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에서 세 번째로 오랜 기간 대변인을 지낸 우상호 전 의원의 말이다. 그는 정세균 전 대표가 사퇴함에 따라 지난 4일 대변인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자유로운 '입'이 됐다. 큰 중압감에서 벗어나 시원하지만 이슈의 최전선에서 열심히 뛰다 물러나 허전하기 그지없는 일종의 '금단 현상'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만났다. 대변인에서 벗어나 정치인 우상호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민주당은 10월 3일 새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는 중책을 맡는 대표인만큼 누가 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정세균, 정동영, 손학규 등 소위 '빅3'가 모두 선거에 나올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우 전 의원은 '빅3'가 모두 나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대권 꿈이 있는 사람이 당을 맡으면 당이 때로는 야권 전체가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할 때 그런 결단을 하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권 후보가 이번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지난날을 봐도 그렇다. 2006년 전당대회에서 장관하던 정동영, 김근태가 당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대선도 아닌데 전당대회가 대선 전초전이 됐다. 결국 2등한 김근태의 위상은 추락했다. 1등한 정동영도 지방선거 패배로 인물의 가치와 권위가 현저하게 훼손됐다. 유력한 두 명의 대권 후보 모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일견 일리 있는 얘기다. 다만 우 전 의원이 이번 전대에서 정세균 전 대표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번 걸러 들어야할 주장이기는 하다. 정세균 전 대표가 대권에 도전하지 않을 것인지도 아직 확실치는 않다.
최근 여야 모두 '4말5초'(40대 후반-50대 초반)의 정치인들이 지방선거, 전당대회, 개각 등을 거쳐 급부상하고 있다. 우 전 의원도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주목받는 486 정치인 중 하나다. 이미 당내에 백원우, 최재성 의원, 우상호, 김민석, 오영식 전 의원 등 486 정치인들 모임인 '삼수회'가 있지만, 우 전 의원은 이 폭을 더 넓혀 당 안팎의 486세대를 아우르는 정치세력화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그는 10월 전당대회 이후 정치세력화를 본격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통의 먹잇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통의 가치를 위해 공동의 실천을 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486으로 불리는 정치 부대가 향후 15년 정도 우리 정치를 이끌 중심이 될 것"이라는 게 우 전 의원의 인식이다.
다음은 11일 서울 서대문갑 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전문.
대변인으로 가장 힘들었던 일? 2006년 지방선거 참패
▲ 우상호 전 의원 ⓒ프레시안(여정민) |
우상호 : 말 그대로 시원섭섭하다. 시원한 것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다. 대변인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다. 내가 놓치면 우리 당과 세력에 대한 기사가 왜곡되거나 축소되기 때문이다.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브리핑을 하기도 어렵다. 이제껏 맡았던 당직 가운데 가장 중압감이 컸다. 약하게 얘기하면 야당이 뭐하는 거냐고 하고, 너무 세게 얘기하면 맨날 반대만 하냐고 한다. 척후병 같은 자리였다.
섭섭한 것은 모든 이슈의 최전선에서 시원하게 살다가 그 현장을 떠나니 허전하다. 정치를 안 하는 것 같다. 은퇴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기자들이 전화를 안 하는 것도 서운하게 느껴진다. 그 금단 현상을 빨리 극복해야 할 텐데.(웃음)
프레시안 : 대변인 하던 시절의 민주당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여러 우여곡절도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우상호 : 아무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쫄딱 망했을 때다. 2006년 6월 지방선거 때 참패했었다. 수도권에서 구리시장 하나 됐다. 선거를 이렇게까지 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때 내가 정동영 의장 모시던 대변인이었다. 결과를 보고 경악한 사람들이 다 자리를 떠났다. 그렇다고 대변인인 나까지 떠날 수는 없었다. 텅 빈 자리에 나만 덩그러니 앉아 있는 당사를 카메라가 비추는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정말 당혹스러웠다.
