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학기 영화전공 인터넷 커뮤니티 '영상미학' 수업 게시판에 "나의 헤테로토피아 구로동"이라는 글이 게시판 첫 번째 글로 올라왔다. 이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은 과제 중 하나로 그날그날 수업 내용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짧은 글을 해당 수업 게시판에 업로드해야 했다. 대게는 수업이 진행되고 한참 뒤 마감 시간 전에 겨우 글을 올리곤 하는데 어떤 부지런한 신입생 한 명이 가장 먼저 글을 올린 것이다. 김선민 감독이었다. 미셸 푸코가 제시한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이 수업 시간에 주로 언급이 되었었는데 이 개념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고 애정하는 공간인 구로에 적용해 글을 작성한 것이었다. 추상적인 개념이 생생한 체험 위에 다시 그려지는 아픈 글이었다. 김선민과 푸코. 뭔가 생경한 느낌의 두 사람이지만 김선민 감독의 열정과 작업 욕심을 떠올려보면 충분히 가능한 조합이었다. 김선민 감독은 구로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를 지속적으로 찾고 있었고 배우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때문에 나도 김선민 감독과 함께 머리를 싸매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던 내가 뒤늦게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한 것이 2012년이었다. 1년 뒤 신입생 명단에 김선민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설마했는데 <가리베가스>의 바로 그 김선민 감독이었다. 너무 반가웠지만 동시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영화과 커리큘럼은 내러티브 영화보다 소위 '실험영화'나 다큐멘터리 필름을 비교적 더 다루는 편이고, 영화 제작 뿐만 아니라 이론 연구와 논문 작성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가리베가스>와 같은 영화를 더 많이 만들어 주길 기대했던 우리들에게 김선민 감독의 입학은 의외의 사건이었다. 내가 군에서 전역했던 2005년은 단편 <가리베가스>가 많은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상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던 시기였다. 그해 서울독립영화제 자원활동을 하며 <가리베가스>를 보았고 깊은 인상을 받아 김선민 감독의 GV를 지켜보았었다. 그 김선민 감독과 함께 학교를 다닐 수 있다니 매우 기뻤고, 누나라고 부르며 김선민 감독을 따라다녔다.
구로는 피할 수 없는 화두였다. 아니 계속 이야기되어야 하는 공간이었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시나리오 수업 시간에 누나가 들고 온 시놉시스도 구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2008년 처음 입사한 회사가 구로디지털단지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구로는 내게도 특별한 감정을 일으키는 공간이었고 종종 김선민 감독과 그 공간,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김선민 감독이 구로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동대문에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 구로에 터를 잡았다. 4년간 공장 노동자로 구로에서 일했다. 구로, 가리봉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가리베가스>에는 김선민 감독이 직접 체험한 과거가 오롯이 담겨있다. 경험자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구로를 떠나는 여성 노동자 선화의 작은 행동, 시선을 통해 드러난다. 김선민 감독이 2003년에 만든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꿈>에는 구로3동의 좁은 골목, 쪽방촌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선민 누나는 캠코더 앞에 아이들을 세우고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 대화에서는 아이들을 곁에서 오래 지켜본 이로서 진실되게 아이들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김선민 감독의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김선민 감독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구로에서 과거 봉제 노동자들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었고 극영화도 새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구로문화공단'이라는 연구모임을 만들었고 영화가 아닌 책과 전시 등의 형태로도 구로의 잊혀가는 과거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여주는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2016년, 이제 김선민 감독은 공연 연출에 도전장을 내밀기로 한다. <구로공단 19662013: 이주, 생산, 노동 그리고 꿈>, <장구로와 명자언니의 산업도시 걷기: 구로공단에서 G밸리까지 숨은 이야기 찾기> 등의 책을 통해 구로의 과거와 현재를 체험하는 워킹투어 프로그램을 계획했던 김선민 감독은 그 콘셉트를 발전시켜 관객들이 움직이며 구로를 사유할 수 있는 일종의 거리공연을 만들고 싶어했다. 2016년 6월 김선민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공연이 10월로 예정되어 있는데 같이 연출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 왔다. 제안과 함께 담담한 말투로 본인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이미 말기라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고 정신없이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걸어 같이 공연을 만들자고 얘기했다.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의 원래 이름은 구로공단역이었다. 그 역 근처에서 공연은 시작된다. 공연명은 <수추르 여인을 찾아서>. 김선민 감독의 짧은 비디오 작업 <수출의 여인> 제목을 패러디했다. 관객들은 배우이자 가이드인 퍼포머들을 따라 IT 회사들이 주로 입주해 있는 높은 빌딩 숲을 통과해 걷게 되고, 여정은 여전히 쪽방촌의 흔적이 남아있는 가리봉 시장으로 이어진다. 코스 중 몇 개의 장소를 지정해 계획된 퍼포먼스를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과거(구로공단 블루컬러 노동자 명자언니)와 현재(구로디지털단지 화이트컬러 노동자 장구로), 두 개의 이야기 줄기가 함께 진행되며 교차하는 공연. 항암치료를 받고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김선민 감독을 찾아가 회의를 하고 의견을 나눈 다음 현장을 답사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다. 김선민 감독은 피곤을 숨길 수 없었지만 의연했고, 공연 이야기를 할 때는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공연의 배경이 되는 그 공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김선민 감독의 기획을 최대한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공연을 만들어보려 했다. 운 좋게도 너무 훌륭한 배우들을 섭외할 수 있었고, 누나의 바람대로 코스 마지막 쪽방 앵커시설에서 공연할 무용수들도 섭외했다. 누나는 1978년에 촬영된,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 영상을 내게 보여주며 무용 콘셉트와 음악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2016년 10월 26일, 김선민 감독은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현장에 나와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에 함께 했다. 공연은 무사히 막을 내렸다.
구로공단과 구로디지털산업단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굴뚝형 공장이 무너지고 유리 번쩍한 디지털단지가 들어섰"지만, 김선민 감독이 보기에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초는 여전한 것이었다. '현재'의 문제를 발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고자 한다면 '과거'를 그저 낡은 것으로 여기고 폐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돌아보고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지난 시간을 되새기고 다시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김선민 감독은 계속해서 공부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 도전했다. 그 도전은 직접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쪽방 골목의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던 김선민 감독의 진심 속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곁에서 응원했던 김선민 감독의 그 도전이 이렇게 일찍 끝나버린 것이 너무 슬프고 안타깝다. 추모하며 기억하는 글이 아니라 다른 목적의 글을 쓰고 있어야 하는데, 이런 글을 써야하는 현실이 너무 냉혹하다. 다만, 김선민 감독에 대한 기억 조각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그가 말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을 다른 누군가가 이어갈 수 있길, 그 과정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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