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1일,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선로 위의 스튜어디스'라 불리던 승무원 280명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철도공사노조는 나흘 만에 파업을 끝냈지만, 이들은 복귀하지 않았다. 철도공사는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승무원의 정규직 전환을 거부했다. 그로부터 파업은 11년 넘게 이어졌다. 18일자로 정확히 4220일. 상상하기 힘든 시간 이어진 파업을 끝까지 이어온 33명은 강산이 변할 동안 흐르지 않는 시간을 견뎌왔다.
그 시간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일부는 KTX관광레저로 입사했다. 자회사 입사를 거부하고 철도공사의 직접 고용을 요구한 180여 명은 해고됐다. 싸움은 법원으로 갔다. 2008년 4월 8일 서울고등법원은 "승무원 채용, 승무인력의 업무 조정, 작업시간 결정, 임금수준 결정, 인사관리 등의 시행주체는 철도공사"라며 철도공사의 KTX 승무원 자회사 위장도급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당시인 지난 2015년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대법원은 승무원 복직이 정당하다는 하급심을 뒤집었다. 이로 인해 해고 승무원들은 개인당 1억 원이 넘는 돈을 회사에 물게 됐다. 이 극단적 판결에 지난 10여년간 복직을 위해 싸운 한 승무원은 세 살 자녀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판결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선정한 2015년 최악의 판결로 남았다.
이제 공은 문재인 정부로 넘어갔다. 애초 승무원들의 싸움은 노무현 정부 당시 시작됐다. 공기업의 재정 여건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여성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사건의 결실을 맺을 책임을 현 정부가 지게 됐다.
일단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의견을 낸 바 있다. 문 대통령은 19대 대선 당시 철도노조의 공식 질의서에 "국민의 생명안전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 업무에는 비정규직 사용을 제한하고,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구분 없이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하며 "선박, 자동차, 철도, 항공기 등 여객운송사업 및 해당 분야에서의 정비, 승무업무 등에서 비정규직 사용을 금지하고 직접고용 정규직화하도록 할 것"이라고 답했다.
당장 현 정부 들어 대법원 판결과 관계없이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가 복직한 사례가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해고됐다가 9년 만에 복직한 YTN 해직기자들이다. YTN 해직노동자들에 관해 대법원은 3명 해직, 3명 복직이라는 괴상한 판결을 내놓았다. 이 때문에 노종면, 조승호, 현덕수 등 해직기자 3명은 회사로 곧바로 복직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곧바로 복직할 수 있었다. 정부의 의지가 현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중요함을 입증하는 사례다.
이 같은 분위기 때문인지, 이날(18일) 국회 의원회관 9간담회의실에서 열린 'KTX 승무원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위하여'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서도 이제는 해고자 복직이 가능하다는 기대감이 엿보였다.
KTX해고승무원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와 코레일관광개발지부 주관으로 열린 이날 토론회는 국회 환노위, 국토위, 여가위, 정무위, 외통위 등 각 상임위 소속 의원 13명이 주최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직접 참석했고 박원순 서울시장도 영상을 통해 4220일을 싸운 노동자들을 격려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정치적 판단’까지 내려졌음을 입증하는 모습이었다.
KTX 승무원 외주화는 잘못된 정책 결과일 뿐
애초 승무원들은 외주화 대상이 아니었다. 2003년 9월, 당시 철도청은 정부에 승무업무를 외주화할 경우 불법파견 소지가 없는지 여부를 질의했다. 당시 노동부 답변은 "승무 업무는 파견 허용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철도청은 외주화를 강행했다.
더 문제는 철도청이 승무원을 속였다는 데 있다. 철도청은 2004년 KTX 개통을 앞두고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뽑는다고 채용 공고를 냈다. 채용 당시 '1년 계약직 후 정규직으로 전환해 공무원 수준의 후생복지와 정년 보장'을 약속하기도 했다. 모든 문제를 감추는 식으로만 대응한 것이다. KTX 승무원들이 파업한 까닭, 이들의 싸움이 법정으로까지 간 까닭이 여기에 있다.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은 "철도청이 2005년 철도공사로 전환한 후, 애초 약속대로 승무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라며 "하지만 불법파견으로 인한 직접고용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철도공사는 업무를 외주화한 위탁업체를 바꿔 노동자들을 희생시켰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은 파업 이후 교섭 파기 책임도 철도공사가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파업 당시 승무원을 해고한 철도유통은 100% 철도공사가 지분을 가진 자회사였고, 임원도 모두 철도청 출신"이었다며 "교섭 파기의 책임도 (원청인) 철도공사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양승태 대법원 판결보다 정책 의지가 중요
승무원들의 부단한 싸움 끝에 얻어낸 하급심 판결을 뒤집은 양승태 대법원의 판결은 상식을 의심케 한다. 대법원은 "승무업무는 안전과 서비스로 명확히 구분되며, 안전 업무는 열차팀장이, 서비스 업무는 (여성) 승무원이 담당한다"고 판단하고 "열차승무의 핵심 업무는 안전업무이고, 서비스 업무는 비핵심업무이므로 비핵심 업무 외주화는 정당하다"고 정리했다. 즉, KTX 한 대에 타는 1000여 명 승객의 안전관리 책임은 단 한 명인 열차팀장이 담당하고, 객차를 돌며 승객을 살피는 승무원에게는 안전관리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이 같은 판결보다 협약이 우선한다고 김 위원은 설명했다. 정부의 정책 의지, 철도공사의 의지가 문제 해결의 실질적 열쇠라는 뜻이다.
