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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피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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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문재인 정부가 피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

[이관후 칼럼] "명령하지 말고 부탁하십시오"

2002년에 개봉한 영화 <K-19 더 위도우메이커(The Widowmaker)>는 소련 최초의 탄도탄 발사용 핵추진 잠수함에서 벌어진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냉전이 한창인 상황에서 미국이 먼저 대륙간 탄도탄 발사가 가능한 잠수함을 실전 배치하자, 소련도 서둘러서 같은 급의 잠수함을 건조합니다. K-19은 건조에 착수한지 불과 6개월 만에 진수했고, 2년 뒤인 1961년 실전배치 됩니다.

그러나 추진과정이 지나치게 급했던 나머지 이 잠수함은 건조 중에도 여러 사건사고로 사망자가 속출했고, 진수식에서는 배에 부딪친 샴페인 병이 깨지지 않는 등 불운한 사건이 연속되면서 '과부제조기'라는 어두운 별칭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나선 첫 항해에서 K-19은 역시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습니다. 핵미사일의 테스트 발사를 마친 잠수함은 원자로 냉각계통 고장으로 인해 노심융해가 일어나 폭발위험에 처하게 되지요. 만약 핵폭발이 일어난다면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미국 구축함과 잠수함이 추격하는 상황에서 원자로를 고치면서 귀환해야 하는데, 배 안에서는 선상반란이 일어납니다. 승조원들은 안 그래도 잠수함의 성능을 믿지 못하고 있었는데, 함장이 그 사실을 알고도 자신들을 사지로 끌고 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위 장교들은 함장 보스트리코프(해리슨 포드)를 체포해버립니다. 그리고 부함장 폴레닌(리암 니슨)을 함장으로 추대하지요. 그런데, 폴레닌은 보스트리코프에게 함장직을 다시 인계합니다.

부함장은 함장을 신뢰하고 그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권한을 돌려받은 함장은 함내 마이크를 통해 다시 명령을 내리려고 합니다. 그 때 폴레닌 부함장이 마이크를 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합니다.

"명령하지 말고, 부탁 하십시오."

그러자 함장은 선내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미군에 항복하는 대신 잠항해서 원자로를 수리해 보겠지만 보장은 할 수 없다. 나는 준비되었다. 자네들의 응답을 기다리겠다."

잠수함 내에는 침묵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전까지 함장에게 반발하던 승조원들은 하나 둘씩 보고를 해 옵니다. "함장님의 어떤 명령에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총선이 3년이나 남은 문재인 정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50여일이 되어 갑니다. 정말 세상이 바뀐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감명 깊었던 몇 장면을 개인적으로 꼽자면, 5.18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유가족을 따뜻하게 안아 준 순간, 청와대 식당에서 직원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장면, 한국은 물론 미국의 참전 용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장면, 그리고 세월호에서 숨진 비정규직 선생님들의 순직을 인정한 것 등입니다.

더욱 기쁜 사실은 우리 국민들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문대통령이 국민 앞에 군림하지 않을 것이고, 품격 있고 겸손한 자세로 국정에 임할 것이라는 점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이전 대통령과 비교할 때, 첫 방미에서 보여준 모습이나 G20에서 다른 정상들과 대화하는 수준에서 보면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더 바랄 것도 없는 듯합니다. 특히 박근혜 씨가 대통령에 있는 채로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았다고 생각해 보면, 지금 누리고 있는 정상적인 상황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게도 모든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 정부가 피해갈 수 없는 실로 거대한 불운은 국회의원 선거가 앞으로 3년이나 남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은 '현자'나 '철인'에게조차 1인 통치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국회의 동의를 거쳐서 국가를 통치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추진하는 국가 정책의 모든 주요한 결정은 실질적으로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대통령의 권한으로도 적지 않은 일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우선 대통령이 인사권을 갖고 있는 행정기관과 공공부문에서 대통령의 공약이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첫 공식일정에서 밝힌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가 아마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공공부분 비정규직이 모두 없어진다고 해도, 이것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근본 대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약관화 합니다.

공공부문에서 선도적으로 상시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민간부분의 비정규직, 그 중에서도 대부분의 취약계층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영세자영업이나 소규모제조업 부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는 설사 그 목표가 완전히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상징적인 것이지 실효적인 것이 아닙니다. 입법을 우회하는 방법으로는 비정규직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대통령의 개인기로는 자유한국당 의석 줄일 수 없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책과 시스템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정책은 입법을 우회할 수 없습니다. 총선이 없는 앞으로 3년 동안은 '현실적으로' 그렇습니다. 개인기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인기가 자유한국당의 의석을 당장 줄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실은 비정규직 문제는 정책으로도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공공부문을 넘어서면 결국은 시장이 움직여야 하고, 시장이 움직이려면 정부가 아니라 국민과 사회 전체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비정규직 문제,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국민적 합의를 갖고 있습니까?

소득 주도 성장, 그 중에서도 임금 주도 성장을 통한 하위 80%의 경제불평등 해소와 가계부채를 눈덩이처럼 불리는 부동산 가격의 안정, EITC와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 복지 체계의 전면적 개혁, 공교육의 정상화를 통한 수저계급론의 타파에 대해 우리는 어떤 사회적 합의를 갖고 있습니까?

정책을 입법화하기도 어려운데, 입법화를 해도 한계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명령하지 말고, 부탁하십시오

'이미지로 승리하되 정책으로 통치하라'는 것은 상식에 속하며, 한국정치에서도 이 격언은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정책으로 통치하는 것이 수단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대통령이 입법으로 할 수 없는 정책들을 선도적으로 시작하는 것을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정책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발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거기서 나타나는 효과를 통해서 더 큰 정책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가능한 전략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통령이 정책을 통해 시장과 사회를 압박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현 대통령이 잘 못 되기를 바라는 세력들이 가장 원하는 모양새일 것입니다. 참여정부에서 국가보안법의 폐지나 사학법 개정이라는 정책적 목표가 잠재적 보수를 총집결시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정책을 추진하기 전에, 그 정책의 필요성과 의미를 설득해주십시오.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을 없애라고 명령하기 전에, 왜 단 한 사람도 비정규직이어서는 안 되는지 설득해 주십시오.

공공부문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왜 해결해야 하는지, 사회적 합의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정책을 위한 입법안을 국회에 보내주십시오.

보통은 서로 다른 입법안을 통해 국회에서 여야가 경쟁하는 것이 보통의 상례입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그런 식이라면 이 정부는 단 하나의 정책도 법으로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국민을 설득하고 부탁해야 합니다. 정책 이전에, 그 정책의 철학과 그것을 통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비전을 세세하게 국민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동의가 곧 국회에서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상대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한국당과 3년을 보내야 하는 문재인 정부의 어쩔 수 없는 운명입니다.

이 가혹한 운명을 잘 헤쳐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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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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