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라스베이거스는 누가 뭐래도 세계 ‘카지노의 전설’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황량한 사막이 오늘날과 같은 ‘신화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로 천지개벽한 것은 ‘전설적인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피아의 검은 돈도 일조했지만 피로 얼룩지면서도 상상을 뛰어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접목하고 혁신적인 법안 등을 통해 서부 개척시대보다 더 다이내믹한 스토리와 함께 지구촌 최고의 도시가 탄생했던 것이다.
1905년 5월 15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리스~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간 철도를 운영하던 회사가 부지를 매입해 중간 기착지 역으로 라스베이거스는 탄생하였다.
중간 기착지 역이었던 ‘간이 마을’ 라스베이거스는 도박과 환락의 도시를 거치면서 불과 112년 만에 연간 43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쇼핑, 오락, 관광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해발 1920미터 사막의 분지에 세계 최고 카지노 도시의 기초를 닦는데 기여한 인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해 마피아의 보스 ‘벅시 시걸’,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등 3인방을 꼽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 경제공항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후버댐(1931~1936년)을 건설토록 하면서 라스베이거스에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 받는다.
세계 최대 토목건설 현장 중 하나로 알려진 후버댐은 당시 실업자들의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해 건설 되었지만 후버댐이 완공된 이후 실업자가 된 노무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라스베이거스에 몰려 들었다.
학자들은 후버댐이 건설되는 바람에 라스베이거스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후버댐이 착공하던 1931년 네바다 주는 미국에서 가장 쉽게 이혼할 수 있는 ‘이혼법’과 카지노 도박장의 합법화가 동시에 만들어졌다.
<1930년대 대공황이 몰아닥치자 네바다 주는 두 가지 중요한 법을 제정했다.
하나는 이혼법 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지노를 합법화 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것 이었다.
카지노 합법화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은 로스앤젤레스 마약 단속대장이었던 ‘가이 맥커피’였다.
불법 카지노의 운영자이기도 했던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카지노 단속이 심해지자 라스베가스로 건너가 페어로 다이스클럽을 인수하고 카지노를 합법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결국 네바다 주에서 카지노 합법화가 이루어지자 라스베가스에는 엘 란초 베가스, 프론티어, 아파치 클럽, 볼더 클럽 같은 카지노들이 속속 들어섰다.
1945년까지 엄청난 도박비가 라스베가스의 현금출납기로 흘러 들어왔고 사업가와 투자가들이 새로운 도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마피아와 라스베가스의 허니문 시대’에서>
미국 뉴욕의 대표적 마피아 보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시걸은 1946년 ‘플라밍고’ 호텔을 건립하면서 마피아 자본이 라스베이거스 진출에 물꼬를 튼 인물이 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벤저민 벅시 시걸을 ‘라스베이거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벅시의 인생은 헐리우드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마침내 1991년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벅시’(감독 베리 데빈슨)를 제작해 이듬해 3월 개봉했다.
본명이 ‘벤자민 시걸바움’으로 알려진 벅시는 마피아 출신이지만 유태인 태생답게 경제흐름을 잘 읽는 인물로 알려졌다. 그가 세운 ‘플라밍고’(홍학) 호텔은 애인의 애칭을 따서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뉴욕에서 살인청부업자로 명성을 날렸지만 조직에서 손을 씻고 사업가로 변신한 뒤에는 합법적인 사업을 펼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영화배우처럼 멋진 의상을 걸치고 영국 신사 같은 세련된 매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지노 사업가의 멋진 꿈을 키웠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카지노 때문에 4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특히 총을 잘 쏘는 저격수로 알아줬던 그는 역설적으로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눈을 감아야 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지노 게임을 하면서 불편한 문제점을 파악한 그는 멋진 카지노와 호텔을 짓는 사업을 구상 하였다. 그의 사업은 술과 여자, 도박을 조합해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1945년 벅시는 마피아 조직을 움직여 ‘팀스터노동조합’의 연금기금을 대출받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냉난방 시스템과 객실마다 샤워기를 갖춘 라스베이거스 초대형 호텔을 건립했다.
