는 지난 100여 년 동안 미국의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분석해 1930년대 대공황과 최근의 경제위기 기간에 그 비율이 가장 높았다는 것을 실증했다. 사에즈 교수는 '부의 불평등'을 연구한 공로로 지난 4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했다.

신자유주의 위기의 원인은 노동력과 화폐의 재생산을 과도하게 시장 기능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사에즈라는 경제학자의 유명한 곡선을 한 번 보시죠. 그는 1917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의 상위 10%의 소득점유율 추이를 조사했는데 대공황 당시 그 수치가 가장 높았습니다. 공황을 거치고 케인스 시대에 30%대에서 잘 관리되어 오다가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다시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대공황 당시까지 그 비율이 커졌을 때 글로벌 금융위기가 온 것입니다. 반면에 미국의 블루칼라 층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실질임금이 전혀 오르지 않았습니다. 노동의 재생산을 시장에 일임한 결과입니다.

▲ 이매뉴얼 사에즈 버클리대 교수 ⓒ사에즈 교수 홈페이지 제공
요새 케인스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데 케인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어쩌면 다시 위기를 배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자유주의의 수명이 다 했다면 케인스 역시 예전에 수명이 다했다고 봐야겠죠. 그럼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경제 시스템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G20 정상회의에서 경제 위기 대처방안을 논하는 것을 들어보면 금융감독 시스템의 변화만 이야기하지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금융개편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가 바로 이번 위기에서 가장 책임이 큰 미국과 영국입니다.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스티글리츠 같은 이들이 잠시 칼럼에 글을 쓸 때만 흥분하고 마는 것입니다.

작년 이맘때에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고 주가가 폭락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상은 끝났다고 느꼈던 게 1년도 안 지났습니다. 하지만 지금 달러에 대한 도전은 없고 당사국들이 개편을 주도한다면 미래는 어디로 갈까요?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쉽게 예단할 수 있을까요?

유연성 부분에서 어느 정도 감소한 신자유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대안들이 서바이벌 게임을 벌리고 이를 끝내는데 10년, 20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 와중에 우리들은 살아남기 위해 외화보유고를 쌓아야 할 것입니다. 시시각각 상황이 불안해질 때마다 젊은이들은 실직을 반복하는 삶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서구 국가들은 예전부터 경제 외적인 힘에서 시장의 힘으로, 다시 국가와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에서 다시 시장으로 교체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무언가 남긴 게 있습니다. 국가 개념, 관료체제, 법치, 사회법칙이 생성됐습니다. 케인스 시대는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기본체제를 남겼고 신자유주의는 국제적 통합 시스템이라는 경험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어떨까요? 서양과의 위험한 비교일지 모르겠지만 우린 중상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바로 직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압축·비약 성장의 결과입니다. 근대의 시민혁명 경험도 없고 사민주의·복지국가의 전통도 없습니다. 서로 지탱할 수 있는 공동체가 부재한 상태에서 서빙고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한꺼번에 건너뛴 것입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문제들을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고 한 가지 대안을 이야기하기엔 복잡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서구의 진보개혁 진영이 모순된 과제를 시대에 따라 순차적으로 해결한 반면 우리는 동시대적으로 해결해야합니다.

목표설정도 중요하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목표에 이르는 과정이 임기보다 더 긴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에서 위험요소들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게 결여되어 있다면 지난 참여정부가 실패했던 그 길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참여정부의 진정성과 의도를 부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이 자신들을 지지했던 이들마저도 등을 돌이고 반대편이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군요.

(김상조 교수의 강연은 오는 11월26일까지 매주 목요일 열린다. 자세한 사항은 경제개혁연대(02-763-5052)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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