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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와 '맥도날드' 문제, 인간의 폭력이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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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와 '맥도날드' 문제, 인간의 폭력이 낳았다

[함께 사는 길] 동물을 먹는다는 것 ③ '모두의 문제'로 공론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영화 <옥자>(봉준호 감독, 2017)는 반려동물, GM 푸드, 동물 공장이라는 세 가지 테마를 하나의 서사로 융합하며 동물과 우리가 맺는 관계라는 문제를 우리가 차리는 식탁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내게는 반려동물인 동물을 누군가는 먹는 현실(한국과 중국의 개고기 식용 현실)에 대한 훌륭한 알레고리이기도 하지요. 반려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감금된 동물들을 바라보자는 도발적 제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 <괴물>(봉준호 감독, 2006)의 상상력으로 탄생된 GM 수퍼피그를 기대했던 저로서는, 약간은 진부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묵시록적인 시에 대한 기대는 지나친 기대였을까요?

다수의 피해자와 소수의 이익집단

아트로서는 성공작이 못 되어도 사회운동 촉매제로서는 성공작이었는지, 동물권 단체인 카라(KARA)는 '옥자'에 환호하며 '봉준호 감독×카라의 '옥자' 해방 프로젝트'를 시작해 시선을 끌고 있습니다. '감금 틀 금지 10만인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이를 기초로 돼지 스톨 등 감금 틀 사육 금지를 위한 입법 청원을 하겠다는 것이죠. 지난 7월 4일의 풍경입니다.

한편, 7월 5일 HUS 사건이 터집니다. 한 여성이 자기 아이가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은 뒤 용혈성요독증후군(HUS)에 걸렸다며 '맥도날드' 한국지사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 사건입니다. 법원의 합리적인 판결을 주문합니다.

그런데 판결 결과와는 상관없이, 피해자의 문제 제기는 '옥자'의 문제 제기와 동궤의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 여기 살고 있고, 왜 누구를 위해 죽어야 하는지 모른 채 살상당하는 어느 네 발 달린 포유동물의 운명이 '옥자'에 있다면, 이 동물의 살점을 갈아서 빵에 적합한 물질로 만들어 먹는 현대 육식인(人)의 민낯이 '맥도날드' 고소 사건에 있지요. 그러니까 상이하게 보이지만, 축산물 시스템이라는 동일한 시스템 안에서 불거져 나온 이슈들인 셈이죠.

비극은, 이 시스템에서 피해자는 다수인데, 이익을 보는 이는 소수라는 사실에 있어요. 다수자인 동물 그리고 동물을 먹는 현대 소비자는 피해자인 반면, (한쪽에서는 목숨 자체를 잃고, 다른 쪽에서는 HUS와 같은 중병 또는 비만, 당뇨 등 다른 만성 질병을 앓지요) 이 시스템에 편승한 소수자들은(사료·유통(수입)·가공·요식업체, 축산농업자와 수의사 집단) 이익을 챙겨간다는 사실 말입니다. 여기에 공장식 축산에 다량의 화석연료와 수자원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현실까지 고려하면, 피해자는 더 늘어나지요. 다수는 양극에서 피해를 입고, 소수가 중간에서 이익을 챙기는 시스템입니다. 이것이 악(惡)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악일까요?

▲ 맥도날드 해피밀 세트를 먹은 네 살 아이가 용혈성요독증후군, 일명 '햄버거 병'에 걸렸다. 아이의 엄마인 최은주 씨는 지난 5월 검찰에 한국맥도날드 유한회사에 대한 고소장을 접수했다. ⓒ연합뉴스

