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은 국가 형성의 근대적 원리 탐구를 주요 테마로 삼고 있는 정치학적 텍스트지만, 논의의 출발은 인간론이다. 홉스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을 신체와 정신 능력에서 평등하게 창조했다. 예컨대 때때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신체 면에서 분명히 더 강하고 또는 기민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발견될지라도 모든 것을 합하여 평가한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이는 (…) 큰 것이 아니다"(홉스, <리바이어던>, 제13장).
신체적으로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연합을 통해 강한 자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이 있다. 정신적 능력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예외적 탁월함을 얻은 사람은 드물고 대체로 동등하게 부여된 시간 속에서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홉스는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홉스는 이러한 평등을 불신하는 태도야말로 헛된 자만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리바이어던>은 인간을 이처럼 평등한 능력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생명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기적 욕망의 존재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 근대, 근대적 정치성의 중대한 원리를 관찰한다. 근대는 욕망을 향한 이기적 존재들이 살아가는 곳, 욕망의 실천을 향한 치열한 대결이 일어나는 곳이다. 홉스의 유명한 명제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이유다.
하지만 그 이기적 근대인들은 단순히 자기 욕망의 특수성에 굴복하지 않는다. 모두의 욕망을 조화롭게 실현하려는, 특수성 혹은 개별성 바깥의 원리가 태생적으로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법(natural law)의 형식으로 이념화되어 있고, 사회계약(social contract)으로 구현된다. 자연법적 보편성을 따르는 사회계약은 권리의 상호양도를 통해 전체를 구속하는 정치규범을 확보해낸다. 이기성이 윤리성의 토대 위에 서는 순간이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서구의 정치적 근대와 민주주의 탄생을 추적하면서 그 핵심에서 공중(public)의 원리를 발견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부르주아로 불린 공중은 이중적 존재다.
"사인으로서 부르주아는 한 몸속의 둘이다. 즉 그는 재화와 사람에 대한 소유자인 동시에 다른 인간들 중의 한 인간이다. 그는 부르주아이자 인간이다."(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제2장).
해석하자면 공중은 자신만의 특수한 물질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개별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사적 이익의 문제를 모두에 관계되는 공동의 원리로 전환해 낼 사유력과 윤리성을 지니고 있는 보편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한쪽에는 개별자의 이기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 다양한 이기성이 공존할 수 있게 하는 보편적 이념이 작동하는 것, 이것이 정치적 근대의 얼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는 탐욕의 수치스런 시대이면서도 인류의 진보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여전히 미완이다
해방 이후 한국은 근대를 향한 꿈을 꾸어왔고, 1960년대부터 거대한 국가적 동원 체제를 기반으로 근대화 프로젝트를 맹렬하게 추진해왔다. 미국에서 수입한 근대화 이론이 핵심 가이드라인이었다. 한국은 전통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없앴고 그 자리를 서구적 물질과 정신으로 대체해왔다. 그 결과 근대성의 가시적 지표들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산출했고 이제 더 이상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이 아니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근대의 기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을까? 한국의 근대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960년대와 70년대는 사회경제적 근대를 목표로 삼았을지언정 정치적 근대, 철학적 근대, 인간학적 근대와는 거리가 먼 시대였다. 한국의 근대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의 실현을 자연적 권리(natural right)로 내면화하는 개인을 잉태하지 못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욕망의 주체로서 개인을 조형하지 못했다. 진실은 그 반대편에 있었다. 개인주의 혹은 자유주의는 멀리하고 경계해야 할 부정적인 가치로 평가절하 되어 왔고, 근대화 과정 속의 개인들은 국가와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억압해야 하는, 희생을 미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윤리의 담지자들이었다.
한편, 그러한 국가주의적 개인, 공동체적 개인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형태의 기묘한 개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경제적 근대화 달성을 위한 압축 전략의 수혜자들인 그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향유하고 있다. 그들은 더 많은 물질을 향한 욕망을 억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이 온전한 의미의 개인인가? 불행하게도 그 개인들은 자연법적 이념, 사회계약의 이성, 공론을 위한 보편적 의지를 결여하고 있다고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본질적으로 서구적인 것의 모방이었다. 하지만 모름지기 서구적 근대를 충실히 따른다고 생각했다면 근대적 물질성만이 아니라 근대적 정치성과 이념성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어야 했다. 개별자들의 무한한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 욕망들의 보편적 조화라는 정치적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앞서 우리가 살펴본 홉스와 하버마스의 근대인을 창조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여전히 미완이다.
새로운 근대화 기획은 참된 개인을 형성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개인들을 모든 면에서 온전한 주체로 승인하는 사회적 윤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자면 일종의 정치적 사고 실험이 필요하다.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사상해버리는 실험이다.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시작되는 사회적 실험이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한 개인주의를 체화한 존재들이 보편성의 토대 위에 서도록 하는 노력이 따라 나와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 담당해야할 과제다. 우리의 정치는 개별자들의 고유한 결들에, 그들의 다채로운 욕망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더불어 그 개인들이 고립적 세계로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윤리성의 세계 구축을 실천해야 한다. 교육도, 경제도, 문화도 모두 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의 정치는 개별성과 보편성이 교차하는 사회를 향한 상상력의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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