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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안보 전략은 무엇인가?

[기고] '베를린 구상'에서 그치지 않는 구체적 전략 보고서 나와야

동북아시아에서 국제질서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행위자(actors)의 수와, 행위자들 사이 연합의 양상을 세밀하게 관찰해야 하는 이유는 이 지역이 여전히 '강대국 정치'(power politics)가 내뿜는 강력한 자장(磁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당시 제국의 일원이었던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1840~1842)에서 패하고서 이후 열강들에 의해 영토가 이리저리 찢겨진 채 사실상 반식민지화의 길을 걸었던 근대사의 깊은 상처를 핥으며 절치부심하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과 일본은 청·일전쟁(1894~1985)의 역사적 기억을 되새김질 하면서 중국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을 태세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근력을 키워나가는 시진핑(習近平)의 '일대일로'와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양보 없는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경제적,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하다. 두 거인이 언제 충돌할 것이냐는 시간의 문제만 남아있다.

이처럼 세력 간 크고 작은 충돌이 높게 예견되는 가운데 남과 북은 원하지 않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명확히 하라는 요구가 강도 높게, 그리고 예리하게 제기될 것이다.

전략적 선택지가 많지 않은 한국으로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칠 공간이 점차 좁아지는 셈이다. 지정학적 숙명이자, 보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정권이 매 순간 맞닥뜨리는 낯설지 않은 딜레마이다.

익숙한 딜레마 : 동맹 또는 동반자

문재인 대통령은 11일 G20 정상회의 참석 후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후 남북관계는 한국이 주도권을 쥔다는 '한국의 운전수론'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는지 문 대통령의 발언이 비감하게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불과 2개월여 만에 양자, 다자 간 정상회담을 통하여 북핵으로 야기된 한반도의 운명적 질서를 몸소 체득하게 됐다. 관념적으로만 생각해 온 강대국 정치가 실제 외교현장에서는 예상보다 '살벌'했으리라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필자 역시 과거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과 외교협상을 해 온 인사들로부터 들었던 후일담을 복기(復記)해 보면 때로는 굴욕감을 느낄 정도로 이들 국가들의 무례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들의 행태가 방법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유전자적 속성은 여전할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어쩌면 문 대통령은 20세기 초 청나라가 망하고 러시아마저 일본과 전쟁에서 패퇴한 후 동아시아 질서가 일본과 미국의 권력 정치적 흥정에 재편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화질서가 무너지자 조선의 운명이 또 다시 제국 열강들의 손에 달렸던 그 순간 말이다.

그 당시 조선과 오늘의 한국을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반도 문제를 당사자들 스스로 해결하기가 어려워진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의 좌표는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지만, 이는 상당 부분 정치적 수사이거나 근거 없는 낙관론에 불과하다”는 정재호 교수의 주장에 한 표를 보탠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의 위치와 영향력이 이른바 고스톱에서 '쇼당'을 행사할 정도에 이르지를 못했다. 한국이 어느 쪽에 붙든지 그 기울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힘이 없으며, 인도와 일본과는 달리 한국이 내보이는 '쇼당'을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조차 받지를 않고 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한국의 내파적(內破的) 상황은 정권에 치명적이다. 반대로,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북한의 자발적인 핵무기 포기는 미국은 물론 중국에게도 '쇼당'을 칠 수 있는 패가 된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현지 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쾨르버 재단 초청으로 연설을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베를린 구상'을 발표했다. ⓒ청와대

일례로,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에서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게이츠(Robert Gates)는 최근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에서 북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제한하는 대가로 북한 정권을 인정하고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정권 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북한 핵무기 보유를 (일정 수량 내에서) 허용하고 북의 미사일 능력을 단거리로 제한하는 조건(hard limit)을 미국이 중국과 담판하기를 제안했다.

미국은 북한과 평화협정을 서명할 준비가 되어있다거나 북핵 문제를 중국과 우선 협상하려는 그 발상도 그렇거니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는 발언은 동맹국 한국의 안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국의 안보에만 해가 되지 않으면 된다는 강대국 정치의 전형적인 사고 패턴이다.

중국으로서도 게이츠의 제안이 '나쁜 제안'이 아닐 수도 있다. 중국의 해법은 여전히 쌍궤병행(雙軌竝行, 비핵화 프로세스와 북한과의 평화협정 협상)과 쌍중단(雙中斷: 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 제안을 바탕으로, 그 안에서 관련국들의 대북 제재와 논의를 수렴하려는 것이다.

이 제안은 지난 3월 양회(兩會) 기자회견을 통해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밝힌 것으로, 시진핑과 트럼프 간 플로리다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이 논리로 트럼프의 대북 강경 제재론에 맞섰다. 쌍중단과 쌍궤병행은 북한 핵이 중국에게는 당장 위협이 되지 않기에 북한과 당장 거리두기나 관계를 축소하지 않겠다는 전제가 내포된 제안이다.

중국의 오만과 편견

북·중 국경 주변에 사는 사람들과 대륙의 깊은 내지(內地)에 사는 사람들 간 북핵에 대한 인식의 편차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대다수 중국인들은 북한이 중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2006년 10월 9일 최초의 북핵실험 진동이 있고서 강산이 변한 지난 지금까지 그 믿음은 견고해 보인다. 이처럼 중국인의 북한 핵무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캐나다와 멕시코 국민들 대다수가 미국의 가공할만한 핵무기에 대해 갖는 무비판적이며 관성적 신념체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첫째, 북한이 중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국인들의 인식 기저에는 '북·중 관계는 혈맹이다'는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6일 독일 베를린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가진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북한과 맺어온 혈맹 관계가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고 보도됐다.

