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초 문재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을 발표하면서 북한에 유화적 몸짓을 취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을 하면서 남북 관계는 다시금 얼어붙었다. 남측에서도 반입되어 있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급히 임시 배치한 것에 이어, 한미 미사일 지침(NMG·New Missile Guideline)에 명시된 미사일 탄두의 중량 제한에 대한 재논의를 언급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한껏 고조되었다. 심지어 미국과 북한 사이의 관계도 극도로 악화하여, 양국 정상들 입에서 '분노와 화염' '괌 포위 사격'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기사 바로 가기). 이러한 긴장이 힘겨루기 말싸움으로 끝날지, 실질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관전하는 외부자들에게 전쟁은 스펙타클이자 특별한 국제정치 '사건'이지만, 전쟁에 휘말린 보통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쟁이 몸과 마음에 남기는 상흔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게, 오래 간다.
전쟁이 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사망, 장애처럼 비교적 눈에 잘 띄는 신체적 손상에서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같은 정신건강 피해까지 다양하다. 영향을 미치는 시간 범위도 넓어서, 심지어는 전쟁 후 30~40년이 지나도 그 효과가 지속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더욱 놀랍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것은, 전쟁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한 세대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울대학교 이철희 교수가 올해 초 국제학술지 <아시아 인구학 연구(Asian Population Studies)>에 발표한 논문은 한국전쟁 당시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태아들이 출생한 이후 나이가 들었을 때의 건강 수준을 검토했다(☞논문 바로 가기).
분석에는 통계청의 2010년 인구 총조사 자료가 이용되었는데,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전쟁 초기에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1951년 출생자들과 이 시기 전후 출생자들의 2010년 건강 결과를 비교했다(주: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개전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이르렀다). 1945년에서 1959년까지 연도별 출생자들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면, 출생 연도가 최근일수록 건강 결과는 전반적으로 좋아졌다. 그런데 유독 1951년 출생자들은 이러한 추세에서 벗어나 있었다. 1951년에 태어난 남성은 평가 대상이었던 여덟 개의 건강 결과, 즉 장애, 의사소통의 제한, 이동 능력의 제한, 정신 장애, 인지 능력의 제한, 기본적 활동의 제한, 외출의 제한, 근로 능력의 제한 모두에서 유의미하게 나쁜 점수를 기록했다. 1951년 출생 여성은 여덟 개 영역 중 이동 능력 제한과 정신 장애를 제외한 여섯 개 영역에서 건강 수준이 낮았는데, 격차 또한 남성보다 작았다.
저자는 전쟁의 고통을 더 많이 겪을수록 건강 결과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양-반응 관계 가설을 검정하기 위해 남한의 북부를 '중앙' 지역으로 정의하고 추가 분석을 수행했다. '중앙' 지역은 북한군 진주와 UN군 폭격 피해를 남부 지역보다 더 많이 받았고, 두 번이나 북한군이 점령하면서 거주자들이 두 번 피난을 가야 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태어난 이들만을 추출하여 따로 분석했을 때, 남성의 경우 건강 결과의 악화가 영역에 따라 1.3~2배까지 크게 나타났다. 여성의 경우에도 1.5~3.8배에 달하는 건강 결과의 악화가 나타난 동시에, 이전에 유의미한 건강 영향이 관찰되지 않았던 두 개 영역(이동 능력의 제한, 정신 장애)에서도 건강 영향이 드러났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영국 런던대학교 델란 데바쿠마 교수 연구팀은 전쟁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연구들을 종합하여 2014년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바 있다 (☞논문 바로 가기). 이 논문에 의하면, 전쟁이 다음 세대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기전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자궁 내에서 발생하는 선천성 감염으로 인해 조산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이 감염에 더 취약해지는 상황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이 전쟁으로 인해 영양이 부족하고 질병이 만연하며 마땅한 보건의료체계도 부족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더욱 취약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경로는, 전쟁이 계속되는 지역에서 자라난 아이는 전쟁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에 더해 모성의 정신 건강 문제까지 경험하면서 건강이 악화되기 쉽다는 설명이다. 논문에 언급된 사례를 인용하자면, 전쟁 때문에 지속적 스트레스 상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선천적으로 코르티솔(급성 스트레스가 주어질 때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 반응에 결함이 생기고, 그러다보니 이후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스트레스 경험에 대처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전쟁은 국제정치 이슈이지, 보건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 하지만 전쟁은 이를 직접 경험한 이들은 물론 다음 세대에까지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남긴다는 점에서 심각한 보건 문제이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2013년 4월에도 전쟁을 막고 평화를 만드는 일이 건강을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관련 논평 : 전쟁과 평화, 그리고 건강).
정권의 초기,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무능력해서라기보다는 누구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국제정치 상황에 우리가 놓여있는 것과 관련 있다. 과연 전쟁이 이 복잡하고 오래된 갈등상황을 타개하는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승리하든 패배하든) 전쟁이 이곳에 사는 시민들의 삶과 건강, 다음 세대의 안녕에 깊은 상흔을 남기게 되리라는 점이다. 우리 시민들은, 그 과정이 길고 어렵더라도 대화를 통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압박해야 한다. 나와 이웃, 우리 다음 세대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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