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 한반도는 전쟁 가능성이 막연한 개연성의 차원이 아닌 절박한 현실성을 갖고 논의될 만큼 위험이 최고조에 달해 세계적 관심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기술 개발의 빠른 진전으로 인해 야기된 군사안보적 위협 때문인데, 그 위협의 수준은 지금도 이미 높고 또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되어야 하겠지만, 최소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갖는 한국이 미국의 군사안보적 지원 속에서 북한체제를 힘으로 밀어붙여 붕괴시킨 후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인식 내지 그런 인식에 바탕을 둔 대북정책은 실패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네오콘 세력이 주도했던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이든, "전략적 인내"를 내걸었던 오바마 정부의 온건 정책이든, 북한의 핵무장을 제어하고 한반도를 비핵화하는데 실패한 것은 물론이다.
그간 미국과 한국의 대북 정책은 승자독식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에 따른 목표가 실현된다고 할 때, 완전한 패자는 북한이 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제로섬적 게임의 한 당사자가 그 경쟁의 패자로 사전에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면 그는 게임의 룰을 부정하며 탈퇴하든가, 그런 선택이 어렵다면 결사항전의 자세로 대응할 것임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평화의 가치와 이를 실현하는 과정은 관심 대상이 될 수 없다. 유일하게 주장될 수 있는 가정은, 북한의 김 씨 정권이 붕괴하면 북한체제도 이어서 붕괴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흡수통일이 가능하며 통일은 곧 평화를 실현하게 된다는 시나리오뿐이다. 여기서 평화는 통일의 부수적 현상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이러한 가정이 단지 희망적 사고의 반영이거나 이데올로기일 뿐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현재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상황을 다루기 위해서는 대북정책 혹은 민족문제를 풀어나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고, 그것은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남북한 통일이 가능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2.
최근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이자 한반도포럼 이사장이 <한반도 평화 만들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길>(이하 <평화 만들기>)를 펴냈다. 오늘의 한반도 위기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해 새로운 퍼스펙티브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은 그런 요구에 가장 이상적으로 부응할 수 있는 저작으로 판단된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사회를 지배해왔던 목표이자 가치인 통일이라든가, 북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적, 군사안보적 전략 내지 현안을 다루고 있지 않다. <평화 만들기>라는 책의 제목이 말하듯, 통일이나 군사안보적 대응 전략이 아닌 평화와 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넓은 지평을 탐색하고 있는데, 이런 주제 설정 자체부터가 완전히 새롭다. 통일만이 평화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냉전 시기이래 지속되고 있는 익숙한 접근이 아니라, 그 역으로써 평화를 우선적인 목표이자 초점 과제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자는 남북한 간 평화공존의 긴 과정을 거친 이후의 과제로 통일을 내다보는 시각을 통해 민족문제를 접근한다. 이러한 논리 위에서 문제를 풀고자 한다면 한반도 문제에 대한 퍼스펙티브의 공간적 범위와 시간적 길이는 넓고 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가기 위한 문학적 비유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걸을 수밖에 없었던 역정(歷程)을 불러들인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이아가 고향 아티카를 향해 직선거리로 왔다면 빠르고 쉽게 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디세이아는 그 짧은 거리를 북아프리카와 오늘의 프랑스남부 리비에라 해안 그리고 이탈리아 서부연안을 지나고, 여기에 그 유명한 사이렌스 해협을 통과해서 시칠리아를 거쳐 다시 북아프리카 등지를 10년이나 돌고 돌아 귀국했다. 한반도에서 평화를 실현하는 일을 오디세이아의 역정에 비유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전쟁도 불사할 정도의 증오와 적대적 관계를 평화공존의 관계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긴 고난의 여정을 필요로 함을 암시한다. 평화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넘어야할 수많은 산들이 산재해 있다. 장애를 이루는 요소들은 그들 각각을 구성하는 대상들이 한결같이 극히 대립적이며 심지어 이율배반적이기까지 하다. 