프레시안 : 대변인을 그만두면서 언론과 '공범'이었다는 말을 했다. 대변인으로 언론과 공모한 것도 있었겠지만 본의 아니게 숨긴 것도 많았을 것 같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없나?
우상호 : 공범이라는 표현은 대한민국 정치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도 하지만 정치를 퇴행시키는 데도 언론의 역할도 있다는 얘기였다. 언론이 서로 싸움 붙이는 것 좋아하지 않나.
사실 기자에게 거짓말하거나 속인 적은 없었다. 물론 불리한 사실을 말하지 않은 적은 있다. 잘 알고 물어봐도 피하는 거다. 그럴 때는 기자들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언젠가 정세균 대표와 이강래 원내대표가 아침 회의에서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 고성이 오갈 정도였다. 당시 재보선을 앞두고 있었다. 이강래 원내대표가 먼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고 나머지 분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는데 사실 입단속이라는 게 통한 적이 없지 않나. 조마조마했다.
오후에 굳이 브리핑할 거리를 만들어서 내려갔다. 사실 기자들 동태 파악하러 간 거지. 한 기자가 '아침 회의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았다면서요'하고 슬쩍 묻더라. 속으로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놀랬지만 겉으로는 '그래? 난 모르겠는데. 아, 먼저 회의 나가신 건 손님 오셔서 그런 거야'라고 시치미를 뗐다. 다행히 더 묻지는 않았다. 알지만 보안이 필요해서 얘기 못한 경우도 있었다. 거물급 인사 전략 공천은 말할 수가 없었다. 전격 발표의 효과가 필요하니까 그럴 때는 물어보면 아예 다른 곳은 쳐다봤다. '그런 중대한 일을 나 같은 사람이 아나'고 마는 것이다.
프레시안 : 마지막 대변인을 정세균 지도부에서 지냈다. 정세균 전 대표가 재출마를 한다고 하는데 정세균 체제의 공과 과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평가해본다면?
우상호 : 내가 김근태,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4명의 대표를 모셨다. 그 가운데 3명이 이번에 출마한다고 알려졌다. 냉정하게 4명을 비교할 때 가장 공이 많은 사람이 정세균 대표다. 다 훌륭하고 독특한 리더십이 있지만 적어도 우리 당을 위해 이 정도의 성과를 만들어낸 대표는 없었다. 김대중 총재 이후 2년의 임기를 모두 채운 유일한 사람이다. 물론 주변의 변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 사람의 능력이다.
우선 정세균 대표는 두 번의 재보선과 한 번의 전국 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지난 60년 간 그런 적이 없다. 또 10% 초반대로 6년을 지지부진했던 당 지지율을 30%까지 끌어 올렸다. 선거야 한 번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정당 지지율을 올려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앞선 지도부들은 다 실패했던 일이었다. 그 성과를 작게 평가하면 안 된다. 우리가 포괄해야 할 국민들과 우리 지지층이 정세균 체제에서 비로소 통합된 것이다.
당내 계파도 불식됐다. 과거 계파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나. 인사할 때도 항상 동수로 했다. 계파들이 먼저 모인 다음에야 당 지도부가 모여서 결정할 수 있었다. 정세균 대표 때에 와서야 그런 관행이 사라졌다.
이런 세 가지 성과는 대통령 선거 패배 후 당 대회의 이슈였다. 정세균 대표의 공약이기도 했다. 물론 정세균 대표가 대권 후보로는 약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당을 안정시킨 성과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대권 행보는 박근혜 전 대표처럼 별도로 하는 게 맞다"
프레시안 : 오는 10월 3일 전당대회에 이른바 민주당의 '빅3'가 다 나온다고 한다. 비대위를 맡고 있는 박지원 대표도 "3명이 다 나와야 한다"고 했다.
