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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 된 검찰, 견제받아야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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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 된 검찰, 견제받아야 살아난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⑥ 검찰의 '권세'와 '저울'

權이란 한자의 훈독(訓讀:한자의 뜻을 새기어 읽음)은 '권세 권'이다. 권세는 권력과 세력이다. 그러나 옥편에 보면 그 뜻 말고도 權에는 우리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훈독이 있다. 바로 '저울질 할(稱錘 칭추)권'과 '평할(平)권'이란 훈독이다. 權이란 한자의 참뜻과 정신을 이야기해주는 대목이다 싶어 흥미롭다. 원래 추(錘)의 무게와 달고자 하는 사물의 무게가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게 저울의 기능이다. 권세(權)는 그렇게 형평성 있게, 공정성 있게, 절제해가며 쓰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분명하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과 당주동 변호사회관 앞에 서 있는 여신상도 오른손에 저울을 들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 조각상으로, 변호사회관 앞 여신상은 헝겊으로 두 눈을 가린 상태다. 죄와 벌의 무게를 달 때 편견과 사사로움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눈을 가렸다고 했다. '권세'도 '저울'처럼 그렇게 치우침이 없고, 편견과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양의 '權'과 서양의 '정의의 저울'은 기본 정신을 같이 한다고 본다.

검찰은 '權'의 사용을 임무로 하는 기관이다. 그 조직이 최근 자주 국민들의 주목을 받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권세'(權)를 쓰면서 '저울질'(權)은 균형있게 하고 있는가, 오남용은 없는가. 안타깝게도 이 나라 검찰은 '권세'의 '저울질'에 고장이 붙은 것처럼 보인다. 균형, 형평, 공정, 이런 것들은 이미 우리 검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언어처럼 보인다. 고의적이고 자의적인 '저울질' 오남용 사례도 엿보인다.

사례가 너무나 많다. 당장 요 며칠 전 국회에서 말썽이 된 '그랜저 검사' 사건만 해도 그렇다. 부장검사가 후배 검사에게 잘 아는 건설업자의 관련사건을 청탁하고, 대신 그랜저 승용차를 선물로 받았다는 사건이다. 2009년 1월 그랜저 승용차 살 돈을 받고, 3월에 뇌물 받은 그 사실을 고발당한 뒤, 5월에 그 돈을 돌려줬다고 했다.

문제는 이 고발사건을 담당한 서울 중앙지검 형사1부가 1년 넘게 수사한 끝에 지난 7월 그 부장검사(현재 퇴임 후 변호사 개업중)를 무혐의 처분하면서 불거졌다. 돈은 빌린 것일 뿐이고, 돌려줬다고 했다. 검찰의 이야기다. 대가성이 없다고도 했다. 때문에 "재수사 할 생각이 없다"는 게 국회에서 검찰이 밝힌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례는 다르다. 뇌물죄와 관련해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청탁이 없어도, 나중에 돈을 돌려줬어도, 뇌물의 의사 등을 인정해 처벌 하는 게 옳다는 이야기다. 요컨대 검찰의 '저울질'(權)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기소여부를 독점해 결정할 수 있는 '권세'(權)를 잘못 쓴 것이다. 제 식구를 감싸기 위해 자의적으로 '저울질'을 잘못 한 것이다.

일반 공무원들은 불과 몇 십만 원 어치 접대를 받고도 기소된 사례가 수두룩하다. 문제의 고발사건을 맡아 '그랜저 검사'에게 무혐의 결정을 내린 담당부장검사는 지금 전국 검찰 직원들의 비위를 밝혀내 처벌하는 법무부 감찰담당관으로 재직하고 있다고 했다.

ⓒ연합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는 특히 특검 때마다 얼굴을 내밀고 기승을 부린다. 특검에 파견된 검사들이 그런다고 했다. 때문에 삼성특검에서는 단 한명의 검찰간부도 기소되지 않았다. '스폰서' 특검에서는 조사대상 100여 명의 전현직 검사 가운데 겨우 4명만 기소하고 수사를 끝냈다. 차라리 '면죄부 특검'이었다.

검찰청법 제4조는 <검사는 ①공익의 대표자로서… ②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권한을 남용하지 않는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 조항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 정치적 중립문제에서는 할 말들이 너무나 많다.