핵무기와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을 다루는 과정에서 한미공조를 다져야하고, 한미 간 군사안보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그렇지만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북한 핵위기를 다루는 협상과정에서 가장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한국 자신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북핵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우리의 이익이 미국과 일치하지 않을 때 국익을 위해 우리 자신의 소리를 내야하고 미국을 설득하는 독립적인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 미국과 군사안보관계를 강화해야 하지만 동시에 중국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질서는 미국이 지배했던 과거 냉전 시기나 탈냉전 시기와 달리 "이중적 위계구조"(dual hierarchy)를 특징으로 하는 체제로 변하고 있다. 이제 미국과 중국은 이 새로운 동아시아의 공동운영자(co-manager)로 역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 사드 배치는 우리를 이러한 이율배반적 모순에 빠트린다. 그런가 하면 평화외교를 위해 일본만큼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나라도 없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는 한일 사이에 강력한 민족주의 정서를 촉발시키며 한일관계를 불안한 혼란으로 이끌고 있다. 그 어느 하나 해결하기 쉬운 일이 없다. 넘어야할 산이 수없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 더 어려운 난관이 대외적인 외교관계가 아니라 국내문제에 있다는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전통적인 적대적 대북정책을 벗어나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한 간 화해협력, 평화공존을 추구했던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그 정책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통해 계승되지 않았다. 대북정책이 다시 적대적인 강경정책으로 돌아선 데는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대북정책에 대한 보수와 진보사이의 이념과 노선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평화지향적 공존정책은 남북한 간의 긴장을 푸는 데는 일정하게 기여했는지 몰라도, 그것도 잠시였을 뿐 오히려 잠재해 있던 ‘남남갈등’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 점에서 오디세이아의 메타포는 평화의 성취를 위해 요구되는 정신과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거의 극복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메타포는 일찍이 정치경제 이론가이자 철학자인 앨버트 허쉬만이 "가능주의"(possibilism)라고 말한 행동 양식이나 정신적 태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떤 목표를 추구할 때, 그것이 성취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랄까, 환경을 떠져보고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뒤 일을 시작하기보다, 가능의 공간이 아주 좁게 열려 있고 장애물이 많다 하더라도 주어진 여건에서 그것을 열어나가는 태도가 가능주의다. 헤겔식의 변증법적 발전일 수도 있고, 시행착오를 예상한다 하더라도 현실이 허용하는 조건에서 가능한 것부터 시도하며 일을 성사시켜 나가는 행동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저자는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하는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평화라는 이상주의적 목표를 설정하고 현실에서 그것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조하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실용주의적 이상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한반도에서 평화를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실현될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를 17세기 유럽의 종교전쟁에서 찾는다. 종교적 신앙이 내면적 신념의 형태이고 남북한 간 갈등의 원천 역시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할 때, 전쟁과 핵 위기를 포함하는 적대적 관계를 무력이 아닌 평화 지향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발상은 큰 호소력을 갖는다. 전 유럽의 종교전쟁 가운데서도 가장 장기적이었고 가장 파괴적이었던 ‘30년 전쟁’도 베스트팔렌에서의 평화 조약(Peace of Westphalia)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영토 국가와 그들 간의 세력균형 체제라는 현대적 국제관계의 틀을 만들면서 세계사적 전환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3.
<평화 만들기>는 북핵 위기를 둘러싼 현 시점에서 위기의 진원지인 한반도의 남북한이라는 비교적 좁은 국가영역으로 논의 범위를 한정하며 국가 간 외교관계를 다루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관계를 말하며, 어떤 외교안보 전략, 어떤 정책 방안이 바람직한가를 다루는 다른 많은 책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왜 우리가 평화를 추구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그에 대한 답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그리고 이 평화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또는 그 기반으로 역할을 하는 동아시아라는 초국적 영역 내지 공간을 제시한다. 여기서 동아시아는 일차적으로 문화적, 역사적 지역공동체로 제시된다. 동시에 그것은 한반도 평화가 정치적인 방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이자, 북핵 위기를 다루는 6자회담이 기본적인 제도로 기능하며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넓게 확장된 포괄적인 지역안보 공동체로서 발전할 수 있는 국제정치적 영역이기도 하다.