<플라밍고는 주변이 야자수로 장식된 잔디밭과 정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입구에서는 멋들어진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방문객들의 주의를 끌 만한 수영장, 헬스클럽, 테니스코트, 골프장, 40마리 정도의 말이 있는 마구간 시설과 전시실, 각종 상점 등이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다.
낮고 공간이 넉넉한 호텔의 객실 수는 105개에 불과하지만, 그보다 더 호화로울 수는 없었다. ‘생각의 혁신 라스베이거스에 답이 있다’에서>
약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라스베이거스 최고 시설의 플라밍고 호텔, 카지노가 1946년 12월 26일 개장했지만 겨울비와 추위 때문에 개장식은 엉망이 되었다. 초청받은 저명인사와 자리를 빛내 줄 관객들이 참석을 못했기 때문이다.
호텔 카지노의 출발이 어긋나면서 개장이후에도 매출이 죽을 쑤자 플라밍고 호텔은 파산위기에 몰렸다.
총 650만 달러가 투자된 플라밍고 호텔카지노사업이 실패하면서 벅시는 LA 비버리힐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마피아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1940년대 라스베이거스에 마피아의 ‘검은 자본’이 흘러들어 오는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이가 바로 벤자민 ‘벅시’ 시걸이었다.
그는 뉴욕 패밀리의 자금을 라스베가스로 끌어들여 자기 여자친구의 별명을 딴 ‘플라밍고’ 호텔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사가 지연되면서 100만 달러 이상의 예산이 초과되고, 호텔 완공 이전에 650만 달러를 투자하게 된 뉴욕 마피아는 벅시 시걸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돈을 쓴다고 불평했다.
벅시 시걸의 친구, 찰리 ‘럭키’ 루치아노와 마이어 랜스키는 결국 벅시의 제거를 결정했다. 1947년 6월 20일 벅시는 늘 하던 대로 이발을 하고 집에 들어와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밤 10시 30분 총성이 터지면서 벅시의 얼굴에서 눈이 날아갔고 다음 샷은 벅시의 갈비뼈를 부수고 폐를 뚫었다.
42세의 벅시는 마피아 역사상 최초로 원거리에서 저격된 시체가 되어 쓰러진 것이다. 랜스키가 보낸 암살범은 뛰어난 총잡이 벅시에게 섣불리 접근했다가 오히려 당할까봐 라이플을 사용한 것이다.
시걸이 사라지자 동부의 여러 패밀리가 라스베가스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라스베가스의 기업가들은 갱단과 손을 잡고 대규모 카지노 건설에 나섰다. ‘마피아와 라스베가스의 허니문 시대’에서>
시걸이 암살된 뒤 플라밍고 호텔과 카지노를 인수한 마피아 가운데 한 명인 ‘앤소니 스필로트로’ 역시 마피아에게 살해된 뒤 인디애나주의 한 옥수수 밭에 버려졌다.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라스베이거스의 투자 자본은 은행에서 대출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부분 팀스터노동조합의 연금기금을 대출받아 건설되었다.
팀스터 연금기금은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 연금기금은 1940년대부터 라스베이거스 성장에 확실하게 기여를 했다.
<은행은 아직 확실한 사업 카테고리라 할 수 없고, 정통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사업에 큰돈을 대출해 주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팀스터 연금기금이 유일한 돈줄이었다.
팀스터 연금기금을 주무를 수 있는 것은 팀스터 노동조합을 장악한 마피아들이었다. 등기부 상 카지노 건설 프로젝트의 대표자는 마피아가 아니었으나, 그들이 팀스터 연금기금을 대출받을 수 있도록 안배해준 자들은 막후에 자리한 마피아들이었다. 마피아는 그를 빌미로 주인행세를 한다.
벤자민 시걸이 지은 플라밍고 호텔 및 카지노 역시 팀스터 연금기금을 대출받아 건설되었다. 안과의사 겸 마피아 연구가 안혁 저 ‘마피아’에서>
시걸이 암살당한 바로 다음날 마피아가 플라밍고 호텔 카지노를 접수했고 이듬해부터 경영 정상화에 성공했다.
