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모르면 바보
영어로 정치를 가리키는 폴리틱스라는 용어는 원래 아테네와 같은 도시국가인 폴리스에서 파생된 말이다. 아테네의 시민 가운데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바보라는 뜻을 가진 단어 이디어트(idiot)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이디어테스(idiotes)'인데, 이는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모두 바보란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현대사회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관점은 결국 개인과 사회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끝없는 논쟁을 벌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효율성은 찬양을 받은 대신 '사회' 또는 '정치'라는 용어는 '더러운 말'이 되었다. 사회적 평등과 정치적 참여도 위험하거나 귀찮은 일로 간주되었다. 인간의 사회적 삶을 형해화 시키는 현대 대중매체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끈질기게 이 문제와 씨름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개인과 사회가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공감한다.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에서 "역사가 사생활을 파괴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생활은 소련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무너뜨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사회가 전적으로 개인의 행동을 규정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편 개인이 사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행동할 수 있다는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제 문제는 개인과 사회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단지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묻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 개인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를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은 지금도 많은 학자들의 논쟁이 되고 있다. 어떤 이는 사회란 구조와 규칙의 실재라고 본다. 규범이 없는 사회는 끔찍한 혼란이다. 또 어떤 이는 사회란 자유로운 개인들의 모임이다. 영국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 총리는 "세상에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회에는 오직 남자와 여자인 개인들과 가족들이 존재할 뿐이다.
구조를 강조하는 이론은 인간 행위를 집단행동으로 축소하고 본질적 원리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환원론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은 가장 대표적인 이론적 실패의 사례이다. 일부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의 모든 행동을 구조의 작동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1980년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뛰세의 이론적 주장이 남긴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다.
반면에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들은 개인들의 기호, 취향, 욕구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추구하는 목적과 도덕적 가치, 삶의 의미와 중요성,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좋은 삶에 대한 문제에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우리는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라고 물을 수 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를 자연적 공동체로 간주했다. 폴리스는 유기체와 같이 한 부분이 없으면 전체가 유지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를 정치적 동반자로 보았다. 도시는 사회정의와 경제안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는 "정치적 동반자는 함께 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행동을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폭력적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도시를 만들었다는 사고와는 엄연히 다르다.
공동선은 좋은 삶의 전제조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사회' 속에 있는 개인들의 '좋은 삶'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를 명확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몇 가지 전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좋은 사회는 시민들이 사회 전체의 문제를 생각하고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고 참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모두가 세금 납부를 회피하거나 군 복무를 기피한다면 공동체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고통분담을 감수하는 대신 부자들을 위해 세금을 감면했으며, 병역 면제자들이 대거 고위 공직에 발탁되었다. 좋은 사회는 개인들의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공동선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미덕을 요구한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에 참여하고 다양한 시민단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공동선을 실현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시장이 사회를 지배해서는 안된다
시장의 효율성은 경제를 운영하는 원리는 될 수 있지만, 사회가 시장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 자유시장의 효율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선택과 경쟁을 강조한다. 선택과 경쟁은 만고불변의 원칙인가? 그러면 과연 우리는 부자들이 더 좋은 병원에 치료받을 수 있도록 영리병원을 허용해야 하는가? 학교보다 비싼 수업료를 내는 사설학원에 어린 학생들을 보내도 되는가? 아무런 연금도 없이 은퇴한 노인을 그대로 방치해도 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1인당 국내총생산과 국내총소득으로만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복지는 단순히 사회지출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사회의 교육, 의료, 공공부조는 경제적 효율성이 아니라 사회 성원의 '좋은 삶'과 관련이 가진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시장친화적' 정부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러나 국가경영은 기업경영과 다르다. 10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반드시 100명이 사는 마을의 이장이 되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GE의 잭 웰치처럼 최고경영자는 능력이 없는 직원을 해고하면 될지 모르지만, 마을에서는 능력의 기준에 따라 누구를 쫓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CEO 대통령 또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용어야말로 엉터리 말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시장친화적 정책이 아니라 사회친화적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
결과의 평등이 중요한 이유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고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확대해야 사회적 연대의식과 시민의 미덕도 커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완벽한 공동체는 중간계급이 통제하고 다른 두 계급 (상층과 하층)보다 숫자가 많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빈부격차가 지나치게 커지면 시민들의 연대의식은 약해진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빈부격차는 점점 커졌으며, 현재 가장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복지재정 확대를 주장하면 보수세력으로부터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온갖 공격을 받는다. 사회의 불평등은 개인의 노력에 따른 정당한 보상이라는 생각이 판을 친다. 최근 이명박 정부가 주장하는 '공정사회'도 자세히 보면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지만 결과의 평등은 외면한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정말 기회의 평등을 제대로 보장하면 어떻게 될까? 부자들은 공립학교보다 우수한 교사와 시설을 가진 사립학교로 자녀를 보낼 것이다. 상류층은 자신들만을 위한 최고급 수준의 민간병원을 요구할 것이다. 고급 아파트 단지에 사는 부자들은 임대아파트가 들어오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이처럼 부유층이 공립학교와 국민건강보험을 이용하지 않으면 결국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만 남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부자들은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세금을 줄어들어 공공시설이 줄어들고 공적 영역이 약해진다면 공동체의 소속감은 약해진다. 고급 백화점과 화려한 쇼핑센터에 모이는 사람들과 재래시장과 동네 작은 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분리된다면 사회의 공공선은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공동선은 결과의 평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회?
지금 한국에서 '공정사회'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시대에는 '공정'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으로 '좋은 삶'은 개인의 미덕을 키우고 동반자를 만들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와 개인이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개인들은 무엇이 '좋은 삶'인지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 사회가 분배의 정의를 강화하고 결과의 불평등을 줄여야 개인이 사리사욕보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미덕을 가질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사회와 개인이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가 현대사회에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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