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산업혁명은 이미 시작됐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한 제1차 산업혁명 때부터 제4차 혁명은 시작된 것이다. 전기에너지와 내연기관이 발명되어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을 2차 혁명이라 하고, 전자·정보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의 자동화를 이룬 것을 3차 혁명이라 한다. 그리고 4차 혁명은 디지털과 생물학 그리고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상의 세계를 실현하고자 한다.
인공지능(AI), 로봇,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3-D 프린팅, 나노기술, 바이오기술, 양자 컴퓨터(quantum computing) 등이 지금 세간에 떠도는 가장 뜨거운 단어들이고, 재료과학, 에너지 저장 분야도 획기적인 발전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지 나아가 이런 것이 합쳐져서 또 무엇을 만들어낼지 알 수가 없다. 독일은 이미 4차 산업혁명이라는 명칭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인더스트리 4.0'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 미국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비영리집단인 OMG(Object Management Group)가 능동적으로 미래를 모색하고 있다.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 모르지만 이미 시작된 이 혁명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1차 산업혁명을 인류문명의 전환점으로 손꼽으며 계속되는 산업혁명의 도화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의 근본적인 변화는 단순히 산업혁명으로부터 오지 않았다. 경제사 연구자로서 이례적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더글라스 노스(Douglass C. North)는 인류문명이 현대로 진입하게 된 극적인 변화를 제2차 경제혁명이라 명명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산업혁명은 제2차 경제혁명의 결과물이거나 혹은 적어도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인류가 최초로 농경지식을 갖추고 문명을 이루기 시작한 사건이 제1차 경제혁명이다. 인류는 1만 년 전에 처음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00 년 전이라는 설도 있고, 1만2000 년 전이라는 설도 있지만 비옥한 초승달지대라고 알려진 중동지역에서 농사가 시작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어떤 유럽학자는 농경지식이 그곳에서부터 유럽까지 1년에 1km의 속도로 왔다고 비유했는데 중국에서는 전설 속 3황 중의 한 명인 신농(神農)이 5000 년 전에 농사짓는 법을 전했다고 하니 꽤 그럴듯한 비유인 것 같다.
농사를 짓기 전 수렵이나 채집으로 삶을 영위할 때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 것이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아마존유역 밀림의 원시부족들이 필요한 것만 사냥해서 돌아와 골고루 나눠 먹는 모습을 욕심이 없는 소박한 삶이라고 묘사하곤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필요이상으로 가져와봐야 딱히 저장할 방법이 없으니 남은 것들은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될 뿐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 시대를 원시공산사회라고 부른다. 제1차 경제혁명은 원시공산사회의 종결을 의미한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착하여 문명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농사는 파종하고, 수확하고, 저장하고, 분배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것을 계획하고 집행하려면 권력이 필요하다. 문명이란 바로 그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조직이 이룬 것이다. 가끔 어떤 민족이 우리가 먼저 농경생활을 시작했다며 민족적 자존심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농사를 먼저 지었던 곳이 지금도 풍요로운 것 같지는 않다. 농업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여전히 중요하지만 더 이상 풍요를 보장하지는 않게 된 것이다.
시대는 변했다. 제2차 경제혁명이 일어났다. 과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지식이 혁명을 이끌었다. 그 시작은 학문의 분화였다. 12세기 이탈리아 볼로냐에 처음으로 대학이 등장한 후 여러 나라에 대학이 생기면서 학문적 분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철학이 신학에서 독립했고, 14~15세기에는 수학, 천문학, 물리학이 철학 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그리곤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갈릴레오, 코페루니쿠스, 케플러, 뉴턴 등의 활약으로 세계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토마스 쿤의 표현을 빌리면 세계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다. 뒤를 이어 화학이 또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되자 세상을 변화시킬 준비는 끝났다.
그 다음은 발명가들의 활약이 있었다. 그들은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과학지식을 기술적으로 현실화시켰다. 예를 들어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조셉 블랙(Joseph Black)과 교류하며 효율적 증기기관을 발명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주목할 것은 기초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사회적 공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소를 설립하고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각 대학에서도 다양한 과학연구소가 설립됐다. 기초학문은 사회 전체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는 일종의 공공재로서 인식되었고, 과학자들은 존경과 명예를 얻었다. 그 지식을 기술적으로 구체화시킨 발명가들은 부를 얻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식에 대한 소유권이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와트는 증기기관 이외에도 다양한 특허권을 보유한 능력 있는 발명가였다. 제2차 경제혁명이란 이렇듯 과학과 기술이 결합하여 산업을 일으키고, 과학과 기술을 결합시킨 아이디어와 지식에 대한 소유권이 확립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창의적 열정이 보상받을 수 있는 지적 재산권 개념이 확립됐다는 것이 제2차 경제혁명의 핵심이다.