우상호 :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번에 선출될 당 대표는 총선과 대선을 승리하기 위해, 즉 민주당을 수권 정당으로 만들기 위한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당을 맡아야 한다. 대권 꿈이 있는 사람이 당을 맡으면 당이 때로는 야권 전체가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할 때 그런 결단을 하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권 후보가 이번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정동영, 손학규 캠프에 가지 않고 정세균 전 대표를 도우려는 것도 그런 이유다. 대권 행보는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처럼 별도로 하는 것이 맞다.
민주당은 3가지 목표를 가지고 가야한다. 우선 당의 진보개혁성을 강화해야 한다. 대선과도 관련돼 있지만 그에 앞서 당의 체질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두 번째, 야권 연대 혹은 통합에 있어 훨씬 더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당의 정강 정책에 있어 보편적 복지와 평화 부분을 더 강화해야 한다.
사실 이 3가지는 모두 논쟁적인 얘기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하느냐에 따라 향후 전개될 상황도 달라진다. 대권을 꿈꾸는 사람이 당 대표가 되서 자신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그런 논의를 끌어갈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민주당은 이제 비로소 어려운 터널을 벗어났다. 지금이 바로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대권 후보가 당을 맡으면 전면적 수술도 못한다. 칼도 못 든다. 대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당은 현재 상태의 유지에만 급급한 채, 지방선거에서 얻은 곡물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대권 후보가 당 대표가 되면 본인 자신에게는 조금 더 유리할지 몰라도 민주당의 발전에는 도움이 안 된다.
지난날을 봐도 그렇다. 2006년 전당대회에서 장관하던 정동영, 김근태가 당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대선도 아닌데 전당대회가 대선 전초전이 됐다. 결국 2등한 김근태의 위상은 추락했다. 1등한 정동영도 지방선거 패배로 인물의 가치와 권위가 현저하게 훼손됐다. 유력한 두 명의 대권 후보 모두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그 길을 가자는 것이다. 무모하고 바보 같은 짓이다. 존재가 잊혀지면 안 되지 않냐고, 남들 다 나오는데 나만 안 나올 수 없다는 논리가 있지만 이번 전당대회는 대선 후보 경선이 아니다. '빅3'가 다 나오면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 유력한 대권 후보를 약화시킬 뿐이라고 확신한다.
프레시안 : 여권은 벌써부터 잠룡들의 싸움이 시작됐다고 한다. 김태호 총리 내정자의 등장도 새로운 잠재적 대선 후보의 등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민주당도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다양한 대선 후보군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프레시안(여정민) |
프레시안 : 하지만 여권에서는 이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다고들 한다. 민주당 대권 후보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행보가 무엇인지 고민하다 보니 당 대표 선거 출마를 생각하는 것 같다.
우상호 : 물론 당권을 쥐면 대선 행보가 더 편하다. 하지만 당권이 유일한 길은 아니다. 손학규 전 대표의 지지율이 올라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권을 쥐고 있어서가 아니라 춘천에서 기존 여의도 정치와 다른 행보를 보여서 지지율이 올라간 것이다. 자신의 먹을 것도 나눠주고 단일화가 깨지면 직접 나서 단일화도 이뤄줬다. 손 전 대표의 그런 행보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의 마음을 열었다.
대권을 꿈꾸는 분들은 더 큰 행보를 해야 한다. 고통 받는 서민이 얼마나 많은가. 대통령이 되고 싶으면 그런 지역을 구석구석 찾아가서 손도 내밀고 공부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권을 못 쥐면 대선 가도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은 기획력과 추진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대권 후보들이 편한 길만 가려하는 것은 실망스럽다. 물론 잠깐 화제에서 잊혀질 수는 있다. 하지만 잠시 잊혀지는 것이 두려우면 대통령은 어떻게 하나. 지금은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못 주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빅3'가 나란히 앉아 있으면 그 회의가 어떻게 될까?
프레시안 : '빅3'의 출마 외에 또 다른 전당대회 이슈가 지도체제 문제다.
