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카지노의 전설’로 알려진 전락원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카지노 분야의 선각자이면서 동시에 사회공헌사업을 가장 먼저 실천한 인물로 업계는 기억하고 있다.
지난 2004년 11월 3일 전락원 회장이 별세하자 한 언론은 다음과 같이 ‘부고기사’를 냈다.
<고 전락원회장은 1927년 5월 16일 서울 종로구 계동에서 독실한 목회자였던 부친 고 성화(聖化) 전주부 목사와 계성옥 여사의 2남 5녀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1972년 그룹의 모태가 된 ㈜파라다이스를 창업한 뒤 호텔사업, 카지노, 유통, 제조, 건설, 엔터테이먼트 등 현재 11개 법인 15개 사업장의 우량 중견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특히 1972년 파라다이스호텔 제주, 1974년 케냐의 파라다이스 사파리파크호텔, 1981년 파라다이스호텔 부산, 1987년 파라다이스호텔 도고, 2000년 파라다이스호텔 인천 등을 설립해 국내 토종 브랜드인 파라다이스호텔 체인을 구축, 국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세계적 호텔에게 주어지는 리딩호텔인 파라다이스 부산과 2002년에 최고호텔의 대명사인 릴레샤또(Relais &Chateaux)에 가입한 제주호텔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국내 호텔업계를 선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68년에는 국내 최고의 워커힐카지노를 설립해 한국에 카지노 산업을 정착시켜 한국 관광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전 회장이 뛰어난 사교술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 고인은 특히 1974년 케냐 나이로비에 현지 투자법인을 설립한 후 1976년에는 카지노 업체를 개관해 케냐에서 국빈급 대접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 스키협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 스포츠의 저변 확대에 기여했던 전 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아프리카 표를 획득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인정받아 1988년 2월 정부로부터 '사회발전 유공훈장' 을 받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앞두고 아프리카의 한국 개최 지지를 유도하는 데 막후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전 회장은 카지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파라다이스 기업공개를 적극적으로 추진, 2002년 11월에는 코스닥 등록에 성공했다. 파라다이스는 코스닥 등록 후 뛰어난 실적과 투명한 경영, 그리고 주주우선 정책을 유지하며 증권가 애널리스트들 뿐 아니라 외국 투자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전 회장은 파라다이스를 '도덕과 윤리의식을 갖춘 기업'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기업의 사회공헌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 결과 2000년 3월 국세청으로부터 ‘모범 납세법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기업본연의 역할 이외에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헌을 위해 680억 원을 출연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헌에 많은 역할을 했다.
전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파라다이스복지재단은 1994년 설립 후 장애아동에 관련된 전반적인 교육, 치료, 복지향상을 목표로 특성화된 연구와 지원사업을 펼치는 등 국내 공익재단 중에서도 분명한 지향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화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고인은 동서문학을 통해 문인들에게 순수문학의 장을 제공했고, 예술에 재능있는 인재발굴을 위해 계원예술고등학교와 계원조형예술대학을 설립하는 등 육영사업에 힘썼다. ‘머니투데이’ 2004.11.3. 보도 >
당시 파라다이스 전락원 회장의 장례식은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회사장으로 진행했다.
전락원 회장이 별세한 1년 뒤인 2005년 11월 1일 ‘드높은 이상향을 꿈 꾼 도요새’라는 제목의 추모집을 발간했다.
전락원 회장 추모집에는 영화인, 교수, 아나운서, 언론인, 예술가 등 각계 48명의 명사들이 대거 참여해 평소 예술과 문학, 자연을 사랑하고 와인을 좋아했던 낭만주의자로 그를 추모했다.
영화배우 김지미는 지난 7월 3일 서울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데뷔 60주년 특별전 ‘매혹의 배우, 김지미’ 개막식에 참석해 “60년간 700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700가지 인생을 살았다”고 자신의 인생을 평했다.
그런 김지미씨는 추모집에서 “배우보다 멋진 남자”로 추모하며 “예술인들과 만나면 ‘대포나 한 잔 할까’, ‘저기 포장마차 있네, 들려갈까’”했던 생전 전락원 회장의 인간적인 매력을 높이 샀다.
재미작가로 알려진 피터현은 ‘한국인이 낳은 최초의 세계인’이라고 추모했다. 전 회장과 피터현은 목사의 아들, 와인, 예술 감상, 평생 세계무대에서의 활동 등으로 닮은 점이 많았다. 피터현은 특히 중년에 홀로 되어 재혼하려고 안달을 할 때 고인과 그의 누나 전숙희씨가 끈질기게 설득해 성혼을 시켜준 비화를 고백했다.
고인을 형님으로 부른 김동건 아나운서는 “예술과 와인과 사람을 좋아했던 낭만주의자”라며 “형님은 평범한 인생의 10배는 살다 간사람”이라고 애석해 했다.
그는 “돌아가신 뒤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추억하고 기린다는 것은 형님이 살아생전에 큰일을 성취하기도 했거니와 덕을 많이 베풀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하고 덧붙였다.
신용석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은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서울이 나고야를 52대 2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긴 것은 우경 선생이 아프리카 쪽의 인맥을 통해 IOC 위원들을 두루 접촉하고 한국 유치단에도 적지 않은 자금을 제공한 때문”이라며 “바덴바덴을 떠나면서 이런 사실을 신문에 절대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회고했다.
