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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피해자가 예방할 수 있는 성폭력은 없다"

[격월간 민들레]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선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일

요즘 대한민국에서 '아이 성적 올리기 특강'만큼이나 인기 있는 것이 '부모 성교육'이다. 학교나 각종 공공기관에서는 성폭력 예방을 위한 의무교육도 매년 시행하고 있다. 덕분에 나도 늘어나는 상담과 강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강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성폭력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분들에게 일부러 "왜 절대 성폭력을 당하면 안 될까요?"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면 "피해를 입으면 불행해지니까", "이후 사회생활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낙인이 생겨버리니까"라는 대답들이 돌아온다.

그 대답을 들으며 몇 년 전 만났던 한 아이가 문득 생각났다. 중학생이던 그 아이는 하교 후 집에 도착해서야 깜빡하고 열쇠를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님이 오실 때까지 두세 시간이 남았고, 아이는 어려서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던 옆집 아저씨 집에 가서 부모님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 아이는 삼촌이라는 그 이웃 남자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사건 조사는 의외로 순조로웠다. 가해자는 모든 것을 자백했고, 취업제한제도(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성폭력 가해 행위를 한 경우, 아동 청소년 시설에 근무하는 것을 제한하는 제도)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그런 어려운 일을 겪고서도 아이는 참 예뻤다. 지각 한번 없이 꼬박꼬박 상담소에 와서 심리상담을 받았고 학교생활도 무리 없이 잘 해냈다. 하루는 짝사랑하던 남자아이와 연애를 시작했다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건에 대한 상처가 치유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상담 시간 내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물과 두려움의 대상은 다름 아닌 아이의 부모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갖고 있다. 피해자가 늦은 시간에 돌아다녀서, 피해자가 술에 취해 있어서, 피해자가 야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혹은 피해자가 남자 혼자 있는 집에 방문해서 일이 일어났으니 피해자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이것을 '순백의 피해자'라고 한다. 피해자는 그 어떤 결점도 없어야 한다는 통념이다). 뿐만 아니라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시선을 매우 불쾌해하면서도 '남자는 원래 여자보다 성 욕구가 강해서, 충동을 제어하기 어려워서'라며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통념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피해 '이후'의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성폭력 피해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우울, 불안, 자살 시도, 남자에 대한 두려움, 대인관계의 어려움' 등을 떠올린다. 그래서 피해자가 학업을 중단하지 않거나, 회사를 계속 다니거나,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 심지어 연애까지 하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다. 성폭력 피해를 입었는데 어떻게 멀쩡히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가고 사랑을 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이 아이의 부모도 다르지 않았다. 딸이 울고불고 힘들어하고 학교도 다니지 않고 남자라면 벌벌 떨 줄 알았는데, 학교도 잘 다니고 남자친구까지 사귀니 '얘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남자친구에게 선물을 받아온 날 아이에게 "너 걸레니?"라는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분명 용기를 내고 있었다. 힘을 내어 자신의 생활을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모의 그 발언 이후 아이는 우리가 흔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아이는 두려워했고, 눈물을 흘렸다. 아이의 삶을 이전과 다르게 바꿔놓은 것은 성폭력 사건이었을까, 아니면 그 사건을 대하는 부모의 자세였을까.

"성폭력인 줄 몰랐어요"

한 무리의 남학생들과 교육실에 둘러앉아 상담을 했다. "선생님, 우리가 잘한 건 아니지만, 솔직히 억울해요." 사연인즉슨, 마음에 드는 아래 학년 여자아이가 있어 번호를 알아내서는 방과 후에 만나자고 문자를 보냈더니 그 아이가 정말 약속 장소로 나왔단다. 이래저래 인사를 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호기심에 성관계를 제안했더니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 아이를 강제로 끌고 오거나 협박하지 않았고, 심지어 의사를 물었는데도 싫다고 하지 않아 동의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신들을 성폭력범으로 몰아가는 것이 속상하다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는 흔히 성폭력이라고 하면 모자를 푹 눌러쓴 험상궂은 사람이 누군가를 납치해서, 혹은 흉기로 위협해서 강간하는 장면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성폭력의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성폭력이라는 단어에서 '력(力)'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체적(물리적) 힘, 두 번째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 세 번째는 지적 능력이다. 결국 성폭력이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힘의 차이를 이용하여 상대의 동의 없이 성적인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신체적·물리적 힘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성폭력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지위나 지적 능력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성폭력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몇 해 전 피자집 아르바이트생이 사장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하고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뉴스로 접하며 매우 안타까워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싫으면 싫다고 했어야지, 왜 말을 못 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밀그램 실험'(미국의 심리학자 밀그램은 실험을 통해 대부분의 인간은 비합리적인 권위일지라도 그에 복종한다는 것을 밝혀냈고, 그럼으로써 인간사의 수많은 비극의 시원적 원인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에게 권위가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왜 거절하지 않았느냐고, 왜 저항하지 못 했냐고 다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지적 능력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역시 마찬가지다. 일부 성폭력범들은 유아, 아동을 범행의 타깃으로 하는데 "우리 집에 강아지가 있어. 재밌는 장난감이 있어"라는 말로 쉽게 유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놀랍게도 어른들은 아이에게 "그러게 거길 왜 따라갔니?" 하고 나무라듯 말한다. 아이의 지적 수준에서는 강아지나 장난감에 이끌렸을 뿐, 그곳에 따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아이에게 책임을 추궁하게 된다.