은폐해온 참혹한 진실들

어떻게 해법을 찾아가야 할까요? 생각해봐야만 하는 건, 소비자와 생산자가 특별히 대립각이 세워지는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한통속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소비와 생산은 동일한 시스템의 다른 두 기능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값싼 고기를, 자주, 다수가 먹는 도시 소비문화가 한 축에 있고, 값싼 고기를 대량으로 생산·유통하는 공장이 또 다른 축을 떠받치고 있어서 '맥도날드'에서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옥자'의 문제도 함께 해결되는 구조입니다. 물론 '맥도날드'에서의 문제는 어느 소비자가 제기한 건강상의 문제만은 아니겠지요. 건강의 주제를 넘어서, 윤리적인 소비라는 주제까지 나아갈 때 비로소 '옥자'의 주제까지 건드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가족 고기 먹는 문제에는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2009년 광우병 파동과 광화문 촛불 집회를 2017년 HUS 관련 '맥도날드' 기소 사건과 함께 떠올려보세요!) 그 살점이 다른 존엄한 생명체의 '터무니없는 희생'의 결과물이라는 엄연한 사실에는 짐짓 모른 체하려는 태도가 쉽게 변화될는지는 또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고집쟁이 염소를 끌고 풀 먹이러 가는 이의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닐까요? 도덕적 우월감을 스스로 삭제하고, 동물과 육식의 문제를 '모두의 문제'로 펼쳐놓고 공론화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게 아닐까요?

스위스의 변호사인 앙투안 괴첼(Antoine F. Goetschel)은 <동물들의 소송>(이덕임 옮김, 알마 펴냄)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고양이는 우리의 무릎 위에 앉히고, 생선은 프라이 팬 위에 올리는 걸까?"

이런 비일관적인 대(代) 동물 태도에는 깊은 심리학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 괴첼의 생각입니다. 어떤 것일까요?

첫째, 인간과의 신체적 유사성 정도가 호불호를, 식용과 비식용을 갈라왔다는 겁니다. 인류는 네 발 달린 포유동물을 좋아하는데, 그래서 설사 이들을 식용으로 삼을 때에도 이들을 먹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둘째, 인간의 반응에 반응할 줄 아는 의사소통 능력의 유무가 식용과 비식용을 가릅니다. 고양이, 개, 앵무새, 말 같은 녀석들을 그래서 우리는 좀처럼 먹으려 하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셋째, 공작새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들 역시 우리는 죽이기 꺼립니다.

마지막으로는, 만지고 쓰다듬을 수 있음이 살생을 기피하는 기준이 됩니다.

듣고 보니, 왜 소나 닭을 가축으로 길러 왔는지 알 것도 같군요. 그런데 바로 이러한 심리학적 이유로 축산물 생산자 측에서는 언제나 사실을 '은폐'한다는 점도 상기되어야 해요. 인공수정과 지속적인 출산을 강요당하는 어미 돼지, 마취도 안 한 상태에서 거세당하는 어린 수퇘지, 우유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1년에 한 마리씩 송아지를 낳아야 하는 젖소, 자연 수명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시점에서의 도살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참혹한 폭력에 관한 사실 말이에요.

▲ 영화 <옥자> 스틸컷.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요컨대, 우리에게는 두 가지 비(非)은폐가 필요해 보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비은폐(이해), 우리가 먹는 동물의 현실에 대한 비은폐(이해), 이 이중의 비은폐와 더불어, 우리들 소비자가 움직일 때만 비로소 고집 센 염소 같은 시스템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 문제에서 실질적인 일보가 있으려면, 사실 여러 관계자가 동시다발로 움직여야만 해요. 우선, 식의학·영양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육식 필수론자들에 맞서 적극적인 전투를 벌여주어야 합니다. 즉, 육류가 인류의 보조 식량이 되어도 전혀 문제없으며 되레 채식이 건강에 더 이롭다는 식의학적 사실이 공유(비은폐)되어야 하고, 그때 비로소 육류 절대 소비량은 감소하기 시작할 겁니다. (현재는 전 세계에서 600억 마리가 넘는 동물이 매해 도살되고 있어요.) 이것이 되지 않는 한 '옥자'와 '맥도날드'의 숙제는 영원히 미해결입니다.

둘째, 현재의 동물 공장에서 방목형 농장으로 가는 중간 단계로 '반(半)감금 반방목형 복지 농장'을 모색해봐야 해요. 그런데 이와 유사한 모델은 이미 도입되어 있으므로, 이 모델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셋째, 동물 복지 우수 축산 농가에 정부 보조금을 '충분히' 지원하는 법안의 도입입니다. 그들의 살점과 젖을 취하거나, 그 취함을 막지 못하는 우리들 소비자 모두가 내는 모두의 분담금입니다. 이 비용의 부담에 우리가 선뜻 합의해야 합니다.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 동물의 운명이지만, 전체를 살피며 모두의 이해와 피해를 사려할 줄 안다는 것이 인간 정신의 고결함이며, 인간의 존엄성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서 나옵니다.

ⓒ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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