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8일 오후 3시 32분,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적 대안'을 도출했다는 위안부 합의문이 발표됐다. 일본 총리의 직접 사과는 없었고, 합의 내용에도 일본 정부가 출연하겠다는 10억 엔 외에 새로운 것은 사실상 없었다. 그런데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고 했다. 역사에 과연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게 있을 수 있는가? 시간을 더듬어 올라갔다. 지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수치심을 이겨내고 공개석상에 선 이후, 진실은 조금씩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이 추악한 만행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갖은 협박과 위협을 이겨내고 무단히 노력했다. 이동석 PD도 그 중에 한명이다.
1973년 TBC에 입사해 KBS에서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MBC를 통해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를 연출·제작한 한국 다큐멘터리의 산증인 이동석 PD가 1992년 프로그램 제작 취재기를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총 8회에 걸쳐 연재될 이 취재기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함께 담겨 있다. 이동석 PD의 말이다.
"나는 1992년에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 3부작을 MBC를 통해 8.15특집으로 제작 방송하였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자료 수집 과정,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수회에 걸쳐 소개하겠다. 이 글에서 소개되는 프로그램의 타이틀 <종군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등으로 그 용어가 바로 잡히기 전에 통용되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프로그램 당시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종군위안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일본은 반성의 기미가 없다. 오히려 역사의 시계를 돌리려는 시도마저 하고 있다. 지금, 이동석 PD의 취재기는 우리가 역사에 묻힐 뻔한 진실을 어떻게 발굴해 냈는지 그 치열함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인간은 무엇인지, 역사는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할 것이다. 한국 외교부가 마침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전반적인 검증 작업에 착수한다고 했다. 이 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정부와 시민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로 이 글은 1992년 취재 현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연할 목적으로, 당시의 정치 사회상을 가능한 그대로 담으려 노력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봤을 때는 이미 수정된 개념이나, 용어 등이 서술 과정에서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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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학살, 일본은 미친 군인들에 여자를 주기로 했다
비극은 1937년에 싹텄다.
러일전쟁 후 만주국을 세워 호시탐탐 중국 침략을 획책하던 일본은 1937년 7월7일 북경 남서부지방에서 중국군에 생트집을 잡아 노구교를 점령하면서(노구교사건) 중국과의 전쟁을 일으킨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이다.
7월 말에 일본군은 총공격에 나서 그 싸움을 전면전으로 확대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에는 상해(上海)를 함락시켰으며 12월에는 마침내 당시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南京)을 점령했다. 전쟁이 점차 장기전으로 발전하고 일본이 북경과 상해 사이의 영구주둔을 획책하자 조기에 고향으로 돌아갈 전망이 어두워진 일본 군인들은 전선마다 약탈과 강간을 일삼더니 남경을 점령하자 급기야 야수로 돌변하여 전대미문의 남경대학살을 자행한다.
그들은 남경에서 12월 13일부터 20일까지 일주일동안 30만 명 이상(시신만 20여 만 구 발견. 강에 던져지거나 매장된 시신까지 감안하면 30만 명에 달한다는 추정도 있음.)을 학살하였다고 전해진다. 길마다 시체가 즐비했고 여인들은 하체가 벗겨진 시체로 변해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으며 일본군 트럭들은 쓰레기 치우듯이 시체를 쓸어 담아 싣고 어디론가 분주히 이동하였다. 양민의 목을 일본도로 내리치는 군인, 포로의 눈을 가리고 군도로 가슴을 찌르는 군인, 꿇어앉힌 채 뒤통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군인, 사냥꾼처럼 사람의 머리채 몇 개를 손에 들고 희죽거리는 군인, 그것이 당시의 일본 군인이었다. 군율이 완전히 무너진 미쳐버린 군대였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일본군 수뇌부에게는 전투도 중요했지만 날뛰는 병사들을 다스리는 일이 당장 시급했다. 이대로 방치해두면 전황은 물론 군대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국면을 전환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군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위안부문제의 싹이 돋기 시작한다. 르포 작가 센다 가꾸오(千田夏光)씨는 증언했다.
"남경대학살은 정신이상이 된 군대가 저지른 만행이었습니다. 남경으로 진격한 13만5000명의 군대라는 것은 혈기왕성한 20대의 일본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미쳐서 저지른 참상이었던 것입니다. 북경 상해 항주를 잇는 삼각지대에서의 영구주둔을 획책한 일본군 수뇌부는 미쳐버린 군대를 시급히 진정시키고 치안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 방법을 궁리하던 끝에 그들은 '20대의 남자들에게는 여자가 필요하다. 여자를 나누어주자'고 생각했습니다."
(남경대학살이 "정신이상"이 된 군인들이 "미쳐서" 저지른 일이라는 사건의 원인 분석과 관련된 주장은 '일본군'의 문제가 아니라 '군인들 개개인의 문제'로 해석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일본군이 어느 정도 조직적으로 움직였는지 여부 등은 아직까지도 밝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취재 상황의 재현을 위해 센다 가쿠오 씨의 주장 자체를 그대로 옮긴다.)
문제의 혈기왕성한 20대 일본 남자들이란 이미 섹스를 경험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중일전쟁의 전쟁터가 넓어지자 일본군은 병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제대 군인들을 재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 제대 군인이란 이미 고향에 돌아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아내와 성생활을 했었던 혈기왕성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전쟁터에 다시 끌려왔다는 불만,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젊은 욕정을 발산할 수 없는 불만 등이 쌓이고 쌓여있는 장정들이었다. 그런 불만에 일반 병사들의 불안 심리가 가세하여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이 잔인한 남경대학살이었던 것이다.