심대평 충남도지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선구자”라며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문화재단과 복지재단을 설립해 문화예술, 사회복지, 2세 교육에 아낌없는 투자와 지원을 했다”고 추모했다.
특히 김주영 작가는 “자연주의와 낭만주의의 눈부신 승리”라며 “선천적인 자선가로 나눔과 베픔의 실천에 앞장서 왔다”고 회고했다.
이어 “낙원이라는 이름은 성경속의 에던 동산을 항상 동경하였던 부친께서 지어준 이름이었고 평생 그 이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하셨다”며 “어떻게 하면 우리 인류사회가 바라는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인생의 목표이자 길”이라는 평소 우경의 심경을 전했다.
이밖에 김주연 숙대교수는 ‘소박한 멋의 신사’, 김화영 고대교수는 ‘수줍은 거인’, 강원용 목사는 “계원예술고와 조형예술대학 및 동서문학 발간 등 교육사업도 선교사업 이었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KBS 특파원 시절에 인연을 맺은 박성범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추모했고 신동일 서울대 총동창회 부회장은 ‘휴머니스트’,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씨는 ‘우리들 마음속의 큰 나무’로 추모했다.
한편 장철희 전 한국관광협회장은 추모집에서 전 회장에 대한 특별한 비화를 공개했다.
<... 1990년대 중반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 르네상스 호텔 대표이사로 근무하면서 관광협회 회장으로 봉사했다.
당시 정부는 관광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국무총리실에 ‘관광정책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었다. 그 무렵 나는 관광업계를 대표하는 관광협회장의 자격으로 민간인으로서는 처음 관광정책심의위원회의 한 멤버로 참여했다.
그러던 중 관광심의위원회에 ‘뜨거운 감자’로 인식된 안건이 상정되었다. 즉 서울에 있는 외국인 전용카지노인 워커힐 카지노의 폐쇄문제를 다루기 위한 안건이다. (당시 워커힐카지노는 탈세문제로 논란이 된 상황이었다)
정부는 외국인 전용카지노 사업을 모두 제주도에서 운영하도록 계획하였고, 제주도를 관광특별구역으로 만들 계획을 추진했다.
사전에 그런 안건 상정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미리 많은 자료를 준비했다. 그런 가운데 회의가 열렸는데 마침 안건을 본격 심의하기 전에 국무총리께서 그 안건에 대해 관광협회장으로 있는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래서 나는 준비한 자료를 참고하여 그동안 워커힐 카지노가 외국인 관광객 유치로 올린 외화획득 실적을 비롯해 앞으로의 외화획득 전망 등을 설명하였다. 또 서울지역에 단 하나밖에 없는 외국인 전용 워커힐카지노를 폐쇄한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어 워커힐 카지노가 가지고 있는 관광사업체로서의 위상 등을 사실대로 자세히 설명했다. 특히 워커힐 카지노가 그동안 벌어들인 외화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나의 설명을 들은 국무총리 이하 관광정책심의위원들은 워커힐 카지노의 폐쇄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을 수긍하게 되었고, 결국 워커힐 카지노는 폐쇄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기회에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회장과 관련된 또 다른 비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하나는 전 회장이 지난 1975년 제2차 오일쇼크 때 그동안 친료를 맺어왔던 싱가포르 석유거상을 급히 찾아가 원유 공급을 부탁, 평소의 2배 물량의 원유를 공급받아 우리나라가 석유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일조한 일이다.
또 하나는 전 회장이 우리나라 체육계의 발전을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스포츠선수들을 육성한 진실한 스포츠 지도자였다는 이야기다. 특히 전 회장은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스키종목의 발전을 위해 대한스키연맹 회장직을 흔쾌히 맡아 막대한 금액을 출연하는 한편, 솔선수범하여 감독, 코치 선수 등을 양성하고 독려했다. ‘드높은 이상향을 꿈꾼 도요새’에서>
아울러 전 회장과 30년 이상을 함께했던 홍순선 전 파라다이스그룹 부회장도 1969년 말레이시아 겐팅하이랜드 진출 초창기 목숨을 건 비화를 추모집에서 소개했다.
<... 전 회장이 선택한 최초의 해외 진출지는 말레이시아였다. 처음이었던 만큼 사업을 따내는 과정에서 험난한 사투를 벌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쿠알라룸푸르 근교에 위치한 겐팅 하이랜드는 이름 그대로 해발 1800미터 산봉우리에 위치해 있었다.
전 회장과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이미 봉우리를 깍아 호텔을 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장마철이어서 대홍수가 나고 지진까지 겹쳐 말레이이사에서는 40여년 만에 겪는 악천후였다. 그런 악천후 속에서도 우리는 계획대로 겐팅 하이랜드를 오르기로 했다.
우리는 묶고 있던 호텔을 나서면서 비장한 각오로 호텔 측에 “우리가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니 그런 일이 발생하면 한국대사관에 알려 달라”고 당부했다.
겐팅 하이랜드를 향해 올라가면서 산사태가 난 곳을 세어보니 대략 400 군데가 넘을 정도로 기상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어찌 보면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더군다나 산꼭대기에 있는 사업자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회장님은 충분히 위험을 무릎 쓰고 감행할 만한 사업이라고 판단을 했다.
그렇게 사투를 벌여 우리는 마침내 사업권을 획득하였고, 겐팅 하이랜드 호텔과 부속 카지노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장사가 너무 잘 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회장님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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