암울했던 시절 이른바 시국사건에서는 노상 그랬다. 쉬운 예 하나만 들어본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때였다. 권모 양에 대한 문모 형사의 성고문 사실을 확인하고도 검찰은 당시 안기부의 압력에 굴복해 가해자인 문 형사를 기소유예 처분해버렸다. 성고문 피해자는 감옥으로 가고, 가해자는 백주대로를 활보했다. 거짓말 같지만 검찰이 그랬다.

가까운 사례도 있다. 민간인 사찰사건에서 검찰이 어찌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조사받아야 할 사람이 검찰의 수사진행 내용을 보고 받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 사건이었다.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과 박영준 당시 국무총리실 차장(현재 지식경제부 차관) 이야기다. 검찰이 범접할 수 없는 정치적 힘과 '몸보신'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두환· 노태우 씨가 불기소 처분된 것은 1995년 7월 18일이었다. 검찰이 그랬다. 그로부터 4개월 보름만인 12월 3일 군 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의로 전두환 씨를 구속수감(노태우 씨는 11월 16일 수뢰 혐의 구속)한 것도 검찰이었다. 정치적으로 어떤 움직임이 있었고 무슨 이야기가 오갔건 하나의 사건을 놓고 검찰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조치를 했다.

전두환 씨 구속수감 닷새 뒤인 12월 8일 국내 한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다. <서울지검에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가 전격적으로 구성된 직후 한 검사가 자조적으로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고 말했다>

"여러분은 누구든지 잡아넣을 수 있고 어느 사건이든지 수사 못할 게 없다." 법무연수원에서 이런 교육을 받은 검사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교육이었겠으나 이야말로 '저울질'(權) 오남용을 부추기는 소리다. 그런 교육 받았다고 해서 수사에 특별한 솜씨를 보이는 것 같지도 않다. 한명숙 씨 사건 수사에서도 그랬다. 멋대로 기소해놓고 무죄가 선고돼도 책임졌다는 소리 별로 들리지 않는다. 그저 과도한 엘리트의식과 함께 패거리 문화가 있을 뿐이다.

이 땅의 검사들은 두 부류가 있다고 이야기들 한다. '성골'검사와 '월급쟁이'검사라 했다. '성골' 20%와 '월급쟁이' 80%라는 사람도 있으나, '성골 5%에 월급쟁이 95%'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성골'은 주로 고위직과 특수·공안·기획부서에서 근무하는 이른바 엘리트들이다. 95%의 '월급쟁이'는 한 달 평균 200여 건의 사건에 매달려야 하는 격무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5%의 '성골'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 위해, 그 울타리 안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검사들은 필사적인 노력을 할 수 밖에 없게 돼 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게 정치권의 영향력이다. 여당실세들에게 줄을 대고, 때로는 야당 실세에, 일부 언론인에까지 손길을 뻗는다 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에 줄을 대야할 '실세'의 약점까지 남몰래 손에 쥐어두고자 하는 고차원 방정식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실은 이게 다 '거리낌 없이 고의적'이고 '거리낌 없이 자의적일 수 있는'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해 벌어지는 일들이다. "'주인'인 청와대가 인사권을 갖고 기득권도 제어하지만, '주인'이 힘 빠지면 검찰은 곧바로 문다. 그게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 사건이다." 이런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는 게 오늘날 이 나라 검찰의 위상이다.

"한국 검찰만큼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는 조직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도 검찰 개혁 함부로 말하면 검찰과 척진다고, 그래서 정치권조차 그런 소리 꺼린다고 했다. 허나 약이 되는 얘기는 하는 게 좋다.

검찰이 눈앞의 기득권 때문에 '권세와 저울' 두 가지를 골고루 다 갖추기 어렵다면 아예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줄 필요가 있다. 바로 견제장치다. 따지고 보면 허구한 날 욕이나 먹고 가슴 펴지 못하는 검찰에게도 그게 오히려 당당해지는 장치일 수 있다. 다른 선진국에서도 다 그렇게 한다.

가까운 예로 일본은 1948년 이래 유권자 가운데 뽑은 주민들로 임기 6개월의 '지역 검찰 심사회'를 구성해오고 있다. 검찰의 기소독점을 견제하는 게 임무다. 최근 정치자금 의혹을 받고 있는 오자와 전 자민당 간사장을 검찰이 불기소 처분했으나 그 결정이 뒤집혔다. '검찰심사회'가 그랬다. 이런 게 건강한 '문민견제'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탈이 나게 돼 있다. 검찰 권력이 적절히 견제 받도록, 그래서 균형감각을 찾아 당당해지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만신창이가 돼가는 검찰은 그렇게 살아나야 한다. 구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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