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코리아컨센서스연구원(KCI, 원장 : 백준기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과 <프레시안>이 '문재인 정부 100일'을 맞아 그간 보여진 정부 정책 역량과 국가 전략의 체계성을 가늠해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문재인 정부 100일을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일 수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적폐' 중 당장 시급한 문제들을 걷어내는 작업이 국가 전략 구상과 함께 진행돼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KCI는 문재인 정부의 '개혁 의지'를 평가함과 동시에 향후 정부가 추진해야 할 과제와 관련된 '제언'에 집중해 보았다.
지난 8월 21일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의원과 함께 연 '문재인 정부 100일 주요정책 평가' 세미나를 통해 발표된 전문가들의 견해를 지면에 소개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여러 정책분야 중 비교적 주목을 받고 있는 세 분야(환경·에너지/경제·일자리/외교안보·남북관계)에 한정하여 각 분야별 두 편씩 총 6회에 걸쳐 평가하고자 한다.편집자
새 정부의 과제는 한국 보수 정부의 흡수통일 전략과 오바마 행정부의 동맹 우선 전략의 묘한 조합이 만들어낸 ‘전략적 인내’ 정책의 인식적 전제를 비판적 극복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전략적 인내는 클린턴, 부시 행정부 16년간의 북미 대립의 결과를 결산하고 이로부터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대북 정책이었다.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대한 미국의 학습효과는 한편으로는 ‘노 레드라인’ 정책 즉 무시정책(neglect policy)으로 입안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정권 붕괴에 대한 희망을 다자적 제재 레짐으로 포장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전략적 인내는‘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인식에 전제해 다자적 제재라는 방법론을 실현하기 위해 소위 무시 전략을 정교화시킨 것이었다. 이 점에서 전략적 인내는 단순한 대북 ‘정책’이 아니라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철학과 북핵/북한 문제에 대한 미국의 역사적 평가와 북한정권에 대한 인식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대북 독트린이었다.
한미 양국의 신 정부가 전략적 인내를 실패로 규정한다는 것은 이 점에서 한미의 대북 인식과 접근법 그리고 대안 등 모든 것에서 변화를 동반하는 총체적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미의 대북 정책은 이같은 근본적 변화를 동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유보적 평가가 다수이다.
전략적 인내의 실패와 3가지 전제
전략적 인내를 실패로 보고 그 대안을 모색한다면 전략적 인내의 세가지 전제가 수정되어야 한다. 북한과의 협상보다는 무시 전략을 가능하게 한 3가지 전제는 북한 정권이 비합리적이고 북한의 행태는 예측 불가능하고 북한 체제는 시간이 지나면 붕괴한다는 3가지이다.
첫째, 북한은 합리적 정권인가? <뉴욕타임즈>가 이미 지적했듯이 북한 정권은 자기 이익을 정확하게 이해할 능력이 있고 심지어 무모해 보이는 도발마저도 상대방과의 협상을 위해 의도적으로 무기화하고 있을 만큼 북한의 정책 결정 과정은 합리적이다. 김정은 광인(mad man)이라기 보다는 ‘합리적 광기’(Rational Irrationality)라는 개념으로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위자이다. (<뉴욕타임즈>는 2016년 9월 10일, “미치긴 커녕, 너무 합리적”(far from crazy, too rational)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북한을 비합리적 행위자로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둘째는 ‘예측 가능한 예측 불가능성’(Predictable Unpredictability)이다. 주류 언론들이 북한의 도발을 예측 불가능한 김정은의 괴벽 탓으로 돌리지만 실제 북한의 도발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만들어진 관념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북한은 쟁점을 둘러싼 (물밑) 협상이 결렬될 경우 이에 대한 반응으로 도발이라는 옵션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공산독재국가나 귄위주의 체제의 최고 지도부는 공식 협상보다는 비공식 협상에 더 많은 가중치를 주는 경우가 많고 이점 때문에 공식적인 협상만 관찰하는 학자들에게 권위주의 체제의 행태는 예측 불가능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지나서 공식 비공식 접촉을 모두 복기해보면 북한의 행태는 매우 단순한 tit-for-tat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곧 새 정부가 지난 정부의 비공개 접촉을 모두 복기, 평가할 때까지는 북한의 정책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은 독재국가의 ‘레질리언스'(resilience, 회복력, 탄력성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이다. 살아남은 권위주의·독재국가들이 생각보다 레질리언트하게 반응하는 것을 본 정치학자들은 최근 이들 국가에 대한 제재가 곧 레짐 붕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북한 역시 오랜 제재를 견뎌낸 노하우가 있고 잔인한 권력정치의 결과도 예상과는 달리 권력 안정성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결국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도덕적 정당성은 현실 국제 정치와 남북관계에서 신기루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이 세가지 전제를 극복하지 않는 한 신 정부나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지난 10년과 큰 차이를 갖기 어렵다는 뜻이다. 북한의 비합리성과 정치잔혹극을 핵심으로 하는 북한 예외주의에 대한 대안적 개념들을 발견, 적용하지 않는 한 대북 정책의 실패는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
비대칭 위기와 전략적 비전의 일관성
문제는 지금의 대북 정책 실패는 보다 더 큰 위기 신호를 안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10년 무시 전략의 결과 북한에 대한 정보 실패를 경험한 우리의 당혹감은 상상 이상이다. 북한의 비대칭 전력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충돌이 가져올 위기의 크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이젠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대북 ‘정책’에서 숙적관계(rivalry)에서의 탈피가 불가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보전략에서도, 남북관계에서도, 경제 수준에서도 남과 북은 각기 다른 수단에 의한 미래를 그리는 비대칭전략을 수용할 때가 되었다. 이를 억지로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끌어들여 이기고 지고의 제로섬적 패러다임으로 전락시킬 이유가 없다. 숙적관계의 탈피는 곧 상호성의 승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수위를 갖지 못한 새 정부의 100일은 과거 정부의 30일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아직 새 정부의 대북 정책이 관료들 간의 프레임 통합을 만들어 낼 여유가 없었음은 사실이다. 따라서 지난 10년을 이끌어 온 전략적 인내의 인식적 전제를 단기간에 탈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상황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엄중하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것은 최고 정책 결정자의 전략적 비전이다. 그것이 일관된 신호를 가질 때 국제 정치 권력들의 질서 재편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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