저자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역사적 사실에 대한 넓은 이해와 아울러, 평화의 가치와 의미를 논하는 자리에서 깊은 종교적 성찰, 특히 불교 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이러한 깊이는 책을 읽을 때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평화를 만들고자 한다면 냉전 시기로부터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대북정책, 즉 힘의 우위를 통한 통일과 그 결과물로서 평화라는 제로섬적 명제에 대한 단순한 안티테제로써 평화를 제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통일과는 별도로 평화 그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성찰해야한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하고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위치해있는 동아시아라는 초국적 지역공동체를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지역이 가진 문화적, 경제 기술적, 국제정치적 문제들을 다뤄야만 한다. 이것은 평화를 위한 총괄적 프로젝트를 말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반도 분단은 국내정치적 갈등의 결과이기 이전에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지정학적 힘의 관계의 산물이다. 즉 분단은 강대국들의 힘의 관계가 작용한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려는 대안적 목표로서의 평화 역시 분단 과정이 그러했듯 강대국 힘의 관계가 한반도 당사자들의 그것보다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 남북한 간 평화공존을 풀어나가는 것은 한반도를 넘어서는 세계적 차원과 동아시아적 차원의 국제정치 영역을 이해해야 하고, 그로부터 대책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테크노로지의 거버넌스를 포함하는 다면적이고 다차원적 문제들 또한 다뤄야 한다.
평자가 <평화 만들기>를 특별한 책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피할 수없이 넓은 퍼스펙티브를 가져야하고, 동시에 다층적인 차원에서 구체적인 문제들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고 할 때 이 책이 그 두 차원의 문제들을 훌륭하게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넓은 퍼스펙티브는 추상적이기 쉽지만, 책의 내용을 구성하는 소주제들의 범위와 차원이 다층적이고 구체적이며 경험적인 것들을 풍부하게 논의하고 있기에, 그 균형이 돋보인다. 그래서 <평화 만들기>는 훌륭한 건축학적 구성을 갖는 책이다. 네 개 장으로 구성된 책에서 앞의 두 장은 한 반도에서 평화를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는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지역공동체로서 동아시아의 조건을 탐색한다. 이어서 문화적 공동체로서 동아시아가 한반도 평화를 포함하는 국제관계 재편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한다.
후반부의 다음 두 장은 한반도 통일을 다룰 수 있는 미래 동아시아의 거버넌스의 구조와 내용을 논의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과학기술 발전에 많은 비중을 두면서 거버넌스의 위기와 위기 해결 방법에 대해 논의한다. 마지막 부분은, 저자가 그동안 문화교류와 외교적 협상에 참여했던 경험과 아울러 남북한이 어떻게 통합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 그 조건을 탐색한다. 여기에서는 북한을 평화의 체제 안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구체적인 틀로서 6자회담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둔다. 동아시아를 큰 지역이 공유하는 문화, 역사적 공동체로 정의하고, 이를 서양과 대조시키면서 그 기초 위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를 접근한 것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의식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6자회담이라는 외교적 다자틀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보다 넓은 동아시아 지역의 초국가적 안보공동체로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논의한다.
4.
평자는 평소 독일통일은 EU라는 초국적 정치공동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점에서 아데나워가 드골과 함께 만들어낸, 두 역사적인 적대국들 간의 유럽을 초국적 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협력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못지않게 독일통일에 중요한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경제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유럽공동체를 설계한 장 모네의 공적 또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렇게 유럽에 위치한 독일통일과의 비교라는 평자의 관점에서 볼 때, <평화 만들기>에서 제시된 6자회담의 확대된 제도화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평화공동체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은 독일통일의 의미를 깊이 통찰한 결과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평자는 실로 창의적이고 대담한 발상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동아시아는 문화적, 역사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한반도의 평화를 비롯한 이 지역 전체의 일반적 평화를 실현하는 군사안보적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동아시아는 역사적, 문화적, 국가 간 체제 내지 국제정치적 차원에서 유럽과는 질적으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분명히 상치된다.
물론 그런 일반적 인식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관점을 따르면, 일반적 인식은 유럽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동질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왔고, 지역을 구성하는 국가 간의 규모가 비슷해서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 공동체는 좋은 조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동아시아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공통성을 갖는지도 의문이고, 국가 간의 규모 차이도 너무 크고, 현재 미국과 중국이 군사안보적 차원에서 치열한 경쟁과 갈등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동아시아와 실제로 한반도에서 평화가 추진되는 영역으로서 군사전략적 힘의 관계가 충돌하는 지정학적 동아시아간의 괴리는 너무나 크다.
