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다시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호남 지역의 지난 연재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 기사는 전남 화순 지역과 관련해 보강 취재를 한 원고입니다. 앞서 연재된 전남 화순편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김보순씨 관련 사연은 '전남 화순⑤'와 '전남 화순⑥' 두 번에 걸쳐 나눠 연재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살기 위한 몸부림, 북한 의용군 지원
김보순씨로부터 북한 의용군 지원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자 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이태 후인 2017년 2월에서야 이뤄졌다.
1950년 6월, 세상은 바뀌었다.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전 지역이 빠르게 좌익 치하가 됐다. 북한 인민군 탱크가 광주 산동교(북구 동림동)를 통해 호남의 중심부까지 들어온 것은 7월 23일. 군경이 모두 후퇴한 상황에서 인민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호남 구석구석을 점령했다. 3개월여 간 이어진 인공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달라진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가는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때마침 1950년 7월 1일 북한 최고위민위원회 상임위원회는 '전시동원령'을 선포, 이에 근거한 인민의용군 모집을 공식화했다. 북한 군사위원회 제4차 회의에서 '인민의용군조직위원회' 구성이 결정됐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훈련소가 설치됐다. 단기 군사 정치 훈련을 거친 의용군은 인민군(정규군) 편입이 가능하도록 방침까지 세워졌다.
김보순씨는 마치 생존 본능처럼 의용군에 지원했다. 경찰 가족이기에 마냥 있다간 죽을 수 있다는 판단도 섰다. 스무 살 이상 지원자는 화순중학교에 마련된 임시 훈련장에서 의용군 제식훈련을 받았다. 그런 뒤 담양 지실마을(남면 지촌리) 합숙소로 이동했다. 김보순 씨는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무등산 북쪽 원효사와 동쪽 서봉사 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 되어 떨어지는 지촌리는 식영정과 환벽당, 소쇄원이 '일동삼승(一洞三勝)'을 이루는 명승이다. 증암천을 경계로 충효동(광주광역시 북구)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던 김덕령 장군을 낳았고, 지실의 여러 정자와 누각에선 송강 정철이 수학하며 가사문학을 꽃피웠다. 김 씨는 이곳 지실에서 여러 날을 지낸 뒤 노란색 의용군 군복을 지급받았다. 역사의 질곡에 내던져질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르께한 피복을 받아 안자 완장을 찬 듯 뭔가 으스댄 기분이었다.
낙동강 '8월 공세'(1950년 8월 4~25일)가 한창이던 때 이들은 무슨 영문에선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곧장 북으로 향했다. 보름달이 훤히 뜬 8월 15일 지실을 떠나 전북 진안으로, 경북 안동과 태백산을 넘어 동해안 철로를 타고 북으로 쭉 거슬러 올라갔다. 한반도의 등허리를 끼고 강원 통천에서 원산으로 다시 함흥을 거쳐 러시아와 맞닿아 있는 함경도까지 다다랐다. 남도의 땡볕이 어느새 서리가을(서리가 내리는 늦가을)로 바뀌어 앞으로 닥칠 맹추위를 예고했다.
함경도의 겨울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혹한의 추위는 영하 30도를 밑돌고, 허벅지까지 쌓인 눈에 고립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조선초 함경도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가 시조 '호기가(豪氣歌)'에서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라고 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춥고 오지라는 삼수갑산(三水甲山)도 이곳 함경도에 위치해 있다. 함경도에서 겨울을 나는 것만으로도 이들에겐 극한 훈련이었다.
1950년 12월, 드디어 출정식이다. 거친 눈보라를 뚫고 남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강원도에 이르자 의용군이던 신분은 인민군으로 편제가 바뀌었다. 비로소 북한 정규군 소속이 된 것이다. 샛노란 의용군 복장에서 그럴싸한 인민군 동복이 주어진 것도 이때다. 남으로 진군하는 내내 고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렘과 전투에 참여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동부전선, 그리고 포로가 되다
9·28 수복의 설욕전은 매서웠다. 중공군의 합류와 소련제 무기를 앞세운 이들의 전투력은 막강했고, 거침없는 남진에 국군은 또다시 패주해야만 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을 잇는 'D 라인'에서 재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이른바 선더볼트(Thunderbolt) 작전(1951년 1월 25일~2월 20일)이다. 1월 25일 경기도 수원·이천 방어선을 돌파하며 작전이 시작됐고, 안양과 군포를 잇는 수리산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용인, 삼척 등을 빠르게 수복한 유엔군은 2월 20일 관악산을 점령했다. 이에 앞서 2월 10일 만조에 맞춰 전개된 2차 인천 상륙 작전 성공은 재반격의 모멘텀(momentum)을 만들어줬다.
1951년 1월 1일 '신정공세'(중공군 3차 대공세)로 남하한 김보순씨는 강원도에서 출발해 1월 중순 소백산 어깨너머 충북 단양까지 진입했다. 북한군은 춘천에서 홍천(집결지)으로, 다시 횡성·원주·제천·단양·풍기·예천·안동(집결지)을 거쳐 마지막 의성까지 남진했다. 그 선봉에 인민군 10사단이 있었다. <호국경찰전사>에 따르면 춘천·원주·대구를 잇는 선으로 침투한 10사단은 대구 팔공산 침입에 실패한 뒤 청송 쪽으로 북상해 퇴주했다.
한국현대사의 권위자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예천 산성동 미군 폭격 사건과 관련한 자신의 논문에서 인민군 10사단이 경북 예천군 학가산(882고지)까지 주둔했다고 전했다. 도 교수는 이외에도 북한 2사단과 5사단 일부 병력이 인근 지역을 결집 장소로 활용했다고 주장했다. 김보순 씨는 자신의 인민군 소속과 관련해 "사단은 모르겠고, 3대대인 것만 기억난다"고 말했다.
북한군은 원주·제천·단양·풍기로 이어지는 주공급로를 장악하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려던 연합군의 전선이 다시 후퇴하게 되고, 비교적 안정적인 서부전선마저도 크게 흔들릴 수 있다. 1951년 1월, 충북·경북을 아우르는 소백산맥 지대가 한국전쟁의 승패를 가늠하는 격전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유엔군의 화력이 집중된 동부전선은 미美 10군단이 작전을 총괄했다. 1월 중순 10군단장 에드워드 M. 아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한국군 8사단을 황강(제천), 2사단을 단양, 5사단을 영주에 배속시켰다. 또한 미군 7사단과 187공수연대 전투단도 함께 배치했다. 이들은 한겨울 북한군이 은거할 수 없도록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미8군 사령관 매슈 B. 리지웨이 중장은 1월 5일 "네이팜으로 마을을 소각하는(napalming of villages)" 작전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1월 19일 예천 산성동 미군 폭격 사건과 20일 단양 곡계굴 미군 폭격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민간인 피난민 500여 명(산성동 350여 명과 곡계굴 150여 명)이 미 전투기의 네이팜탄과 기총 사격에 의해 희생됐다.
"나는 중공군이 점령한 지역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서 만행은 거의 없었다 (생략) 당신들은 군대를 보호하기 위해 전적인 권한을 가진다. 그러나 적에 점령되지 않았던 마을이나 도시를 기총소사나 폭탄으로 무제한 파괴하는 것까지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중공군 점령 지역에 민간인 피해가 없음을 뒤늦게 안 리지웨이가 휘하 군단장에게 내린 지시문이다. 이러한 명령은 서울을 재탈환한 뒤 38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고착화된 1951년 3월에서야 이뤄졌다. 한반도에서 핵무기 사용을 주장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경질되고 리지웨이가 그 후임이 되기 바로 한 달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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