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총장은 '공안검사' 출신인 천성관 전 총장 내정자가 각종 비리의혹에 떠밀려 낙마하면서 후임으로 전격 박탈됐기 때문에 현 정부와 특별히 인연이 깊지도 않다. 고려대도 아니고 TK(대구경북) 출신도 아니였다. 그는 취임사에서 "새롭게 바뀌고 수준 높게 바뀌어야 한다. 검사는 검사답게, 검찰은 검찰답게 일하자"고 변화를 주문하기도 했다.
이런 평가를 받던 김 총장의 요즘 행보는 놀랍기만 하다. 현직 의원 11명의 후원회 사무실을 대정부질문이 진행 중이던 시각에 압수수색을 단행하는 사상 초유의 일을 벌여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청원경찰들의 이익집단인 '청목회'의 입법 로비 의혹과 관련된 일이었다. 검찰은 동시에 C&그룹, 태광그룹, 한화 등 일부 기업의 로비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야당은 이런 검찰의 행보가 청와대의 주문에 따른 게 아니냐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변화를 이끌 것이란 기대를 모으던 김 총장이 이끄는 검찰이 여느 때보다 더 충실히 정권 하수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강성'이 된 김 총장 "이런 때일수록 의연하게"
▲ 김준규 검찰총장. ⓒ뉴시스 |
실제로 청목회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북부지검은 이번주까지 회계책임자 등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짓고 이르면 내주부터 의원들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10일 검찰 소환에 불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검찰은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강제 조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면돌파'하겠다는 얘기다.
김 총장은 왜 '강성'이 됐을까? 최근 검찰의 행보는 '독자적 판단'에 따른 것일까? 아니면 윗선이 있는 걸까? 검찰조직이 아닌 김 총장의 변모와 향후 '사정정국'의 흐름을 관측할 수 있는 몇 가지 정황이 있다.
먼저 검찰 내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검찰이 상당히 위축됐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악의적인 피의사실 공표가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충격적 결말로 귀결됨에 따라 검찰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뇌물수수 의혹과 관련해 지난 4월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난 것도 검찰에 적잖은 상처를 입혔다.
여기에 MBC <PD수첩>에서 '스폰서 검사' 문제를 보도하면서 들끓는 검찰에 대한 비난 여론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됐다. 결과적으로 아무런 실체도 밝혀내지 못한 채 끝났지만 '스폰서 검사 특검'까지 수용해야 하는 치욕을 겪어야만 했다.
이후 6개월가량 숨죽여 지냈고, 검찰 내부의 불만이 쌓여간 것도 사실이다. 특히 천성관 낙마로 내부 물갈이가 진행되면서 젊은 검사들이 승진이 빨라졌다. 일선 지검에서 수사를 책임지는 차장 검사들이 젊은 검사들로 채워졌다. 이들 중엔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당시를 일선에서 뛰었던 검사들이 많다. 안대희 당시 대검 중수부장에게 도시락을 싸들고 찾아오는 중년 여성 팬들이 생길 만큼 검찰은 여론을 등에 업고 정치권 눈치를 보지 않고 수사를 단행할 수 있었다. 2003년을 그리워하는 젊은 차장 검사들이 특히 검찰에 쏟아지는 비난 여론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로비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의 동력 중 하나가 검찰 내부 분위기라는 얘기다. 일선 검사들 사이에 "계속 이렇게 죽어지낼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팽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준규 총장이 "법대로 하라"며 수사를 계속 독려하고 있는 것도 이런 검찰 내부의 분위기를 감안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연수원 11기 김준규, 12기 이귀남, 14기 노환균
천성관 낙마로 '어부지리' 비슷하게 총장 자리에 오른 김준규 총장은 최근 '사정정국'을 검찰 내부를 확실히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제 임기가 1년이 채 남지 않은 김 총장 입장에서 내부 장악력을 높이지 못하면 '어부지리 총장'이라는 이미지를 끝까지 벗지 못할 수 있기 때문.
특히 TK-고려대 출신으로 이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로 꼽히는 노환균 서울 중앙지검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노환균 지검장이 권재진 청와대 민정수석에게 '직보'한다는 의혹은 지난달 1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청와대에서 (김준규 총장을 배제하고 노환균) 중앙지검장과 직거래한다는 얘기가 많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C&그룹은 대검 중수부가, 한화·태광 수사는 서울 서부지검이, 청목회 수사는 서울 북부지검이 맡고 있다는 점도 이런 '견제론'에 힘을 실어준다. 앞서 김 총장은 지난 7월 있었던 검찰 인사에서 '특별수사통(通)'을 서울지역 일선 검찰청에 대거 전진 배치했다. C&그룹을 수사 중인 우병우 대검 수사기획관, 한화·태광 사건을 수사 중인 봉욱 서울 서부지검 차장검사, 청목회를 수사 중인 조은석 북부지검 차장검사, 경기도 고양시 식사지구 재개발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윤갑근 서울중앙지검 3차장 등이 이때 보임됐다.
