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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예방한다고 "싫어요! 안 돼요!" 가르치기 전에…

[격월간 민들레] 유아 성교육은 지식 교육 아닌 존중 교육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거니?

2년 전쯤인가, 동료 강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쌤, 그날 시간 있으세요? 센터에 유아 성교육 문의가 들어왔는데 제가 일정이 안 돼서 시간 되시면 쌤 연결해 드리려고요." 평소 유아 성교육을 선호하지 않는 나지만, 전화한 선생님께 신세를 진 적이 있어 빚 갚는 마음으로 응했다.

드디어 강의하는 날, 나는 뽀미 언니에 빙의한 듯 하이톤의 목소리로 구연동화와 노래, 율동을 선보이며 강의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일주일 후 센터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선생님, 그날 유아 성교육이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이런 전화의 목적은 딱 두 가지다. 강의가 너무 좋았다는 피드백을 듣고 그 내용이 궁금하거나, 반대로 너무 엉망진창이란 항의를 받아 정확한 사태 파악이 필요하거나. 센터는 성교육뿐 아니라 성폭력 사건 같은 일들로 항상 정신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구태여 칭찬 한마디를 하려고 강사에게 전화하는 일은 드물다. 결국 내게 전화를 한 용건은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거니?'였다(해당 어린이집에서는 진행 방식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지 않았고, 그러므로 강사료를 더 깎고 싶다고 했단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담당자에게 교육내용을 일일이 설명하며 억울함을 성토했고 '그러니까 내가 유아교육은 안 한다고 했잖아!' 하는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마음을 한 가닥 이성으로 간신히 붙잡아야 했다.

시간이 좀 흐르고 억울하고 화났던 마음이 쓱 뒤로 물러나자, 정말 내 강의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어린이집 원장인 지인에게 털어놓고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수많은 강사들이 오는데, 대부분은 아이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해 와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옷을 입는다든가,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가져온다든가 뭐 그런 거요. 그리고 솔직히 성교육은 무료로 지원받는 방법들도 있어서 굳이 돈 들여서 강사 초빙하려고 안 하죠."

즉, 그날 나의 성교육은 '내용'보다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아들의 호감을 제대로 사지 못했고, 안 써도 될(?) 돈을 쓴 어린이집의 입맛도 맞추지 못한 셈이었다. 목소리만 뽀미 언니처럼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심기일전하여 '마녀의 보물찾기'라는 콘셉트로 마녀 의상을 입고 유아 성교육을 하러 갔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몸과 마음, 나 자신)을 찾아보고, 마녀가 그 보물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소중히 지킨다는 방향으로 교육을 진행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그제야 나는 원생과 원장 모두에게 만족도 높은 성교육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 어린이집 아이들이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으며 "싫어요! 안 돼요!"를 외치고 있다. 해당 사진은 내용과 무관합니다. ⓒ연합뉴스

유아 성교육, 왜 어려울까

성교육 강사 자격 유지를 위해 2년에 한 번 전국 단위의 강의 시연을 하는 자리에서 유아 성교육 시연을 했다. 교수님과 동료 강사들은 "어떻게 유아교육으로 시연할 생각을 했느냐, 실제로 현장에서 교육을 하고 있느냐, 유아에게 성교육이 가능할까 생각했는데 의외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유아 성교육은 전문 강사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영역이다.

내가 유아 성교육을 선호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솔직히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어려울 것 같은 교육은 나름 만반의 준비라도 하는데, 만만하게 보고 갔다가 생각보다 어려워서 뒤통수를 맞기 마련인 영역이 유아 성교육이다. 1회기 20분 남짓의 수업, 인사와 마무리를 빼면 실제 강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15분 정도다. 그 15분 동안 전달할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앉아 있는 아이들 입장에서도, 지켜보는 교사 입장에서도, 진행하는 강사 입장에서도 늘 거기서 거기인 교육이 펼쳐진다.

대략 '아빠 엄마가 사랑해서 결혼을 하면 아빠 엄마 몸속에 있던 정자 난자가 만나서 아기가 되고, 아기 궁전인 자궁에서 자란 여러분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여러분은 소중한 사람이다'로 시작해 '그런데' 하며 성폭력 예방 교육으로 넘어간다. "안 돼요! 싫어요!"라고 같이 외쳐보기, 낯선 사람 따라가지 않기, 집에 혼자 있을 땐 아는 사람이 와도 문 열어주지 않기 등등으로 강의는 마무리된다.

그런데 강의가 끝나고 나면 유아 성교육의 두 번째 난관에 봉착한다. 유아기의 경험이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프로이드는 유아기에 성격이 형성된다고 하였고, 에릭슨은 유아기에 신뢰감, 자율성, 주도성이 형성된다고 했다) 강사인 내게 주어진 시간 이상의 막중한 책임감과 두려움이 생긴다. 내 부족함이 아이들에게, 혹은 지켜보고 있는 교사들에게 또 다른 통념을 심어주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앞서 말한 유아 성교육의 흔한 패턴으로 예를 들자면, 사실 정자 난자는 '아빠 엄마'의 몸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여자'에게 있는 것이다. 아빠와 엄마가 '사랑하고 결혼해서' 내가 태어났다는 설명이 '아빠 엄마 아이'가 있어야 '정상적인 가정'이라는 편견을 심어주진 않을까? 그래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마치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유지되는 가정 안에서만 '소중한 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지 않을까 걱정인 것이다.