서구에 대학이 세워질 무렵 동양에도 교육기관은 있었다. 중국에는 이른바 4대 서원으로 불리는 백록동(白鹿洞)서원, 악록(岳麓)서원, 응천부(應天府)서원, 숭양(崇陽)서원 등이 11세기부터 일찌감치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외에도 주희와 육구연의 토론이 이루어졌던 아호(鵝湖)서원을 비롯해 수많은 서원에서 훌륭한 스승들이 학생을 가르쳤다. 그러나 서원에서 학생들이 하는 공부는 서구처럼 과학지식을 탐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원은 공자를 비롯한 고대 성인들의 말씀을 배우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송 대에 세워졌던 서원들은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청 말까지 명성을 유지했다. 교육의 목적이나 내용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농업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한 새로운 지식이 그리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중국에서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는 1861년에 시작된 양무운동부터였다. 그것도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이대로 가다간 열강의 침략으로 멸망당할지도 모른다는 일부 지식인들의 절박한 심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874년에는 영국 성공회 선교사 프레이어(John Freyer)가 상해에 격치(格致)서원을 세워 제조, 건축, 전기, 화학 등 과학기술을 가르쳤다. 영어와 중국어 두 가지 언어로 수업이 진행된 격치서원은 중국 최초의 근대학교였다. 1898년에는 북경대학교의 전신인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이 세워졌다. 이는 100일 천하로 끝난 변법자강운동의 유일한 성과였다. 1905년에는 드디어 서원의 유생들의 꿈이었던 과거제가 폐지됐다. 이처럼 서구에서 제2차 경제혁명이 완결될 즈음에야 비로소 중국에 과학이 도입됐다.
과학이 중국에 들어왔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서양의 과학을 습득하는 것과 과학적 탐구정신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창조적 지식에 대한 소유권 같은 것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중국에서는 특허권을 전리권(專利權)이라 한다. 독점적 이익이라는 의미가 농후한 이 단어는 청 말에는 독점적 영업권의 의미로 사용됐다. 사회주의 중국이 건립된 이후에는 특허권에 관한 규정이 있었지만 무용지물이었으며 1963년에는 이마저도 폐지되었다. 서양의 과학을 수용하고, 모방하기에도 벅찬 시기에 과학적 탐구정신과 창조적 지식에 대한 소유권을 거론하는 것은 너무나 시기상조였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사회주의 체제는 사유재산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지식에 대한 소유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중국에서 특허권이 부활한 때는 개혁개방을 실시한 이후였다. 중국정부는 1984년에 '전리법'(專利法)을 제정하고 이듬해 시행했다. 이후 1992년, 2000년, 2008년 3차례 수정을 거쳤다. 그런데 중국에서 특허법을 제정한 이유는 개인의 창조적 지식을 소중히 생각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84년에 특허법을 제정한 이유는 파리협약(Paris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Industrial Properity)에 가입하기 위해서였고, 92년 수정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결과물이며 2000년 수정은 WTO에 가입하기 위해서였다. 2008년 수정 역시 WTO의 '무역관계재산권협정'(Trade Relatede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자신들의 지식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지식을 도용하다 제지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4차 산업혁명의 도전에 직면하여 중국도 나름의 대책을 세우고 있다. 최근에 군민(軍民)융합의 발전전략과 장기적 공업발전 프로젝트 '중국제조 2025'를 발표했고, 금년에는 국무원이 '차세대 인공지능 발전계획'을 공지했다. 미래를 준비하는 중국정부의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과연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는 제4차 산업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는 특허권침해 범죄가 형사 처벌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유일하게 위조품 제조판매 행위가 처벌을 받는데 그것도 고작 최고형이 3년에 불과하다. 이렇듯 개인의 창작을 보호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열정과 헌신이 존중받을 리 없고, 남의 것을 훔치고 베끼는데 익숙한 사람들이 창조적 지식을 위해 인생을 걸 리도 없다.
우리나라라고 별로 다를 바 없다. 산업화 시대에 선진국의 기술을 훔치거나 베꼈던 범죄를 사석에서 자랑삼아 무용담처럼 떠벌리기도 했고, 중소기업의 특허권을 가로채거나 개인의 아이디어를 아무런 대가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중국산 짝퉁을 성토하고, 중국이 한국의 연예 프로그램을 베꼈다고 언짢아 하지만 과연 우리가 개인의 창작을 존중하거나 보호해 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중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남의 것을 빨리 배워서 성능을 약간 높이는 데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운 좋게도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좀 일찍 시작해서 좀 더 와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대에 필요한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인재를 양성하고,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것에 대한 권리를 확고히 보호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 우리는 아직 제2차 경제혁명을 완수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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