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김 후보자의 팔자는 분명 평범하지는 않다. 법관으로 가장 영예로운 자리인 대법관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감사원장에 이어 총리까지 맡은 것은 김 후보자 이외에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가 유일하다. 이회창 대표의 팔자 또한 얼마나 기구한가. 대권에 3번이나 도전했지만 번번이 미끄러졌다.
어쨌든 이회창 대표는 '용꿈'이라도 꿨던 사람이다. 하지만 김황식 후보자는 '총리 이후'를 재는 정치인은 아니다. 청문회 자리에서도 확인사살이 있었다.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은 '총리 마치신 후에 대통령 출마 요구를 받으면 어떡할 거냐'고 묻자 김 후보자는 정치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의원은 '그렇게 단정적으로 답하지 마라'고 '센스'있는 드립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프레시안 최형락 |
그러니 김 후보자는 청문회 자리에서조차 "총리 자리를 탐하거나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로지 나라를 위한 충정에 소명을 느끼고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이 대통령 뿐 아니라 국민들도 김 후보자의 꿈을 짓밟고 싫다는 총리 자리를 떠넘긴 공범인 셈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갑작스레 오른 배추 가격에 단무지를 씹으며 민족적 정체성 혼란을 느껴야 하는 기구한 팔자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저토록 총리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총리를 맡길 것인지 좀 생각해보자. '만인지상 일인지하'라고 얘기되는 총리직은 대다수의 공직자들이 최종적으로 꿈꾸는 자리가 아닌가.
더구나 김 후보자는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탓했지만, 불과 한달 전 있었던 김태호 총리 후보자의 청문회를 떠올려보면 김황식 후보자는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팔자다. 김태호 후보자는 야당 청문위원들의 '송곳 질문'에 '썩은 양파'에서 '걸레'로까지 전락해 자진사퇴했다. 39년 만의 '40대 총리'라며 일약 대권주자로 떠올랐던 그는 '용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떤 현안에 대해 저는 …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 보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같은 질문은 애교 축에 속한다. 한나라당 이두아 의원은 첫 질문 때 "법조계 선배이시기도 한데…"라며 후보자와의 인연을 밝히더니 '(눈이 나빠진 이유와 관련해)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 촛불 밑에서 공부하지 않았느냐'는 예리한(?) 질문을 했다.
같은 당 박영아 의원은 '상지대 판결'과 관련, '상지대 재판과 '신성학원' 재판은 엇갈린 판결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며 "저도 관심있던 문제라 김 후보자께 물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본인 궁금증을 굳이 그 자리에서 풀어야만 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김 후보자는 여당 청문위원의 질문에 답하면서 "제가 감사원장을 하면서 나름 식견을 가진 문제에 대해서 물어봐 줘서 감사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청문회, 참 쉽다.
이정현 의원은 또 후보자를 '총리' 라고 부르다가 오히려 김 후보자로부터 "총리 '후보자'라고 불러 주십시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보통 인사청문회라는 자리에서 청문위원들의 공격이 거세도 후보자는 공직에 대한 사명감으로 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청문회는 처음부터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21세기는 역시 역동적인 변화의 시대라 상식의 역전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는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번 청문회는 그야말로 '21세기형 청문회', '상식 역전의 청문회', '거꾸로 청문회'라 할 만하다. 문득 이게 청문회가 맞긴 한지 의문이 스친다.
(어이없어 실소만 나오는 일들을 진지하게 받아쳐야 할 때 우리는 홍길동이 됩니다. 웃긴 걸 웃기다 말하지 못하고 '개념 없음'에 '즐'이라고 외치지 못하는 시대, '프덕프덕'은 <프레시안> 기자들이 쓰는 '풍자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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