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아이들은 교복 치마를 허벅지까지 올리고 이쪽 다리를 꼬았다, 저쪽 다리를 꼬아 올렸다 하면서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들었을 리 만무하다. 교실 뒤 게시판만 보고 수업하던 교생 선생을 힐끔거리며 키득대느라 뭘 배우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담임에게 들켰고 조금 적나라하게 장난을 치던 몇몇은 호되게 혼이 났다. 맞는 것은 아프지 않았으나 선생님이 던지는 말들은 치명타였다. "걸X 같은 년들", "창X냐?", "너네 술 따르고 살 거야?" 그 모든 처형의 말미에는 '미친X들'이 서술어처럼 붙었다. 치마 좀 올린 게 뭐라고. 샤론 스톤보다 10센티미터는 덜 올렸구먼. 당시엔 그 영화를 제대로 본 녀석도 하나 없어서 정말로 샤론 스톤이 술집 여자로 나온 줄 알았다. 그때까지는 억울함을 가진 만큼 당당하기도 했다. 눈물 따위 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그날 혼난 거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건 이후 남자 선생님들은 "니들이 치마 올린 년들이라며?" 하면서 대놓고 수업 중에 어깨를 만지고, 허벅지를 툭 치고, 등을 훑어 내리고, 왜 자기 수업 시간엔 안 하냐면서 "나도 좀 보자"라고도 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챈 여자 선생님들은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그런 취급 안 당한다"라는 말을 위로랍시고 했다. 동참하지 않았던 친구들은 괜한 피해를 입고 있었기에 투덜댔고, 창녀 취급당한 아이들끼리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뒤에 모여 선생님들한테 당한 일을 성토하고 그들의 흉을 봤다. 그러다 한 명이 울기 시작했고, 일순간 모두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그제야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그런 우리를 보던 한 친구가 "그러게 왜 그딴 짓을 했느냐“며 혀를 끌끌 찼다. 그나마 세상 이치를 일찍 깨우쳤던 그 친구의 코웃음은, 숙맥 교생보다 우리가 더욱 우스운 꼴로 전락할 거라는 것도 예측 못 한 순진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여중생이던 우리의 '장난'은 그렇게 우리 몸을 드러내는 일의 위험을 스스로 학습하면서 정리됐다. 우리는 더 이상 몸으로 장난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들이 수업 중 집단으로 성기를 드러내는 등의 음란 행위를 했다는 기사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성폭력으로 규정했으며 적절한 처벌과 실효성 있는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교육청은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영웅 심리에 따른 학생들의 장난"이라고 해석했다.
모든 폭력은 사실 장난이라는 단어의 이면이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들의 행위가 명백히 성폭력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이 아이들이 스스로의 행위를 '장난'이라고 말한 그 심리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래, 장난이었을 수도 있지. 다만 그 시기 자기 몸을 최대한 활용하는 그 심리를 해석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고작 장난이라는 단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왜 여중생의 장난은 성매매의 길로 가는 일이고, 남중생의 장난은 영웅 심리의 발현으로 해석되는 것일까. 그래서 이후 그 남학생들은 장난한 대가로 성적 농담과 희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까, 아닐까.
해당 학교는 사건의 학생들에게 5일의 특별 교육 이수를 명령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솜방망이 처벌이라며 분노했다. 나는 이 결정이 솜방망이가 될지 아닐지는 교육 내용에 따른 이후 다시 평가하고 싶다. 일단 그들이 중학교 1학년이기 때문이다. 논란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사춘기 아이들임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아이를 어른과는 달리 순진무구한 백치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고, 또한 청소년은 오직 보호의 대상이라고 설파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질풍노도의 시기라 그 어떤 정신 나간 짓들도 쉬이 하기 마련이라면서 그들의 행위를 옹호하기 위함도 절대 아니다. 나는 사춘기를 호르몬 폭탄의 시기라고만 해석하는 것도 싫어한다.
오히려 사춘기란 세상 돌아가는 온갖 편견과 억압적 규율들에 노출되는, 그 와중에 자신이 살아갈 만한 지점을 찾아가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사춘기가 중요한 것은 호르몬이 남자를 더 남자답게, 여자를 더 여자답게 만드는 시기여서가 아니라 일명 세상 이치와 '나'라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자기와의 절충점을 마련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 아닐까. 즉, 세상 이치를 내재화하는 첫 번째 결정적 시기라는 점에서, 무수한 모험과 시도들을 통해 좋은 것, 나쁜 것 모두를 배운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디까지 되는지 안 되는지 자기 한계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니 자신의 허벅지나 성기를 꺼내서 선생을 골려 주겠다는 심리, 그 행위란 일종의 자기 실험과도 같다. 누군가는 자기 몸을 활용해도 고작 허벅지고, 누군가는 성기라는 사실이 현실의 세상 이치를 이미 반영한다. 누군가는 대상을 유혹해야 한다고 여겼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 몸을 전시하려 했다는 사실이 세상 이치를 담고 있다. 또한 부모에게 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입장과 부모들이 나서서 해당 기사의 삭제나 변경을 요구하는 차이 역시 세상 이치를 따른다. 누군가의 미래는 그 장난과 함께 처참하게 예언되고, 누군가는 그들의 미래를 고려해서라도 장난은 더욱 장난으로만 남아야 한다고 배려받는 것 역시 세상 이치의 결과다.
특별 교육 5일. 그들에게 이 세상 이치를 다시 반복하여 알려 줄 5일이 될까? 이런 세상 이치가 사실은 여성 혐오와 잘못된 젠더 인식에 기반해 있음을 알릴 5일이 될까? 사내다운 장난 한 번에 재수 없이 5일이나 특별 교육을 받았다며 억울해하는 경험이 될까? 그 장난이 정확하게 젠더 인식의 잘못된 편견 위에 있기에 옳지 못했다고 배우는 기회가 될까? 특별 교육이 평범한 우리네 인식을 반복한다면 의미는 없는, 허울만 특별한 교육이 될 테고 평범한 일상을 성찰하고 의심하는 '특별한' 경험이 된다면 그제야 세상이 좀 바뀌겠지 싶다. 세상 이치란 따라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배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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