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묻는다. 잊힐 만하면 우리는 왜 누추하고 추악한 역사를 기억해내, 엄숙해지고야 마는가. 매년 그날이면 왜 저 남쪽 어느 도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는 것인가. '부채의식'이다. 30년 동안, 역사서의 몇 줄 문장으로 모면하려 했던 추념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양심'일지도 모른다. 권불십년(權不十年), 10년을 못 갈 그깟 권력의 달콤함에 젖었다 해도 그런 짓은 상상으로만 끝나야 했다. 그런데, 그 일이 기어이 일어났다. 그래도 그 자리에 없어 화를 모면했다는 이 면목 없는 안도감이 당혹스럽다. 한강의 소설은 1980년 5월 18일부터 오랜 시간, 대한민국의 봉쇄되고 포위된 한 도시 속에서 일어난 믿기 어려운 사건과 그 사건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혹은 시의 소재로 자주 사용되었던 그 사건은 장르의 형식에 매몰돼, 매번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 고통과 슬픔을 묘사하는 매너리즘에 빠져버렸다고나 할까. 반면, 같은 주제를 다룬 한강의 소설은 공포와 슬픔까지도 정교하게 재단된 작품이다. 차라리 픽션이라면 분노와 공감으로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다. 아직도 그들을 폭도나 빨갱이로 간주하는 무지하고 냉혹한 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가 서글프다. 작가 한강은 부채의식 같은 거라곤 알 바 없는 시큰둥한 독자들에게 그 낯선 이야길 건넬 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 알고 글을 쓰는 듯했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니.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볼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동호야."(<소년이 온다>(창비 펴냄) 192쪽)
십수 년이 흘러, 동호의 엄마는 앳된 나이에 시민군 오빠, 누나들과 함께 도청 안에 있다 희생된 동호의 어린 시절을 하나하나 되짚는다. '꽃 핀 쪽으로'라는 장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이 소설에서 실제 사건들의 처절한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고통에서 빗겨나, 문학이란 이름으로 독자의 넋을 빼놓고 슬픔을 극대화하는 부분이다. 작가의 필력이 응축돼 있는 소설의 압권! 삼형제 가운데 중학생 막내 동호를 그날, 그 무시무시한 밤에 잃어버리고 온통 혼이 나간 상태로, 그 기분으로 이생을 살아가는 자신의 허깨비 같은 삶을, 더 이상 삶도 아닌 삶을, 살아온 시간들을 넋두리처럼 읊고 있는 엄마의 독백의 장이다. 여기에 무슨 이념과 협잡과 빨갱이와 보수와 진보의 다툼이 섞여들 여지가 있는가. 눈물 혹은 공분이면 족하지 않나.
허구이지만 진실인 이야기
소설은 이 같은 기법을 통해, 독자들을 그날 현장의 곳곳으로 안내한다. 민주주의를 목청껏 외치며, 시민들이 하나가 된 시위 현장의 매큼한 최루탄 냄새 속으로 입장한다.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정오에 철수가 예정된 공수부대원들의 집단 발포의 총성이 귀를 찢는다. 나뒹구는 시신들과 신음하는 부상자들의 아비규환을 골목에 숨어 목도하는 이들의 가뿐 숨소리가 들려온다. 병원 복도까지 점령해버린 부상자들 사이에서 헌혈을 하려고 자발적으로 모여든 시민들의 짠한 표정이 선명히 잡힌다. 도청의 시민군을 학살(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이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새벽 방송차량의 스피커에서 울려오는 여성 시민대원의 절박한 목소리가 애처롭다.
그날 새벽 항복하는 어린 학생시민군을 향해 조준 발포하며 마지막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못한 계엄군의 잔혹함이 심장을 파고드는 비수 같은 문장으로 눈에 와 박힌다. 시민을 지키라고 준 총기로 그 시민을 학살하는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해 총을 든 시민군은 폭도와 빨갱이로 낙인찍혀 체포되고, 고문받는다. 고문과 치욕의 시간이 얼마나 깊고 예리했던지, 그 누군가는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리며 정신병자로 살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37년 전 이 땅의 어느 도시에서 벌어진 픽션 아닌 '현실'이다. 그 모든 거짓말 같은 시간들을 작가 한강은 특유의 예민한 문장과 감성으로 복원해낸다.
어떤 소설은 읽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하다. 내가 왜 이 책을 집어 들었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빨리 읽어내 책장을 덮고 싶다. 아마도, 그것은 마음을 다치게 하는 생각들과는 좀 더 거리를 두고자 하는 본능 때문일 게다. 새벽에 책장을 넘기는 것이 가장 공포였고, 남은 페이지를 가늠해보며 이 고통스러운 감정이 어서 끝나기를 은근 바랐다. 소설이 독자를 고문시킬 수도 있구나.
매년 어김없이 기념일로 되돌아오는 그 날이 결코 반갑지 않다. 과거 어느 도시에 살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임산부는, 회사원은, 대학생 언니 오빠들은, 예배 가던 젊은 부부는 계엄군의 총과 칼에 무참히 쓰러졌다. 나라를 지키는 씩씩한 군인들에게, 우리 이웃의 아들들에게, 바로 지금 거리를 스쳐 지나칠 그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참히 도륙된 이 일을 다시 상기하는 건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픽션이 아니고 역사이며 진실이라니, 그게 더 고통스럽지 않은가.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
"오로지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
"용서한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민권운동가로, 백인 정권의 인종주의 정책과 흑인 학살에 저항해 무장투쟁을 이끌었고, 잔혹한 고문과 27년간의 복역을 견뎌내며 훗날 그 나라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넬슨 만델라. 그는 과거 자신과 동료 흑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던 백인들을 용서하며 이 같은 말을 남겼다. 그의 용서 정책은 '공짜 점심'이 아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철저하게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자를 가렸다. 사면을 받은 한 백인은 이런 말을 했다.
"흑인들이 나를 천만 번 용서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이 천만 번 나를 용서한다 해도 나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머릿속에 나의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역사에 한걸음 내디딜 수 있었던 건, 바로 진실의 가치를 아는 피해자와 양심의 존재를 인정한 가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아직도 그날, 그 도시에서 일어난 학살의 책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37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민주화 운동을 한 두 지도자가 선출되고, 민주주의가 성숙의 단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우리는 수백, 수천의 사상자를 낸 그 날 그 잔혹한 역사에 아직 발 묶여 있다. 왜, 다시, 또, 그 이야기냐고, 지겹다고, 그만하라고, 그렇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선 안 된다. 그날의 역사를 잘 형상화한 의미 있는 문학작품이 계속해 나와야 한다. 그리고 좋은 시나리오가 되어 영화로도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 정치와 정치인이 찾지 못한 진실을 문학과 예술이 더 잘 찾아낼 수도 있다. 거짓말로 남을 속일지는 모르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다. 예술은 양심을 북돋운다.
아직 역사의 진실은 잠들지 못했다. 아직 그 상처의 기억을 간직한 피해자들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가고 있다. 그 형제자매들이 마음 한편에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이 생을 보내고 있다. 그 어떤 고백과 반성도 역사의 상처를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길은 없다.
하여, 아직 고백과 반성의 대상조차 선별하지 못한 이 기이한 역사 앞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치유되지 못한 역사에 맞닥뜨린 독자들에겐 위로와 각성을 던지는 작품이자, 아직도 학살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생을 떠돌 망자들에겐 그 슬픈 넋을 달래는 레퀴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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