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할 때마다 익숙한 풍경이 반복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을 규탄하면서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북 제재"를 부과하고 전략 폭격기를 동원해 무력시위를 벌인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밝히면서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않는 한, 대화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에 대해 북한은 "유엔 안보리 결의를 배격한다"며 타국이 인정하든 말든 핵 보유국으로 가겠다는 결기로 맞선다. 그러면 국제사회에선 북핵 문제에 대처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며 체념론에 빠지곤 한다. 일각에선 무력 사용이나 북한 정권교체론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는 현실성도 타당성도 없는 주문이다.
이러한 레퍼토리는 7월 4일 북한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급 미사일 발사 이후에도 어김없이 재연되고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대북 송유 중단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최대의 압박" 전략의 카드로 중국에 대북 송유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이 이에 거부 의사를 표하자 미국은 '세컨더리 보이콧'을 경고하면서 중국에 대한 압박을 높이고 있다.
미중 간의 신경전이 어떤 결론으로 귀결될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설사 송유 중단이 이뤄지더라도 여기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따른다. 과연 북한이 이에 굴복해 비핵화를 선택할 것인가? 설령 북한 정권이 결국 무릎을 꿇더라도 이 사이에 북한 주민이 겪게 될 고초는 얼마나 클 것인가? 앙심을 품은 북한 정권이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비수를 품을 가능성은 없을까? 거꾸로 북한이 송유 중단 맞불조치로 6차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면 그 다음 대응책은 무엇인가?
이처럼 대북 송유 중단은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인 대응책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마땅한 대응 수단이 없다고 갑갑해하기 전에 미국이 외면해 온 방법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비핵화이다.
2005년에 채택된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선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 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라고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도록 별도의 포럼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한미 양국이 북핵 해결 진전 및 궁극적인 비핵화 달성에 가장 유력한 방법을 외면해 온 셈이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 문제와 평화 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으로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사라졌던 평화협정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분명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평화협정은 평화 체제의 중요한 제도적 기반이지만 평화 체제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평화협정을 평화 체제의 '중간 단계', 혹은 '전환기적 단계'로 설정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세 단계로 나누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1단계는 6자회담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 논의 '재개'와 남북미중 4자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협정 협상 '개시'이다. 이와 더불어 북한은 핵실험과 위성 발사를 포함한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하고 한미 양국은 군사훈련의 횟수와 규모를 축소하는 것을 신뢰구축 조치로 삼아야 할 것이다.
2단계는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영구적이고 검증가능한 북핵 동결과 한반도 기본 평화협정 체결이다. 여기서 영구적인 동결은 영변 핵시설 및 풍계리 핵실험장의 불가역적인 폐쇄를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검증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세 가지 반론이나 의문이 나올 수 있다. 첫째는 북핵 폐기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북핵 보유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평화협정에 북핵 폐기 대상, 방식, 시한을 명시하면 이러한 우려는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
둘째는 북한이 검증을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래서 평화협정 체결이 필요하다. 평화협정은 교전 상태의 공식적인 종결을 의미하기 때문에 북한이 검증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복잡하고 어려운 평화협정 체결을 단 시간 내에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기본' 협정을 제안하는 것이다. 즉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결과 상호 불가침 약속과 같은 원칙적이고 합의가 용이한 내용을 먼저 '기본 협정'에 담고 세부적이고 까다로운 문제는 추후에 부속 합의서 형태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기본 평화협정은 가속화될 수 있다.
이러한 두 단계를 거쳐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체제 구축 완성이라는 3단계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3단계에선 북핵 폐기뿐만 아니라 미국 핵우산의 철수와 남북한과 주한미군의 군축, 북미·북일관계 정상화 등 근본 문제의 해결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한미 양국에 훨씬 유리하다. 북핵 동결과 폐기는 기본적으로 되돌리기 힘들거나 거의 불가능한 속성을 지닌다. 반면 한미 군사훈련을 축소하거나 중단해도 북한의 약속 위반시 언제든 되돌릴 수 있다. 북한이 핵 동결이나 폐기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평화협정을 무효화할 수도 있다. 협상 국면에선 한미 양국이 쓸 수 있는 카드가 훨씬 많은 것이다. 내가 '제재를 통한 최대의 압박'보다 '협상을 통한 최대의 압박'을 주장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 이 글은 <내일신문> 7월 12일자에 기고한 칼럼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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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wooksik@gmail.com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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