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표한 '2017년 상반기 한국영화산업' 보고서에 의하면, 2017년 상반기 한국영화 최고흥행작은 <공조>이다. 이 영화의 흥행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북한관련 소재가 여전히 관객에게 흥미를 끈다고 할 수 있다. <V.I.P.>는 <공조>에 이어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V.I.P.>를 연출한 박훈정은 홍콩영화 <무간도>(2002)에서 주요 설정을 가져 온 <신세계>(2012)를 통해 흥행감독으로 부상했다. <V.I.P.>에서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썼던 <악마를 보았다>(2010)의 설정을 가져왔다. 북한 최고위층 김모술의 아들 김광일을 연쇄살인을 벌이는 사이코패스로 설정한 것이다. 북한을 소재로 한 이전 영화와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이었겠지만, 이 영화의 무리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김광일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부하들을 데리고 무차별 살인행각(흔히 사이코패스는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혼자 범행을 저지른다고 알려져 있으나 김광일은 그렇지 않다)을 벌인다. 미국인 폴(CIA 요원으로 추정되지만 끝내 소속이 명시되지 않은 채 이름만 알려지는 인물이다)은 김광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고 싶어 한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뉴욕 같은 곳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지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고 보고 국정원 요원 박재혁을 이용해 김광일을 미국이 아니라 남한으로 데려오도록 기획한다. 박재혁은 공을 세워 승진을 하려고 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부하들과 함께 남한에 온 김광일이 계속 연쇄살인을 저지르자, 열혈 경찰 채이도가 사건을 맡게 된다. 여기에 북한에서 김광일 사건을 수사하다 부하들과 함께 쫓겨난 평안북도 보안성 소속 리대범이 가세한다.
이 영화의 핵심 아이디어는 ‘북한에서 온 VIP 살인마’를 놓고, 국정원 요원은 보호하고 경찰은 잡으려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김광일이 범인으로 체포되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김모술이 관리하는 중국쪽 평양계좌에 대한 정보 때문이다. 폴은 그게 왜 그렇게까지 중요한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그가 개인적으로 돈을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일을 벌인 것 같기도 하다. 미묘하게 그런 인상을 준다면, CIA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따르는 심적 부담을 덜 수 있다. 박재혁 또한 이상하게도 김광일이 김모술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알뿐 살인행각은 인지하지 못한다. 국정원의 고위간부조차 그에 관련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데, 이러한 설정에서 국정원을 다룰 때의 난처함이 드러난다.
다음 문제는 뭔가 새로운 시도로 보이는 설정을 한 다음, 인물들은 판에 박힌 캐릭터이거나 모호한 캐릭터로 묘사한 것이다. 김명민이 연기한 채이도는 한국영화에서 주변의 눈치 안보고 오로지 수사에만 몰두하면서 폭력을 남발하는 열혈 경찰(또는 형사)의 전형이다. 리대범은 남한에만 오면 전지전능하게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주도면밀하게 행동하는 북한 정보부 출신 캐릭터를 반복한다. 김광일은 클래식을 들으며 독서에 몰두하다가 미소 띤 얼굴로 우아하게 낚싯줄로 희생자의 목을 감는 엽기적인 모습을 연출하지만, 별로 새롭지 않다. 김광일을 연기한 이종석은 소름끼치는 사이코패스로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아쉽게도 단 한 순간도 섬뜩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장동건이 연기한 박재혁과 피터 스토메어(코엔 형제의 <파고>에서 너무나 인상적인 살인마를 연기했던 배우)가 연기한 폴은 국정원과 CIA의 요원이기 때문인지 모호한 인물들이다. 특히 박재혁이 비밀리에 홍콩에 건너가 자신의 손으로 김광일을 제거하는 장면은 개인적인 복수인지 국정원의 명령인지 알 수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에서, 폴이 왜 그렇게 질 나쁜 행태를 보이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는 이야기를 완결했으면서도 매듭을 짓지 못한 채 막을 내리는 느낌이 든다. 채이도는 혼수상태로 병실에 누워있고, 박재혁은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는 채 자동차를 타고 홍콩거리를 달리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야기의 설정과 플롯의 구성이 미흡하고 일차원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연출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박훈정은 복잡한 이야기와 얽히고설킨 인물들을 느린 템포로 연출해나간다. 빠른 템포보다 느린 템포의 연출이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으나 리듬 감각이 결여되면 지루한 연출로 전락한다. 그 한계를 가리기 위해 불필요하게 잔인한 설정과 잔혹한 이미지를 나열하고 여기에 욕설의 남발과 폭력과 흡연 장면을 지나치게 많이 삽입한 것 같다(그리고 빠짐없이 자동차 추격 장면을 스펙터클로 첨가한다). 왜냐하면 거기서 폭력을 다루는 어떤 문제의식도, 추구하려는 어떤 주제의식도, 액션 장면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V.I.P.>를 두고 이렇게 조목조목 비판하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 최근 한국영화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진흥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2016년과 비교했을 때 2017년 상반기의 전체 극장 관객 수는 증가했으나 한국영화 관객 수는 감소했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흥행영화를 들여다보면, 외국영화는 장르도 다채롭고 극영화에서 애니메이션까지 다양한데 비해, 한국영화는 범죄 영화에 쏠리는 등 특정 장르에 대한 편중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만일 여기에 한국영화 관객이 감소한 한 요인이 있다면, <V.I.P.>를 비롯한 한국영화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되돌아보고 개선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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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영화평론가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동국대와 중앙대에서 영화이론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YU HYUN-MOK>(2008),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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