우상호 : 지도체제는 '유불리'로 결정할 문제가 절대 아니다. 역사적으로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명된 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도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순수집단지도체제는 열린우리당 시절에 해 봤던 것 아닌가. 1인 독재 타파에는 성공했지만 그야말로 무능한 체제가 됐다. 2등은 1등을 인정하지 않고, 3등과 4등도 서로의 지도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오늘 반드시 결정해야 할 일이 3주가 되도록 싸움만 하다가 결정을 못 내렸다. 그래서 다 실패했다. 이런 당을 만들자는 주장이 과연 제정신인가? 안상수와 홍준표가 매일 싸우는, 한나라당 따라하자는 것이다.
'빅3'가 나란히 앉아 있으면 그 회의가 잘 될까? 그 지도부 회의에서 과연 무엇을 결정할 수 있을까? 모두 자신에게 유불리만 따질 것이 뻔하다. 예민한 문제는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가장 무난한 결정만 반복될 것이다. 국민참여당이나 민주노동당과 통합을 어떻게 결정하나? 논쟁만 계속하다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런 지도부를 만들자는 주장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나 뿐 아니라 우리 세대 정치인들은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집단지도체제가 도입될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비타협적으로 싸울 것이다.
현재 집단지도체제 주장하는 사람들도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는 데는 별로 이견이 없지 않나. 이번에 당 대표가 된 사람이 대권에 뜻이 있으면 결국 내년 12월에는 물러나야 한다. 2012년 총선 공천권도 행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어차피 12월에 그만둬야 하는데 1년짜리 당 대표 하려고 왜 굳이 나오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프레시안 : 지금 민주당에게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상호 : 국민이 민주당에 요구하는 것은 체질개선이다. 더 젊어지라는 것이다. 또 야권 연대, 혹은 통합을 하라는 것이 최근 두 번의 선거에서 드러난 국민의 바람이다. 그런데 야권 통합에 적극적인 사람이 과연 누구였나. 정말 많은 사람이 못 하게 했다. 대변인으로 직접 지켜봤다.
대권 후보 될 사람은 못 한다. 지구당 대의원 표를 꽉 잡고 있는 지구당 위원장에게 양보를 요구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대권 후보 꿈꾸는 사람이 그걸 할 수 있나? 지방선거는 그나마 자리가 많았지만 국회의원 선거를? 못 한다. 차기 리더십은 누가 가장 연합에 적극적일 수 있는지가 기준이 돼야 한다. 야권 연대 없이 총선도 대선도 이길 수 없다.
2012년까지는 '빅텐트'가 현실적인 대안이다
프레시안 : 야권 연합 혹은 통합을 얘기했는데,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는 민주당 중심으로 이른바 '반(反) MB 연합'이 현실화됐다. 그와 별도로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야권 연합의 구체적인 범위와 상은 어떤 것인가?
우상호 :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3정당 체제다. 보수적인 정당, 자유주의 정당, 그리고 진보적 색깔을 가지고 있는 3개 정당이 경쟁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사안 별로 진보정당과 자유정당이 공존하고 연합할 수 있다. 서로 괴롭히고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국민의 이해와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고, 국민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줄 수도 있다. 물론 전제는 진보정당과 자유정당의 연대가 대단히 자유롭고, 그에 대해 진보정당이 유연하게 열려 있을 때다.
