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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페데스 신부를 왜군 종군신부로 모는 건 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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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페데스 신부를 왜군 종군신부로 모는 건 역사 왜곡"

박철 전 한국외대 총장 "조선 온 최초 서구인이자 임진왜란 참상 유럽에 알려"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지구 '세스페데스 기념공원' 논란

지난 29일 창원시청 방문해 기자회견 갖고 공무원 특강도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스페인 출생 신부인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우리 땅을 밟은 최초의 서양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424년이 지난 현재 경남 창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창원시 진해구 남문지구에 조성된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을 두고 ‘우상화 중단’과 ‘역사왜곡’ 주장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은 ‘일본의 조선침략에 부역한 왜군 종군신부’라는 것과 ‘임진왜란의 참상과 조선 왕국의 존재를 유럽에 최초로 알린 신부’라는 주장이다.

▲박철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이 지난 29일 창원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스페데스 신부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왜군 종군신부라는 주장은 역사적 왜곡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김병찬 기자

창원시는 이와 관련해 지난 29일 박철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을 초청해 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연 뒤 간부공무원 300여명을 대상으로 ‘역사 바로 알기’ 특강도 개최했다. 박 전 총장은 ‘16세기 서구인이 본 꼬라이’ 책을 통해 세스페데스 신부에 대해 재조명한 바 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과연 침략자의 종군신부일까, 아니면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서구인이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러 온 순수한 목적의 종교인일까.

■“왜군 승리 이끌기 위해 온 종군신부”
창원시는 지난 2016년 2월 예산 3억여 원을 들여 창원시 진해구 남문지구에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1993년 9월 스페인 정부에서 세스페데스 신부 방한 400주년을 기념해 옛 진해시에 기증한 청동기념비가 설치돼 있던 공원에 신부를 표현한 조형물을 추가로 설치해 스페인식 정원으로 조성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지난 1월 김삼모(더불어민주당) 창원시의원이 우상화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시의회 5분 자유발언 시간에 단상에 오른 김 의원은 “창원시는 왜군을 도운 신부를 기리기 위한 공원을 조성했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두 차례 더 이어졌다.

김 의원이 주장하는 것에 따르면 세스페데스 신부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12월 조선침략의 왜군 선봉장이자 천주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진해 웅천으로 건너와 1년 정도 왜성에 머문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왜군과 함께 조선 땅을 밟은 목적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함이며, 왜군 병사들의 정서적 안정 등 종군신부로서 신앙적인 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김 의원은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짓밟고 조선인을 비참하게 유린한 침략 전쟁”이라며 “이때 죽임을 당한 선조들과 웅천에서 살고 있는 후손들이 세스페데스 신부 기념공원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창원시는 알아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또 “창원시는 왜군 종군신부라는 주장에 대해 역사적 왜곡이라고 말하고 있다”며 “조선 땅을 처음 밟은 서양인 신부의 역사적 문화적 교회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세스페데스 공원을 관광명소화 하려는 의도 자체가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임진왜란 참상 낱낱이 기록해 유럽에 최초로 알려”
박철 전 총장은 세스페데스 스페인 예수회 신부가 임진왜란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 서구의 증인이라고 주장했다. 또 왜군 종군신부라고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의 한 단면만을 보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박 전 총장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온 것은 극비리에 이뤄졌으며, 그 배경에는 1566년부터 가스파르 비렐라 신부가 ‘꼬라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한 숙제를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 총장의 설명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1587년 천주교 추방령을 발표한 터라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방문은 극비리에 이뤄졌고, 도착한 후에도 1년 동안 웅천 왜성의 은밀한 곳에 칩거하면서 복음 전파 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1년 만에 체류 사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가자 세스페데스 신부의 조선 방문을 도왔던 일본의 지방 제후들이 신부를 황급히 일본 땅으로 돌려보냈다.

박 전 총장은 “체류 당시 영내에 머물면서 왜군에 잡혀온 조선인 포로들만 접촉했으며, 일본군 천주교 병사들을 대상으로 미사와 세례를 한 것을 두고 종군신부라고 규정하는 건 역사적 비약”이라고 말했다.

또 “일본으로 돌아가는 도중 대마도에서 귀족의 자손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포로를 데려가 비센테(Vicent)라고 세례를 주고 보살핀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며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의 참화에 대해 보고서를 만들어 일본에 있던 예수회 부관구장에게 알림으로써 유럽에 전쟁의 진상과 조선 왕국의 존재를 최초로 알린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이며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총장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종군신부’ 논란의 발단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그는 1930년 일본 역사학자 야마구치(山口正之)의 ‘세스페데스의 서간문 연구’ 논문에서 왜군의 ‘종군신부’라고 단정지은 것이 시초라고 설명했다.

그는 “1930년대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당시 야마구치에 의해 왜곡된 주장이 아직도 국내 일부 교회사 연구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총장은 1980년대 포르투갈 아주다 도서관에서 세스페데스 신부의 서간을 직접 발굴하기도 했다. 마드리드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할 때였다.

이 서간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머물면서 임진왜란에 대해 남긴 4통의 보고서(편지)이자 유럽에 소개되는 조선 왕국에 대한 최초의 직접적인 기록이다.

내용 중에는 ‘아무도 원하지 않은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적혀 있다. 또 죽음, 질병 고아에 대한 내용과 조선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평화협상에 대해 기술하며 갈망을 담기도 했다.

박 전 총장의 서간문 발굴 등 세스페데스 신부와 관련된 연구에 힘입어 스페인 정부는 1991년 세스페데스 문화 기념관을 건립했고, 신부가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디딘 진해구 풍호근린 공원에 1993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또 스페인 마드리드 시청은 2010년 ‘세스페데스 거리’를 명명하기도 했다.

박 전 총장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1593년 조선 땅을 밟은 것과 임진왜란을 목격한 유일한 유럽인이라는 것은 팩트(사실)”라며 “우리 민족에게 귀중한 역사적 기록과 유산을 최초로 남겨준 서구인인 것도 역사적 진실”이라고 말했다.

진해구 남문동에 조성된 ‘세스페데스 공원’ 논란과 관련해 그는 “역사의 귀중한 흔적과 교훈으로 삼고, 16세기 우리나라와 스페인의 첫 만남의 귀중한 역사를 잘 보존하기 바란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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