"여자를 나누어 주기로 결정한 군부는 나누어 줄 여자로 우선 중국의 창녀들을 떠올렸으나 反日적개심이 가득찬 중국여자들이 스파이로 돌변할 가능성이 높고 게다가 성병이 만연되어 전력이 약화될 염려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과거 러일전쟁에서 일본군 전력의 10퍼센트가 성병으로 손실됐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군대의 어용상인들을 불러 20억 엔의 임시군사비중 일부를 풀어주면서 외지에서 여자를 모집해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것이 종군위안부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일본 군부(일본의 군부는 당시 정부의 최고 실력자였으므로, 일본 정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차원의 '기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군 수뇌부의 명령을 받은 어용상인들은 상해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땅 북구주(北九州, 기타규슈)로 향했다. 당시 그곳은 전시 경제의 심장부로서 광산과 군수공장이 밀집되어 있어 많은 유곽('성매매 산업'에 종사한 자들을 일정한 구획 안에 모아 영업한 공인성매매업소)들이 성업하고 있었다. 공창과 사창을 합해서 30만 명가량의 성매매 여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어용상인들은 이곳의 성매매 여성들을 중국으로 수송하려 했으나 여자들을 빼내면 장사 밑천을 잃게 되는 성매매업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용상인들이 눈을 돌린 곳은 탄광 지대였다. 인근에는 많은 탄광이 있었고 탄광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있었으며 그 노동자들에게는 '순진하고 깨끗한' 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인들은 이곳에서 중국의 공장이나 식당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해준다고 속이며 탄광 노동자의 딸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탄광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고 그들에게는 순진한 딸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겠다는 효성 깊은 조선의 딸들이 취직이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상인들의 덫에 걸려들었다. 그것이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 들어가는 단초였다. '자발적'이라는 일본의 우익들의 주장과 달리 그들은 '사기'를 쳐서 여성을 모았다.
우리 취재팀이 찾아간 북구주 아카사카 탄광지대도 그런 곳이었다. 야하다제철소로 가는 석탄을 캐던 이 탄광지대에도 조선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딸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만난 교포 황학성 노인은 당시의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약 150여 가구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있었는데 그 딸들을 밥쟁이들이 빼내어 팔아먹었습니다. 상해나 대만의 공장에 취직시켜준다고 속였지요. 그렇지만 낮에는 식당일 하고 밤에는 몸을 판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본인들에게 몸 판다는 이야기는 안 했겠지만... 물론 집에 돌아온 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가 소화12년(1937년)에서 16년쯤이었죠. "
그들은 여자를 '군수품'으로 분류해 선실 바닥에 쑤셔 넣었다
북구주 탄광 지대에서 이런저런 감언이설로 중국에 실려간 여성들 중에 조선 여성이 태반이었다는 것은 그 뒤의 보고서에서 밝혀진다. 아무튼 이렇게 어용상인들이 끌어 모은 여성들을 중국에 최초로 실어 보낸 것은 남경대학살이 자행된 2주일 뒤였다. 급하게 명령하고 신속하게 추진된 종군위안부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일본군에는 '황군의 수송선에 여자는 태울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군마와 군견과 군비둘기 등 온갖 군수품은 다 실을 수 있어도 여자는 태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심 끝에 군부는 어렵게 끌어 모은 여자들을 군마나 군견에 해당하는 군수품으로 분류해서 3단으로 나눈 선실의 맨 아래 칸에 쑤셔 넣었다. 그 위 칸에 병사들이 탔음은 물론이다.
1938년 1월2일. 북구주를 떠난 최초의 여성들 100여 명이 상해에 도착했다. 취직하러가는 길이라 여겨 한복을 제대로 차려입은 조선 여성의 모습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소학교 교실에 끌려가 성병검진을 받았다. 이때 그들을 직접 검진했던 군의관이 내가 후쿠오까에서 그 딸을 만났던 아소 데스오(麻生徹男)였던 것이다. 성병검진대를 직접 고안해서 만들었다는 그 군의관. 그는 검진보고서 <화류병(성병)의 적극적 예방법>에서 이렇게 썼다.
"피검자는 반도인(조선인)이 80명이고 내지인(일본인)이 20명이었다. 반도인중에 성병의심이
가는 자는 극소수이나 내지인은 대부분 현재 급성 증상을 보이고 있다."
아소 데스오(麻生徹男)는 일본인의 대부분은 급성 성병환자인 반면 조선 여성 중에는 성병이 의심되는 자가 극소수라고 썼다. 일본 군부는 이들을 바탕으로 1월 8일 상해 근교에 양가택위안소(楊家宅慰安所)라는 위안소를 만든다. 목조바라크로 된 열개의 건물을 짓고 그 하나하나에 작은 방 열개씩 모두 100개의 방을 만들었다. 방 하나에 북구주에서 실려 온 여성 한 사람씩을 배정한 것이다. 위안소 안에는 동병참사령부(東兵站司令部)명의의 위안소 규정을 써 붙여 놓았다. 그 규정에는 이렇게 명시했다.
'이 위안소에는 육군의 군인과 군속 이외에는 입장을 불허한다.'
'위안소 입장자는 위안소 외출증을 소지해야 한다.'
그리고 건물 앞 길모퉁이에는 버젓이 위안소의 위치를 알리는 팻말을 세웠다. 남경대학살이 자행된 지 20일 만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군은 세계 최초로 군직영위안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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