검찰에서는 제보를 받은 곳에서 수사를 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노환균 지검장이 있는 중앙지검을 의도적으로 수사에서 배제시키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4대 권력기관장 중 유일하게 TK 출신이 아닌 김 총장이 한명숙 사건,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등 현 정부의 입맛에 맞는 사건을 독식해온 노환균 지검장을 견제하고 검찰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이귀남 법무장관이 현 정국에서 사실상 '왕따'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김 총장이 최근 정국을 조직 장악에 활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짙게 만든다. 이 장관은 5일 압수수색 직전에 이에 대한 보고를 국회 대정부질의 현장에서 전화로 받았다. 의원들이 검찰의 압수수색을 언제 보고 받았냐고 따져 묻자 이 장관은 사전에 이를 보고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장관은 10일 국회의 긴급현안질의 과정에서 "압수수색은 보안이 중요한 문제"라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의원들은 "법무장관의 검찰 지휘권이 무시당한 게 아니냐"고 따졌다.
고려대 인맥인 이 장관은 호남 출신으로 '지역 안배' 차원에서 장관으로 발탁된 케이스다. 이 장관은 2009년 9월 장관 취임 직후 김 총장이 기자들에게 돈 봉투를 돌렸던 사건부터 시작해 조두순 사건 수사 등 여러 차례 검찰을 '긁는' 발언을 했었다. 사법연수원 11회인 김 총장이 연수원 1년 후배인 이 장관을 상대로 나름 '군기잡기'를 한 셈이다. 검찰총장의 '힘 겨루기'는 노무현 정부 때도 여러 차례 목격된 일이다.
'청와대의 지시' 여부와 무관하게 검찰 수사가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것은 이처럼 검찰 내부의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청목회 수사, 검찰 뜻대로 갈까
이제까지는 검찰의 완벽한 '승리'다. C&그룹 임병선 회장의 부인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일본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 친구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입국 시키지도 못하면서"라고 수사 형평성을 문제 삼고, 야당 의원들이 "정치 말살"이라고 과잉 수사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만 "돈 밝히는 정치인"이라는 익숙한 비난 여론을 불러오면 쉽게 덮을 수 있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우려되는 대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목회'라는 집단의 성격이다. 검찰과 일부 언론은 '청목회'가 엄청난 로비 집단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주목받고 있다. '엄청난 로비'를 통해 법을 바꾸기 전, 청원경찰의 1호봉 봉급액은 89만5200원 수준이며 29년 근무해도 198만 원에 불과했다. 또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행방을 좇는다는 로비자금 5억 원 중 1억 원은 정상적인 경비로 쓰이고 4억 원은 고스란히 은행에 예치된 상태로 확인됐다.
야당 의원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강조한 '공정사회'를 들먹이면서 "이미 힘센 자들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다 로비를 하고 있다"며 검찰이 대기업 등 힘센 이들의 로비는 눈 감아 주고 청원경찰처럼 사회적 약자의 로비에 칼을 휘두르는 게 과연 '공정'한 것이냐고 반박하고 나섰다.
'공정사회'와 배치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대포폰'이다. 지난 1일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처음 제기한 '대포폰' 의혹은 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것과 검찰이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권력의 눈치를 보고 '부실수사'를 했다는 것, 둘 다에 연관된 '물증'이다.
검찰이 5일 압수수색을 단행하자 야당은 당장 '대포폰 물타기'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검찰의 압수수색이 청와대의 지시, 내지는 상당한 교감 하에 이뤄진 게 아니냐는 의혹도 그래서 나온다. '대포폰' 의혹을 가장 덮고 싶은 두 권력기관이 공모해 '정치권 죽이기'가 진행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또 청와대의 지시에 따르는 '정치 검찰'이라는 의혹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검찰이 '대포폰' 문제를 포함해 민간인 사찰에 대한 수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곤혹스럽게도 민간인 사찰 문제에 대한 '재수사' 요구는 야당 뿐 아니라 여당과 <동아일보>를 제외한 보수언론에서도 나왔다.
'대포폰' 문제를 가리기 위해 '청목회'를 터뜨렸는데, '청목회'가 오히려 '대포폰'에 더 눈이 가게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일단 김준규 총장은 '고'를 외쳤다. 검찰은 G20정상회의가 끝나는 다음 주부터 의원들에 대한 소환 조사 등 수사를 본격화하겠다고 밝혔다.
시중엔 검찰이 농협중앙회, 일부 기업 노조 등 다른 이익단체의 로비 의혹에 대한 증거도 쥐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청목회'로 미진할 경우, 입법 로비 의혹 사건의 판을 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판을 키우는 건 정치적 이해 관계를 따져봐야 하는 문제다. 청와대의 의중은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입법 로비 사건은 성격상 여야 의원 모두에게 걸려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청와대가 어디까지 여당을 밀어붙일 수 있는지 따져봐야할 문제다. 민간인 사찰 문제와 관련해 지난 6월 폭발했던 여권 내 권력투쟁이 재연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청와대는 검찰을 믿고 '고'만을 외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사정정국'에서 이해를 같이 했던 검찰이 '선'을 넘는 순간, 청와대가 이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여권 내부의 분열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서 자신할 수만은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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