ⓒ프레시안(여정민) |
하지만 대한민국 정치 문화에서 이것이 정착되기는 어렵다. 민주당은 내부 문제 때문에 어렵다. 진보정당은 자신의 고민 때문에 쉽지 않다. 지도부가 누구냐에 따라도 다르다. 선거 때마다 치러야 할 비용과 당내 갈등이 상당하다. 불안한 동거인 셈이다.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3당 체제'가 제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2012년까지는 '빅텐트'가 맞다고 본다. '빅 텐트' 안에 진보 블록을 따로 만드는 것이 좋다. 진보 블록의 정치적 활동의 자유를 주되, 당은 하나의 큰 당으로 뭉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걱정들은 있다. 오히려 더 비효율적이 되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이다. 진보 블록의 경우 소수일 수밖에 없는데 다수결에 기초한 민주주의 원리를 따르려고 할까, 진보 블록의 위상이 훼손당할 경우 내부 논리를 어기려 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있다. 진보 블록은 또 소수파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지 두려울 것이다. 당연히 배려가 필요하다. '지분 정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약자인 여성에게 20% 가산점 주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필요하다면 총선에 한해 지분을 약속하고 통합하는 방법도 있다. 임시적인 것이고 민주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지만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통합을 하기로 한다고 해도 국민참여당과 민주당이 먼저 통합한 다음에 진보 블록과 협상을 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 참여당 일부의 주장대로 진보 블록이 먼저 통합을 하고 민주당과 관계설정을 할 것인지의 문제는 남는다. 단계적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왜냐면 일단 통합한 곳에서 내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다 보면 다른 곳과의 연합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다. 통합을 한다면 한꺼번에 빅 텐트로 해야 한다. 안에서 싸우는 게 제일 낫지, 재보선 때도 보면 밖에 있으면 너무 힘들다. 지방선거 때의 절반도 못 했다.
486세대, 노무현의 단절 이을 정치 세력
프레시안 : 여야 모두 세대교체가 화두다. 민주당이 먼저 지방선거를 통해 성공했다. 한나라당은 이번 개각에서 40대 후반, 50대 초반의 신인 그룹이 떠올랐다. 여야 모두 세대교체에 성공할 수 있을까?
우상호 : 성급한 얘기일지는 모르지만, 대한민국 정치의 흐름을 보면 시기마다 걸출한 인물이 있고 그 시기에는 그 세력이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필연이 있다. '양김(김영삼, 김대중)'은 오랜 유신독재에 맞서 싸우면서 형성된 전투적 지도자였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이 만들어졌고 그 외곽에는 재야라는 독특한 세력이 있었다. 양김의 밑에는 감옥 갈 각오까지 한 정치인 집단이 있었다. 그리고 양김이 30년을 했다.
그 다음을 잇는 정치 세력이 없었다. 일부에는 김근태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이 있고, 한화갑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동교동계가 있었지만 이 두 세력을 제치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됐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정치세력을 형성한 사람이 대선 후보가 돼야 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력도 없었고 심지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적자도 아니었다. 노무현 당선은 대한민국 정치의 혁명적 단초를 가져 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정치세력이 갖고 있는 공과와 단절할 수 있었던 세력이었다. DJ의 유산을 가려서 받기 어려웠던 세력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야당의 흐름이 다양화된 계기기도 했다. 386의 선택권도 다양해졌다.
사실 정서와 가치를 놓고 보면 노무현이 386의 것을 가져갔다. 가치와 정서에서는 우리가 집권한 셈이었다. 그런데 노무현은 그 뒤를 이을 정치세력을 만들고 그 법통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세력을 만들지 못한 것은 이후 범야권이 정치적 중심 세력을 통해 안정적으로 모든 사안을 다룰 수 없는 불안정성을 만든 이유가 됐다. 정통 민주화 세력도, 정통 호남 세력도, 노무현을 필두로 한 개혁 세력도 모두 약화된 상태의 연합이 지금 야권의 실체다. 불안한 동거다.