플라밍고 호텔을 시작으로 마피아 자본은 1948년 9월 선더버드, 1950년 4월 데저트 인, 1952년 10월 사하라, 12월 샌즈, 1955년 4월 리베에라, 5월 듄즈 호텔 카지노를 차례로 개장했다.
또 1956년 5월 프레몬트, 10월 하시엔다, 1957년 4월 트로피카나 호텔&카지노, 1958년 7월 스타더스트호텔&카지노들도 차례로 마피아 자본에 의해 오픈 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마피아 자본은 끊임없이 라스베이거스에 수혈 되었다.
마피아가 라스베이거스를 장악하는 과정은 서부 개척시대 백인들이 인디언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형태와 마치 흡사했다.
라스베이거스에 카지노가 속속 개장되자 1959년 네바다 게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그해 3월 30일 카지노 허가와 운영규정을 만들어 본격적인 규제에 나섰다.
1920년부터 14년간 ‘금주법’으로 ‘떼돈’을 번 경험을 가진 마피아들은 도박산업에 군침을 흘리며 팀스터 노동조합의 연금기금을 장악하였다.
미국에서 마피아가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술로 인한 병폐를 막겠다며 정부가 만든 금주법이 역설적으로 마피아의 비약적인 성장을 돕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 출신 마피아는 금주법이 해금되자 불법도박과 대출(사채), 마약밀매 경험 등을 살려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도 진출해 막강한 권한을 행사 하였다.
<마피아는 카지노에서 매출금액이 집계되기 전에 현금을 빼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업 이었다. 스키밍이다. 이렇게 해서 1950년대 말 마피아가 라스베이거스에서 거둬가는 돈은 하루에 1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1960년대에도 라스베이거스 사하라호텔 카지노, 리비에라 호텔 카지노, 프레몬트 호텔 카지노, 하시엔다 호텔 카지노, 스타더스트 호텔 카지노는 모두 마피아의 입김에 있었다.
1973년 오일쇼크가 오기 전까지 이 시기가 라스베이거스에서 마피아의 최고 전성기 였다. 안혁 저 ‘마피아’에서>
샌즈호텔은 당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영화배우 겸 가수인 ‘프랭크 시나트라’를 카지노호텔에서 공연토록 해, 카지노 고객 유치에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선보였다.
카지노에 돈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샌즈 카지노의 CEO(조셉 스태처)는 1953년 ‘지상에서 영원으로’ 영화로 인기절정의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호텔공연을 제안했다. 시나트라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공연조건은 1주 공연에 10만 달러의 출연료를 지급하고, 호텔숙식 무료, 하루 카지노 게임비로 3000달러의 칩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영화에 출연하거나 외부 공연 일정이 있을 경우 호텔공연을 양보할 수 있기도 했다.
시나트라가 머뭇거리자 조셉 스태처는 샌즈 카지노 주식의 7%를 시나트라에게 제공하고, 추가로 2%의 주식을 7만 달러에 매수하도록 하는 특혜를 제공했다.
시나트라가 13년간 샌즈호텔에서 공연을 하는 바람에 샌즈 카지노는 시나트라 공연을 보러 온 관광객과 겜블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목소리와 얼굴 덕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거부가 된 시나트라는 1960년 네바다주 타호 호숫가에 위치한 칼 네바 홋지 및 카지노를 인수하면서 카지노의 기업인 반열에도 올랐다.
시나트라는 라이브 가수이자 음반 아티스트, 라디오와 영화, TV에서 사실상 20세기 미국의 모든 연예 매체에 가장 많이 소개된 인물이었다. 그는 애바 가드너와 미아 패로라는 전설적인 여배우와 결혼하는 등 네 번 결혼할 정도로 화려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1998년 5월 14일 시나트라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라스베이거스 상당수의 호텔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10여 분가량 화려한 네온사인을 소등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나트라는 라스베이거스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수도로 만든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시나트라의 공연이 성공한 이후 ‘팝의 전설’이라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무명시절인 1956년 4월부터 뉴 프런티어 호텔에서 데뷔하면서 명성을 쌓아 올리게 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인기절정이던 1967년 5월 1일, 라스베이거스 인터내셔널호텔에서 프리실라 보리우와 올린 결혼식은 ‘세기의 결혼식’이라며 전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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