그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기간제 교사 순직인정 문제 당시도 인사혁신처는 순직 인정을 거부했지만, 문재인 대통령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시행령을 고치고 순직 인정 절차를 밟았다"며 "철도공사가 대법원 판결 뒤로 숨는다면 그것은 정책적 무능을 자백하는 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비행기 스튜어디스의 업무만 봐도 현실과 동떨어진 정리임을 알 수 있다. 스튜어디스의 첫째 업무는 승객 안전관리다. 서비스 관리는 그 다음이다. 무례한 승객들의 성희롱, 폭언 등에도 불구하고 승무원들이 웃음을 잃지 않고 객차를 돌아다니는 이유는 승객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다.
승무원 복직 문제가 고객 안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은 중요하다. 철도공사는 지금도 '승무원은 안전 업무를 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승무원들에게 안전교육이나 안전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않는다.
이와 관련, 지난 2013년 12월 철도노조 코레일관광개발지부(현재 승무원 고용업체)가 KTX 승무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192명 중 77%가 "지난 1년간 단 한 차례도 비상 대응 방법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95%는 "신규자 안전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김 위원은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기 위해 승객의 생명안전 권리마저 빼앗는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올해 들어서만 노동자가 사망하는 열차 사고가 3건 일어났다.
비행기 승무원의 경우, 모든 승무원은 매년 안전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하며, 이 훈련을 1년 이상 받지 않으면 비행기 탑승이 제한된다. 신입 승무원의 경우, 직무훈련 504시간 중 약 40%에 달하는 179시간이 안전훈련으로 이뤄진다.
이미 승무원 안전 업무는 의무화
철도공사와 대법원 철학이 이미 근거를 잃었다는 점도 승무원 복직 문제 해결을 위해 참고해야 할 점이다. 지난 2015년 철도안전법이 개정되며 열차 승무원에게 안전 업무를 의무화했다.
이 법 제40조의 2는 "철도사고 등이 발생하는 경우 해당 철도차량의 운전업무종사자와 여객승무원은 철도사고 등의 현장을 이탈하여서는 아니되며,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하는 후속조치를 이행하여야 한다"고 명확히 했다. 아울러 이를 위반하는 승무원에게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처하도록 했다.
안전업무 담당자가 아니라는 승무원이 비상사태 시 안전관리 업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처벌한다는 조항은 현재로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승무원이 서비스만 담당하는 '주변부' 노동자가 아님을 인정해야만 이 법이 의미를 가진다.
발제자로 나선 강문대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총장)는 "이제 안전과 서비스를 분리해 승무원은 안전업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코레일의 주장은 설자리를 잃었다"며 "바로 지금이 10년 넘게 지속된 이 문제를 해결할 적기"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 의지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 모두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정부 의지가 얼마나 투철하냐에 이 문제 해결 여부가 달렸다.
철도노조는 정부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투철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는 입장이다. 김영준 철도노조 조직국장은 지난 달 22일 국토부가 발표한 '안전한 철도구현을 위한 대책'에 "생명·안전 관련 상시지속 업무는 철도운영자 또는 자회사 직접고용 등을 통해 전문성·책임성 확보"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을 예로 들었다.
당초 국토부가 철도노조와 협의할 때는 '자회사'가 들어가지 않았는데, 최종 발표문에 이 같은 문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자회사 직접고용'을 인정한다면 승무원을 하청화하는 현 체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승무원들이 요구하는 철도공사 직접 고용은 불가능해진다.
김 국장은 "민주당 당론과 문재인 정부 공약을 비상식적인 단어로 왜곡한 주체가 누구인지 의문"이라며 "당장 2012년에는 기본급의 20%를 반납하고 2013년에는 동결하고, 이후 매년 1% 내외의 임금만 인상하는 코레일관광개발의 태도도 현 KTX 승무원 처우 문제의 걸림돌"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승무원 복직 문제는 정부 의지만 있으면 지금도 곧바로 해결 가능한 문제"라고도 강조했다. 코레일관광개발 산하 노동자들은 오는 29일과 30일 파업에 나설 예정이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공공부문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공공성을 훼손해온 문제의 발단 과정을 도외시한 채 어느 정도의 고용 안정과 약간의 임금인상 정도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새 정부도 기존 정부와 다를 것 없는 결과를 자초할 것"이라며 문재인 정부가 "단순히 실적 쌓기, 보여주기 식의 고용개선이 아니라 당사자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전했다.
근본적으로 여성의 노동을 주변부화함으로써 노동의 비정규직화를 가속화했다는 점에서 KTX 승무원 문제를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공동대표는 철저히 남성 정규직 관리자와 여성 비정규직(파견직) 노동자로 나뉘는 KTX 승무 업무 체제를 지적하며 "성차별이 비정규직이란 외피 뒤에 숨어서 여성 노동 가치를 끌어내리고 여성 노동을 주변화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KTX 승무원 문제는 정부가 앞장선 여성 비정규직 확산, 외주화의 상징"이라며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공약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의 첫 걸음은 잘못 꿰어진 첫 단추를 바로잡는 일이며, KTX 승무원의 잃어버린 11년 세월 보장과 복직이 그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