성폭력 예방 파트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부담스러운 부분이 "안 돼요, 싫어요"를 가르칠 때다. "안 돼요, 싫어요"를 연습시키는 것은 마치 그 말만 하면 성폭력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할 수 있는 일을 안 했다는 죄책감을 갖게 할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선 안 된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성폭력은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따라가지 마라'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가르치자니, 아이들에게 경계심부터 심어주는 건 아닌가, 과연 자신이 살아갈 이 세상을 신뢰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훅 밀려온다. 요즘 세상에 아이 키우는 부모들이 피해갈 수 없는 딜레마다.

성교육은 곧 존중 교육

"아이, 싫어요. 엄마! 엄마!" 아이가 할아버지 품에 안겨 애타게 나를 불렀다. 안겨 있다기보다는 할아버지 팔과 옆구리 사이에 끼어 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만난 손녀가 예뻐서 그저 안아주고 싶은 건데, 아이는 불편한지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자동 반사 모드로 "괜찮아, 할아버지가 너 예뻐서 그러시는 거야"라고 말할 뻔했으나, 이내 정신줄을 붙들고 "아민아, 엄마가 도와줄게. 엄마한테로 오세요" 하며 아버님에게서 아이를 넘겨받았다.

아무리 아이들에게 "안 돼요, 싫어요"를 외치라고 교육해도 실제로 쉽지 않은 이유는 평소 어른들이 아이들의 "안 돼요, 싫어요"를 존중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가까운 친척이나 지인들이 아이를 안거나 만지거나 쓰다듬을 때 엄마들은 당사자인 아이의 의사보다 그러지 말라고 했을 때 멋쩍어할 상대 어른의 입장을 먼저 살핀다.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지 마라' '모르는 사람이 몸을 만지지 못하게 하라'라고 교육하지만, 사실 아이들에겐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경계 자체가 모호하다. 대부분의 유아 성폭력 가해자들은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소(강아지나 장난감 같은 것)들로 관심을 끌며 순식간에 모르는 사람에서 아는 사람으로 자신의 위치를 바꾼다. 이들은 아이에게 호감을 사고 나서 '네가 예뻐서'라며 성추행을 한다. 평소 아이들은 엄마 아빠에게 "사랑해서, 예뻐서"라는 말을 익숙하게 들어왔고, 역시나 같은 말을 들으며 무수히 많은 어른들에게 원치 않게 안기었고, 뽀뽀하거나 받기를 강요당해왔다.

몇 달 전 부모 성교육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 한 분이 손을 번쩍 들고, "그러면 제 딸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대답은 같다. "가해자가 하지 말아야지, 피해자가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그런 내 대답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그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 전 딸아이에게 벽에 붙은 한글 공부 포스터를 가리키며 "가방 할 때 '가'"라고 하자, "엄마는 어린이집도 안 다니는데 글자를 어떻게 알아요?"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고 모두를 '자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유아기의 사고는 '자기중심'적이다. 또한 유아들은 모래놀이, 숨바꼭질처럼 뭔가를 직접 보고 만지고 맛보며 '감각중심'으로 세상을 배워간다. 그러니 아이에게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관계(잘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고,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해 정확한 타이밍에 "안 돼요, 싫어요"라고 말하길 가르치는 것은 사실 '미션 임파서블'인 셈이다. 사실은 20분짜리 성교육보다도 평소 가족들의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는 더 큰 영향을 준다. 유아기에는 책이나 교육을 통해 머리로 기억하기보다 직접 존중받거나 존중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며, 그 경험이 단단히 쌓이도록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우리 집에는 '답답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 아이가 누워 있을 때 그 위에서 꼭 끌어안는 행동인데 정작 아이는 이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아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싫어요"라고 해도 아이가 어찌 반응할까 궁금해서 멈추지 않으면, "내가 싫다고 하면 안 해야지!" 하며 소리를 꽥 지른다. 그러면 그 즉시 "미안해" 하고 사과하며 답답한 사랑을 멈춘다. 때때로 황급히 몸을 떼느라 사과가 늦어지면 아이는 양팔을 허리춤에 올리고 "미안하다고 해야지!" 하며 사과를 요구하기도 한다. 부모에게 답답한 사랑을 당했을 때 참고만 있거나 주눅 들지 않는다. 유아기의 성교육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에 관한 지식 교육이라기보다는 '존중' 교육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존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배워가는 것이다(이것은 피해 예방뿐 아니라 피해를 본 후 회복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 유아 성교육은 어렵다. 어린이집 같은 데서 성교육 의뢰가 들어오면 순순히 하겠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집에서 엄마로서의 역할까지 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자신의 의사 표현이 받아들여지는 작은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더 단단한 아이를 만들 테니 오늘도 아이의 'NO'에 'OK'라고 화답해봐야겠다. 때로 마음속에선 서운함이 밀려올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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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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