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풍미했던 근대화론은 서구의 시각에서 개발된 논리다. 근대화론에 의하면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도 과거에는 저발전된 시절이 있었고 후발 제3세계 국가들도 서구 역사 발전의 경로를 답습하면 산업화된 사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근대화론은 서구 중심적 시각에 입각한 이론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서구에서 유학한 학자들에 의해 한국의 사회과학계에 폭넓은 저변을 확보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서 근대화론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에서 개발된 종속이론 등 제3세계 이론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종속이론은 근대화된 서구사회는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당한 적이 있는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제3세계 국가들과 역사적 경로 자체가 다르다는 주장을 편다. 저발전 국가들의 저발전은 피식민 지배의 경험에서 유래했고, 서구 열강들의 착취에 기인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제3세계 국가들의 발전은 질적 발전이 아닌, 양적 성장에 불과한 '저발전의 발전'으로서 오히려 종속의 심화를 결과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 종속이론의 핵심이다.
종속이론은 1980년대 대학가에서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의 독재 등 국내 정치상황과 맞물리면서 운동권의 이론적 논거로 작용했다. 근대화론과 종속이론은 한물 간 사회과학 이론이지만 서구적 시각과 제3세계 국가의 시각을 반영하는 상징적 패러다임이었다. 그러나 종속이론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확산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영향은 서구와 저개발 국가와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다.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안보 이데올로기가 군사정권을 지탱하는 양대 축 이었던 시절의 성장 위주의 정책은 기득권 구조를 공고화했고, 사회적 격차의 심화를 결과했다. 이는 특권 계층의 형성과 불공정한 경제구조로 이어졌고, 외형이 성장할수록 과도한 경쟁에 노출되고 삶의 질은 오히려 떨어지는 역설에 직면했다.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은 더욱 노골화하고 가치지향적 행복감은 저하되었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는 점점 끊기고 사회는 상위 계층을 위한 구조로 공고화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사람 중심 경제와 소득주도 성장을 내세우고 있다. 사람 중심 경제와 소득주도성장은 중산층 이하 계층의 소득이 늘어남으로써 소득격차가 완화되고 상대적 박탈감이 해소될 때 의미를 갖는다. 정치적으로 절차적 차원에서의 형식적 민주주의에 그치지 않고 사회경제적 평등과 기본권이 보장되는 실질적 민주주의와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서 기득권의 반발과 저항을 극복해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하위 소득자들이 고액의 연봉자가 될 수 없는 구조적·사회적 요인은 급속 성장 과정에서 특혜와 반칙, 부정의와 성장 지상주의의 경제적 부산물인 부동산 투기 등의 불로소득이 우리사회의 자산의 근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글로벌리즘 시대에 지구화가 강조되지만 개별국가 간 격차가 심화되는 현상과 국내에서 고소득층과 하위 계층 간의 경제문화적·사회적 격차가 굳어지는 현실은 동일한 인과관계로 파악할 수 있다. 통찰과 기득권 중심의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는 전략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공정과 정의의 실현은 사회적 프레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개혁을 추구하고 과거의 프레임을 바꾸려면 국민을 설득해야 하고, 기득권의 저항에 맞설 수 있는 도덕적 권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규범과 당위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내각을 구성한 장관들의 도덕 수준과 삶의 궤적이 시민들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하느냐는 두고두고 정권적 차원에서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현재의 정당체제가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도 우려스럽다. 선거는 아직도 거의 3년이나 남은 현실에서 유권자 연대에 의한 정계개편도 불가능하다. 임기 초 지지율이 높을 때 추동하지 않으면 개혁과 적폐청산은 언감생심이다. 시간이 지나면 레임덕에 직면하고, 선거 국면에서의 보수와 진보 진영논리의 대결 구도가 다시 기득세력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특단의 방략이 요구된다. 근대화론과 종속이론은 학문적으로 이론적 영향력을 잃었지만 근대화론적 사고에 기초한 패러다임의 공세는 여전히 위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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