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이가 머리를 기르고 있습니다. 허리까지 기르겠다고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름은 여자 아이 같지만, 윤슬이는 남자 아이입니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란 뜻입니다. 순 우리말입니다. 우리 부부는 남자 아이지만 중성적인 이름을 짓고 싶었습니다. 윤슬이가 크면서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윤슬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입학하기 전 겨울 쯤인가 TV에서 소아암 환자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윤슬이 또래나 동생들이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모습이 TV에 나왔습니다. 아이들 가발을 만들기 위해 머리카락을 기증 받는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가발을 만들려면 머리카락 길이가 25센티미터는 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덧붙여졌습니다.
윤슬이가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우리 부부에게 머리카락을 기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머리를 길러 소아암 환자들에게 기증하겠다고요. 우리 부부는 윤슬이가 스스로 한 선택이고,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다고 하니 "그래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내심으로 기뻤습니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주위에서 어떤 아이로 자르면 좋겠냐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그 때마다 빠지지 않고 이야기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대해 공감하고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사회적 감수성이 뛰어난 아이로 크면 좋겠다고 나는 꼭 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윤슬이 머리가 좀 길어지자 같은 반 아이들이 여자 같다고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아내한테 들은 날, 나는 윤슬이랑 같이 목욕을 하면서 "아이들이 머리가 길다고 놀리냐?"고 물었습니다. 윤슬이는 "응. 여자 아이 같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럼 아이들에게 머리 기르는 이유를 말해"라고 이야기하자, 윤슬이는 "비밀이야"라고 짧게 답했습니다.
남자 아이라고 해서 머리를 꼭 짧게 자를 이유는 없습니다. 어떠한 이유든 본인이 머리를 기르고 싶다면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윤슬이는 소아암 환자를 위해 머리카락을 기증하고 싶다는 게 머리를 기르는 이유입니다. 놀림이 아니라 칭찬과 박수를 받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놀림을 받는다고 하니 좀 걱정이 됐습니다. 혹시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봐서요. 아이 엄마는 "왜 그 프로그램을 봐가지고"라면서 괜히 TV를 탓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 엄마도, 저도 윤슬이에게 "머리 자를래"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윤슬이는 우리 부부의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나는 "머리 자를래"라고 물어보기는 했지만, 윤슬이가 계속 머리를 길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래야 된다"라는 기준과 다른 선택을 할 경우 주위에서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더 나가서는 비난과 공격, 심지어는 배제를 당하기도 십상입니다.
윤슬이가 머리가 길어서 여자 같다고 놀림을 받아서 자기 선택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우리 부부는 윤슬이가 꼭 대학에 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윤슬이가 꼭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윤슬이가 입시 경쟁과 좋은 직장이라는 줄서기에서 벗어나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나가고, 그 속에서 경쟁과 배제가 아니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 담론에 따르면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윤슬이가 성인이 되고 나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은 굳이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다른 선택을 할 경우 생길 수 있는 놀림, 비난을 견딜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이번 일로 그런 마음의 근육을 윤슬이가 키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윤영희 님이 올린 '딸 육아'라는 글에 소개된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이란 책도 윤슬이와 함께 도서관에 가서 빌려와 보기도 했습니다.
윤슬이 머리가 이제 많이 자랐습니다. 목을 다 덮을 정도는 됩니다. 요즘 어디 가면 "여자 아이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을 정도입니다. 아이 엄마는 머리가 생각보다 빨리 안 자란다고 답답해합니다. 머리를 좀 다듬어주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며칠 전 윤슬이 머리를 감기면서 "요즘도 아이들이 계속 놀리냐"고 물었습니다. 윤슬이가 "안 놀려"라고 말하더라고요. 이제 아이들도 윤슬이의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모양이구나 생각했는데, 어제 밤에는 또 다시 반 남자 아이 한 명이 놀렸다라고 말하더라고요. 윤슬이는 "놀리는 걸 잠시 까먹고 있었던 것 같아"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사회적 통념과 다르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네요.
소아암 환자에게 기증하기 위해 긴 머리를 자를 때, 그 긴 머리만큼 우리 가족도 훌쩍 자라 있겠지. 윤슬아, 너 기르고 싶은 만큼 머리를 길러 보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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