적어도 2022년까지 집권할 시진핑의 '북·중 관계=혈맹' 도식이 정말로 '우호적인 이웃국가' 또는 '전통적인 우호관계'에서 역주행하여 한·미·일 3국에게 북한을 결코 버릴 수 없다는 전략적이면서도 단호한 의지를 내포한 것으로 봐야 옳다.

둘째, 중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순식간에 강을 건너(渡江) 평양으로 진격한 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북한 정권을 접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200만 명이 넘는 인민해방군의 일부가 대규모 화력을 앞세우고 사실상 무방비 상태인 북·중 국경을 뚫고 진입하는 것은 물을 잔뜩 먹은 한지(韓紙)를 찢는 것만큼이나 쉽다.

더군다나 중국으로서는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같은 '위험 요인'도 없기에 지체 없이 북한 권력의 심장부를 맹폭할 수가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의회 승인과 같은 절차와 다양한 여론조차 중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속전속결이다.

셋째, 중국인들 대다수는 북한을 도와줄 지원국이 전무하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의 푸틴은 김정은에 대해 노루 꼬리만큼의 동지적 연대감도 지니고 있지 않다. 미·러 관계의 하부구조인 북·러 관계를 감안하면 북·러 관계에서 미·러 관계를 뛰어넘는 전략적 제휴를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이 상황에서 중국마저 손을 놓을 경우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아가 된다. 따라서 북한이 중국에다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김정은의 자살행위와 다름없다고 중국인들은 믿고 있다.

중국은 이처럼 북핵 문제에 상대적으로 느긋한 편이다. 북한이 위기를 조성할 때마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산중선사(山中禪師)의 단어만 내놓는 국가가 중국이다. 지금까지 다섯 차례 핵실험을 하고, 수십 차례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는 북한에 대해 '최대의 인내심(maximum patience)'을 보여주는 국가이다. 김정은이 핵무기를 실전 배치하는 '진실의 순간'을 보기 전까지 중국이 북한으로 연결된 송유관을 완전히 잠그는 일은 없다. 현상유지가 전략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한·미·일 삼각 동맹 강화와 북·중·러 삼각 체제가 공고히 되면서 한반도에서 신냉전의 마그마가 지하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시진핑의 혈맹 발언에서 드러났듯이 중국은 북한을 포기하면서까지 한국을 지지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사드 배치가 거의 기정사실화 되고 트럼프 행정부의 대만 무기 판매가 승인되는 상황에서 중국의 북한 껴안기는 당연한 결과이다. 게다가 중국은 한·미 동맹의 추(錘)가 대 중국 견제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했기에 사드 배치 완료를 기점으로 한국을 상대로 전방위 압박 수위를 최대로 높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북핵 방정식은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문재인 정부는 중국과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뛰어넘는 어떤 구체적 대비책을 갖고 있는가? 다시 말해,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어떠한 전략으로 이를 정할 것인가라는 '국가안보전략서'를 문재인 정부는 지니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인 '국가안보전략서'

노무현 정부 시절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서'(National Security Strategy)를 벤치마킹하여 2004년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가 '참여정부의 안보정책 구상 : 평화번영과 국가안보'를 발간한 것이 국가안보 개념을 시도한 첫 사례다. 이후 이명박 정부는 2009년에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 비전과 전략 : 성숙한 세계국가'로, 박근혜 정부는 2013년에 '희망의 새시대 : 국가안보전략'을 작성했다.

현재 청와대 국가안보실(NSC)은 장관급인 안보실장 아래 1, 2차장을 둬 NSC 사무처장을 겸직하는 1차장이 국방부를 주요 카운터파트로 하면서 안보전략과 국방개혁, 평화군비통제 업무를, 외교부와 통일부를 담당할 2차장 산하에는 외교정책, 통일정책, 정보융합, 사이버안보 등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가안보전략서는 안보전략비서관실이 중심이 되어 이를 작성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이 국가안보전략서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보고서의 성패가 갈리게 마련이다. 대통령이 내용을 꼼꼼히 챙길 경우 각 부처에서 올리는 초안부터 내용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이러한데 각 부처 장관들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차관, 국장, 과장 등의 관심도는 불문가지이다.

한편, 문재인 정부 출범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국가안보전략서의 발간은 늦어도 올해 안에 마무리돼야 한다. 5년 단임제의 특성상 강력한 추진력을 갖고서 정책을 펴는 데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늘공'과 '어공' 간 케미도 맞추고, 각 부처들 간 협업도 이루어져야 하는 등 어려운 점이 적지 않으나 임기 초반에 지도도 없이 등반 또는 항해에 나설 수 없듯이 국가안보전략서 작성은 우선순위가 높아야 하는 과제다. 현안은 현안대로 대응하더라도 문재인 정부가 도달하고자하는 목적지를 국민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옳다.

특히 문재인 정부 임기 내 전시작전권 환수를 전제로 한 자주국방 능력의 수준을 얼마로 할 것인지, 북한 핵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리고 '보험'으로서의 한·미동맹이 이제는 중국 견제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에 대해 묵직하고도 밀도 높은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중·장기 전략을 세밀하게 짜야 한다. 국가안보전략서가 대증요법(對症療法)의 처방전(處方箋)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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