이 뒤를 이를 강력한 정치세력이 이번에 발탁된 이들이다. 개인으로는 우리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지만 세력은 없다. 386, 요즘은 486이라고 하는 세력은 정치권에 와서 친해진 결사체가 아니다. 20년 전 목숨을 걸고 같이 거리를 뛰어다녔던 관계다.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개개인 간에는 경쟁 관계도 있고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486으로 불리는 정치 부대가 향후 15년 정도 우리 정치를 이끌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필연이다. 현재 정치권에 있는 40여 명 정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들어올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과거와 다른, 민주적으로 잘 훈련돼 있고 전문성도 있고 각종 네트워크도 있는 정당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공통의 먹잇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통의 가치를 위해 공동의 실천을 할 수 있는 세력이다. 아직은 과도기적이지만 지난 지방선거에서도 국민의 선택은 이미 그랬다. 앞으로 나는 그 세대를 묶는 일을 하려고 한다. 우리 정치의 미래 대안 세력을 조금 더 조직화, 집단화하려고 한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만들 것이다.
프레시안 : 386 담론은 굉장히 오래 전부터 나왔다.
우상호 : 사실은 우리는 그런 기호화된 담론을 싫어한다. 386이라고 하면 감옥 갈 때 가슴에 달았던 수번 같다. 하지만 언론이 쓰니까 할 수 없지 않나. 다른 선배들처럼 '6월 항쟁 세대'로 불러달라고 매번 주장하는데 안 써준다. 사건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것 같다.(웃음)
어쨌든, 우리 세대가 향후 대한민국 정치의 15년을 책임져야 한다면 무엇으로 책임질 것인가를 요즘 고민하고 있다. 20여 명이 매달 한 번씩 모여서 1년 째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있다. 1차적으로 좋은 징조는 이 사람들이 지난 4-5년을 모두 반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한국 정치를 조금 더 진보적인 색깔로 가도록 견인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공감대가 있다. 또 앞으로 무엇을 하든, 같이 하자는 약속도 돼 있다.
프레시안 : 최근 민주당을 보면 진보가 이미 대세인 것 같다. 조금 더 왼쪽으로라는 흐름에 대해 그 세력은 어떻게 평가하나?
우상호 : 기존에 있던 우리 모임을 원래 8월 말 경 공식화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전당대회 끝난 뒤에 하려고 한다. 전당대회에서 우리 담론이 이용되는 것도 싫고, 개개인의 활동의 자유도 주기 위해서다. 정동영 의원까지 '담대한 진보'를 얘기하는데 사실 이 담론은 이인영 전 의원이 만들어낸 용어다. 정 의원이 아이디어를 가져간 것이다.
다들 진보를 얘기하지만 안 믿는다. 또 한 번 풍파가 오면 다 또 도망갈 게 뻔하다. 언론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선거에서 지면 국민이 보수화 됐다고 하고 몇 달 뒤에 이기면 국민이 진보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게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항상 변화를 선택한 것이다. 퇴행을 선택한 적이 없다. 지난 대선에서도 국민의 눈에는 이명박 후보가 변화로 느껴졌던 것일 뿐이다. 정동영 후보는 퇴행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사실이 뼈아프다. 우리가 변화로 보이지 않고 낡고 후진 것으로 보였다는 것. 그것을 반성해야지 나는 진보인데 안 찍어준 네가 보수여서 그렇다고 하는 것은 정치인의 자세가 아니다.
프레시안 : 우상호 본인 역시 경쟁력 있는 486이다. 대변인 그만두고 앞으로 계획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상호 :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30-40대 정치 그룹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잘 나가는 전현직 의원끼리의 모임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치를 일굴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특히 영남과 같은 취약지역을 보고 있다. 지역주의의 벽을 넘어 정책과 노선으로 차별화되는 정당 구도를 만들고 싶다. 실질적인 전국 정당은 우리 세대에서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한나라당의 젊은 그룹도 '젊은 보수'의 가치를 들었으면 한다. 그러면 호남에서도 먹힐 수 있다. 우리는 개혁적 기치를 들고 영남으로 갈 것이다. 호남에서도 새로운 기치를 들고 움직일 젊은 정치인을 만들어야 한다. 지난 7.28 재보선에서 오병윤 민주노동당 후보의 선전은 우리가 반성해야 하는 이유다.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니고 누군가 꾸준히 독려하고 움직여야 한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내부, 외부에서 함께 싸울 것이다.