이러한 관점과는 달리 <평화만들기>에서 저자는 동아시아는 문화적, 역사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하여 지정학적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구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왜 동아시아는 그렇게 할 수 없는가라고 저자는 묻고 있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종교전쟁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뒤이은 냉전을 극복하고, 핵무기 감축을 하고, 평화를 성취하지 않았나. 종교전쟁에서 평화를 만들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서 전쟁을 치렀던 당사자들이 서로 합의해 유럽연합을 만들었고, 승전연합국 4개국에 의해 네 등분된 독일에서 급기야는 통일까지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라고 저자는 묻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자는 <평화만들기>의 저자의 발상이 실로 대담무쌍하고, 불교의 종교적 이치와 세계의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질문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 적대의식과 편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미국이 북한 핵문제를 푸는데 있어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지적할 수 있고,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서클이나 엘리트층들을 포함하는 기성집단의 대북 인식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고, 중국과 북한 간 관계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이 분야에서 말하고 쓴 어떤 저자들보다 객관적이고도 균형적으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5.
평자는 책의 저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홍석현 한반도포럼 이사장’이라는 점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보수나 진보, 어떤 범주로도 구분되기 어려운 영역에 위치한다는 점, 그렇지만 진보는 분명 아닌 넓은 의미로 보수에 가깝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고 본다. 여기서 이념적 범주를 언급하는 것은 그 요소가 특별히 중요해서가 아니다. 다만 이념적 요소가 한국에서는 대북 정책 영역, 말하자면 외교, 안보, 군사 분야를 중심으로 민족문제에 대해 일정하게 정형화된 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것은 보수적 범주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차원에서 평화의 문제와 가치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저자가 오래전부터 한반도포럼을 통해 남북한 간 관계를 탈냉전 상황에 부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평화 만들기를 실천해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책에서 한반도와 접경하고 있는 지역들, 시베리아, 중국 동북3성 지역을 광범하게 여행하면서 평화와 통일을 포함한 한반도의 방향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듯 북한에 대해 평화를 지향하는 그 자신의 ‘관여와 개입을 통한 실천’이 지난날 보수 정부들의 공식 정책과 잘 어울릴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평화의 철학과 그에 따른 실천이 오늘의 시점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어떤 역할을 가질 것인지는 큰 관심거리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대북정책이나 한미 내지 한중관계를 포함해 핵 위기를 다루는 방식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난 대선 시기를 통해 후보로서 공약했던 남북한 간의 공존 지향적 온건 정책과 대선 승리 이후 대통령으로서의 실제 정책 사이의 큰 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지난날 앞선 보수 정부들의 정형화된 보수적 정책으로의 회귀에 가깝다.
평자가 이 책의 저자를 특별하다고 보는 마지막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저자가 어느 면으로 보나 한국사회의 최상층에 속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강연이나 인터뷰 같은 기회를 통해 자신을 포함하는 최정상 엘리트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말하자면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사회에 대해 도덕적 책무를 가져야한다는 것을 말하곤 했다. 이런 역할을 의식하는 사람으로서 저자는 한반도에서 평화를 만드는 일이 자신이 해야 할 큰 책무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적어도 평자가 <평화 만들기>를 읽은 느낌은 그러하다.
책에서 그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태도로 18세기말 미국 국가건설의 아버지로 불리었던 지도자들의 사례를 모델로 제시한다. 그것은 13개 주의 대표들이 각 주의 이해관계나 이익갈등을 넘어 정치적 타협을 이끌어내 공동의 이익을 실현할 연방 국가를 건설했던 사례를 말한다. 그들 사이의 이견과 갈등은 연방파와 반연방파로, 그리고 연방파 사이에서 연방국가의 상업적 역할을 강조하고 국가에 많은 권력을 부여해야하다는 해밀턴파와 (당시에는 공화주의로 불렸던) 민주주의와 개인 인권 보호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고자했던 제퍼슨파로 나뉘어 전개된 바 있다. 건국의 지도자들은 이성적 판단과 타협을 통해 이러한 이견을 극복하고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국가를 만들어 역사에 이바지했다. 이 모델은 저자 스스로와 오늘날 우리사회 지도층들을 향한 호소가 아닐 수 없다. 이 호소에 누가 비판적으로 응대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회에서의 저자 자신의 위치가 어떠하든, <평화 만들기>는 그 자체로 오늘날 위기의 한국사회에 던지는 문제작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 남북한 간 적대관계의 심화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우리사회가 이론적으로 논의하고 실천적으로 풀어가야 할 화두이자 담론인 평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지적 산물이다. 누구도 그렇지 못했던 종교적, 지적 깊이를 가지고 폭넓은 사회적 경험, 외교 현장에서의 경험, 실천적 지식에 사려 깊음을 결합한 지적 산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널리 읽고 토의해서 우리사회가 평화를 이해하고 만들어가는 데 이 책이 좋은 토대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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