나와 상담한 이 남학생들의 경우 또한 고학년들은 학년 그 자체로 권력이 된다는 것을, 한 명의 여학생과 여러 명의 남학생 사이에는 견줄 필요도 없이 신체적 힘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 여자아이는 성관계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 현저한 권력의 차이, 신체적 힘의 차이로 인해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성폭력을 당하지 않을 비법 같은 것이 있을까? 아니, 그런 방법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가해 행동을 하지 않거나 성폭력 피해를 인지하고 그에 대처해나갈 방법은 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 성폭력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교육이 끝나는 날 아이들은 말했다. "선생님,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정말 이게 성폭력인 줄 몰랐어요. 그것만은 믿어주세요." 성폭력이 무엇인지 이 학생들이 진즉 알았더라면,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자리가 미리 있었다면 이들이 가해자가 되는 일도, 또 한 명의 피해자가 생겨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성폭력을 예방할 길은 없지만…

나름 '아이를 자연에서 키워보겠노라' 하고, 올해 2월 시골로 이사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스쿨버스를 탈 경우, 마지막 코스가 될 것이 빤한 이 외진 곳까지 아이와 버스기사 둘이서 오갈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래, 초등학교 때까지는 내가 등하교시켜주지 뭐' 하고 생각해보니, 중학생이 되면 상황은 더 난감해질 것 같았다.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먼 읍내에 있어 결국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택시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하는데, '아니, 중학생 딸이 택시기사와 단둘이 택시를 탄다고? 매일?' 하는 생각에 이르자 두려움은 두 배가 되었다. 고등학생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기숙사에 두는 것도, 택시를 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휴, 애들 대학 갈 때까지는 무조건 내가 운전을 해야겠고만…" 했다. 자연에서 자유롭게 키우겠다던 내 다짐은 어디로 갔을까? 호기롭게 시골로 이사 왔던 나는 고작 6개월 만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불안해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왜 성폭력을 당하면 안 될까요?" 하고 강의에서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나를 두렵게 만들던 것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성폭력을 당하면 이후 아이의 삶은 끝장날 것'이라는 생각, 그 통념이 내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통념을 마주하고 보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강사 생활을 하며 계속해서 생각을 수정하고 있었고 이제는 많은 부분이 깨졌다고 나름 자부했건만, 가슴 깊숙한 곳에는 여전히 뚜렷한 통념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스쿨버스를 타지 않는다고, 택시를 타지 않는다고, 자취를 하지 않는다고 성폭력을 당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물론 스쿨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자취를 하면서도 성폭력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피해자가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아무리 신호와 적정 속도를 잘 지키며 운전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내 차에 충돌해버리면 사고가 나는 것처럼, 성폭력은 예측할 수 없는 사고 같은 것이다.

강의 자리에서 그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 것도 실은 나 자신이 갖고 있는 두려움에 대한 도전 같은 것이었다. 사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아이가 겪을지도 모를 성폭력 자체가 아니라 내 뿌리 깊은 통념, 그리고 그 통념을 제어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가 성폭력을 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아이가 자신의 생을 잘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예방할 수 없는 성폭력이나 위험을 막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아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아갈지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게 더 현명한 길이 아닐까.

아직은 그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지만, 나름대로 정한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아이의 문제를 (아이가 요청하기 전에, 혹은 요청한 수준 이상으로) 내가 풀려고 하지 않을 것, 그리고 아이에게 하루에 한 번 꼭 끌어안으며 "네가 일등을 해도 꼴등을 해도, 네가 건강해도 아파도, 네가 행복해도 슬퍼도 언제나 너를 사랑해" 하고 속삭일 것을 결심하고 열심히 실천 중이다. 이 작은 실천이 아이가 겪을지도 모르는 성폭력을 차단할 수는 없겠지만,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아이가 자신의 가치는 그 무엇에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당당히 삶을 이어갈 수 있길 바라며 말이다.

얼마 전부터 다섯 살 딸아이가 하도 심술궂게 행동하고 내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참다 참다 화를 낸 적이 있다. "너는 왜 꼭 엄마가 화를 내게 만드니?" 했더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엄마가 저를 잘못 키워서 그런 거 아닐까요?" 순간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아이에게는 많은 일들이 펼쳐질 것이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아파하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꿋꿋이 살아낼 아이에게 훗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나, 너 잘 키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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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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