두 번째로 국민과 소통하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다. 블로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대변인 하는 동안은 하지 못했다.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까.
MB, 말로만 개혁적 보수…실제로는 김용갑 노선
프레시안 : 계속 민주당 얘기만 했는데, 대변인이 아닌 정치인 우상호에게 최근 한나라당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다. 야당은 "내용이 없다"고 하지만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친서민 행보가 호응을 얻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프레시안(여정민) |
물론 저 쪽은 대단히 잘 기획된, 세련된 정무 그룹이 있다. 국민의 인식을 읽는 능력이 결코 없지 않다. 참모 그룹은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지방선거 패배 이후 일부 받아들인 것 같아도 이 대통령이 변한 것은 아니다. 이번 개각에서도 드러난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오로지 자기 관리만 있다. 아무리 비판을 해도 전반기와 후반기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전반기에 차관했던 사람을 장관 시키는 것이 변화인가? 영남 출신의 자기 친위대를 계속 돌려쓰는 것이 변화인가?
이명박 정부는 총리만 이미지로 쓴다. 총리만 정무적 판단으로 바꾸는 것이다. 장관은 무조건 직할 통치다. 실제 일은 총리한테 시키지 않고 청와대 수석을 통해 장관을 직접 관리한다. 기업 그룹으로 말하자면 부회장은 이미지용으로 앉혀 놓고, 기획조정실이나 구조본에서 직접 자회사나 심지어 하청 계열사까지 모두 관리하는 것이다. 이런 대기업 운영 방식으로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
여당이 진정한 의미의 보수 개혁을 펼치고 있다면 야당이 더 힘들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상황을 은근히 기대한다. 그래야 더 정책경쟁이 치열해진다. 이명박 정부가 소위 개혁적 보수의 길을 걸었다면 대한민국 정치가 굉장히 발전했을 것이다. 나라의 체질도 개선됐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영남 수구 우파 그룹의 공격을 두려워했다. 보수 개혁을 하지 못했다. 담론과 아젠다는 개혁적 보수인데 실제 정책은 전부 수구 우파였다. 최소한 개혁적 보수였다면 외교안보 분야에서 남경필 의원 수준은 됐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김용갑 전 의원의 길을 갔다.
개혁적 보수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공기업 개혁, 행정제도 개편 두 가지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에서 다 실패했다. 공기업은 개혁은커녕 부실 덩어리를 만들었다. LH공사도 그렇고 수자원공사도 그렇다. 공기업은 인력을 적절하게 재편해서 새로운 영역의 사회복지 공기업을 많이 만들었어야 한다. 행정구역재편도 완전히 '짝 짓기' 식으로 했다. 짝 지을 힘이 없는 나머지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원칙이 없었다.
집권 하반기의 국정 운영 기조를 주목한 것은 이명박 정부에게 진보 정치를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조금 더 따뜻한 보수도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경쟁만 강요하지 않고 진정으로 '노블레스 오블레주'를 실현하는 보수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같은 보수여도 밑바닥의 민초는 건강한 사람들이 많은데 위로 올라갈수록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다.
박근혜, 정치 스타일엔 동의하지 않지만…
프레시안 : 여권 주자 가운데 유력하다고 하는 박근혜 전 대표가 복지를 강조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가 '개혁적이고 따뜻한 보수'가 될 수 있을까?
우상호 :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 스타일과 리더십 패턴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구시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분이 갖고 있는 정치적 감각과 세상을 읽는 능력은 인정한다. 보수이면서도 복지를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다. 복지를 얘기할 때는 국민의 삶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시대 흐름이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 세계 12위 경제 대국인데 이제서야 복지를 얘기하는 것은 이미 늦었다. 그만큼 우리 정책 결정권자들이 복지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분명히 필요하다. 나는 그런 경쟁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긴 시간 얘기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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