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정권이 저지른 해악만이 적폐는 아닐 것이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나쁜 관행의 총체가 적폐라면, 이를 바로 잡는 데에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5년 대통령 임기 동안 적폐가 청산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어쩌면 반민특위가 허무하게 무력화됐듯이, 적폐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도 기득권의 극심한 방해와 모략으로 좌절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촛불이 만들어낸 진보의 한 발이 두 발 후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시스템을 보지 않고 특정 사안이나 사람의 문제로만 접근한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도 근본적인 문제를 풀어내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정권 후반기에 찾아오는 레임덕을 생각하면 개혁을 위한 가용시간은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다. 해악을 저지르면 그만큼의 처벌이 뒤따르는 구조, 나쁜 관행은 전통이 아니라 악습이라고 인식시켜주는 시스템. 결국 정치 영역이 이 시스템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박근혜 정부의 부패와 무능함을 경험하면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국정농단 사태가 법・제도의 심각한 하자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치의 부재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옳다. 집권 여당과 제대로 된 야당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맞춰 민의를 반영한 정치를 했더라면 추운 겨울 수백만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적폐청산의 첫 번째 착점은 정치개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시스템도 바꿀 수 있다.
국회의원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여준 최근 <뉴스타파> 보도(10월 11일, 10월 16일)는 정치개혁이 왜 필요한지를 대변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예산을 써가며 자신의 성과물로 발행했던 정책자료집이 실상은 다른 연구기관의 보고서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무단으로 베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더 심각한 것은 저작권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거나, 알아도 전혀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는 점이다. 4선 관록의 조경태(자유한국당) 위원의 변명은 이렇다.
"(선배 정치인들이) 일종의 관행처럼 국정감사 때마다 정책자료집을 냈고, 저희는 후배로서 선배가 하는 걸 보고 배운 거다.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은 국회사무처가 잘못이다."
저작권법은 저작물을 이용하는 자는 그 출처를 명시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무단으로 다른 이의 저작물을 베낀 국회의원들은 도둑질과 다르지 않다. 국민의 혈세를 도둑질에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국회의원들은 매년 정책자료집 발간으로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집행한다.
투명한 예산운동을 전개하는 3개 단체(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좋은예산센터, 세금도둑 잡아라)에 따르면 올해 국회 특수활동비로 책정된 예산은 81억 원이지만 집행내역은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2016년에 사용한 업무추진비는 88여억 원이었으나, 역시 집행내역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번에 문제가 된 정책자료집 발간비와 홍보물 유인비, 정책자료 발송비 등의 명목으로 작년 한 해 동안 총 46여억 원이 집행됐다. 그러나 총액만 공개될 뿐, 집행 상세내역이나 지출증빙 서류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2017년 책정된 예비금 13억 원에 대해서도 집행내역을 비공개하고 있고, 입법 및 정책개발비로 책정된 86여억 원은 지출증빙서를 비공개하고 있다. 의장단과 정보위원회 위원의 해외출장비 집행내역은 모두 비공개다. 이렇게 국민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국회 예산은 315억이 넘는다.(☞관련 자료 : 1년에 137억 줬더니? 베끼기 정책자료집 발간?)
국회가 예산을 허투루 사용했다면, 국회도 감사나 수사의 예외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상식이다. 특히 예산으로 남의 저작물을 무단으로 도용한 정책자료집 발행 비용은 환수되는 것이 마땅하다. 국민은 도둑질에 예산을 사용하라고 세금을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권자의 표가 정확히 반영되는 선거제도로의 개혁이 불가피하다. 부천시의회 윤병국 의원이 최근 펴낸 <지방자치 새로고침>(한티재)은 현행 선거제도가 특정 거대정당의 독점정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진단하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광역의회 지역구 선거결과를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떠올려보면 적잖이 충격적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지역구 108석 중 108석 당선(경기도), 96석 중 96석 당선(서울), 42석 중 42석 당선(부산), 30석 중 30석 당선(인천), 26석 중 26석 당선(대구), 16석 중 16석 당선(대전)으로 광역의회를 100% 당선시켰다. 같은 해 선거에서 민주당은 광주에서 16석을 싹쓸이 했다.
2010년 지방선거, 2014년 지방선거도 이런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정 정당이 시류에 따라 싹쓸이 하는 현상은 계속 이어져온다. 과연 유권자는 이런 현상을 원했던 것일까? 유권자의 표가 제대로 반영된 것일까? 역대 선거에서 유권자의 51%의 표가 사표였다는 연구결과를 보더라도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현행 선거제도가 정치개혁의 정수다. 정당이 얻은 득표율과 똑같은 비율로 의석을 가져가야 한다. 10%의 득표를 얻은 정당은 10%의 의석수를 차지해야 한다는 이 상식적인 규범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적폐청산이라는 국정과제는 요원하다.
선거제도 개혁 없는 정치개혁은 공염불이다. 정치개혁 없는 적폐청산은 요원하다. 지금도 우리는 개혁에 발목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을 목도한다.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산적한 과제들, 예컨대 불안정한 노동문제와 경제적 불평등, 안전한 탈핵에너지 사회로의 전환,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다양성의 사회는 현행 선거제도로 구성된 국회의원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희망고문일 뿐이다. 유권자 표심이 그대로 반영되는 '전면적 비례대표제' 혹은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도 개혁은 '정치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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