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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의 거름은 '민중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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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6월항쟁의 거름은 '민중문화 운동'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⑩]임진택 판소리 명창‧마당극 연출가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난 6월 8일 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을 빼곡히 채운 400명 가량의 관중들, 마당극의 창시자이자 창작판소리의 독보적 존재인 임진택이 나오더니 이제 막 새로 짠 판소리 <다산 정약용>을 창해나갈 두 명창을 소개한다.

"작품의 1부 '풍운 속으로'를 맡을 송재영 명창은 전주 대사습에서 장원해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명창이고, 2부 '유배지에서'를 맡을 이재영 명창은 보성소리축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명창입니다. 두 재영 씨가 다 대통령상을 받았는디, 대통령상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녀. 상 받을 때 대통령이 누구였느냐 이것이 문제여."

엉뚱한 발언에 관중석에서 미묘한 웃음이 번진다. 그러자 송재영 명창이 "나는 노무현 대통령 첫해에 받았소." 당당하게 밝히는데, 이재영 명창은 답을 못하고 쭈뼛쭈뼛한다. "거봐, 답을 못하고 딴전 피잖여. 아무리 대통령상이라도 맘에 안 드는 대통령이면 거부를 했어야지. 안 그려?" 관중석에서 "그렇지" 하는 추임새가 저절로 튀어나오면서 폭소가 뒤따른다.

지난 해 말 위암 수술을 받은 뒤 몸무게가 10여킬로그램이나 빠진 임명창은 아쉽게도 이번 공연에서 직접 창을 하지는 못하고 해설과 아니리(판소리에서 말로 이야기해 나가는 대목)만 맡았다. 하지만 '광대' 임진택의 풍자와 기세, 재치와 해학은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이다. 송재영, 이재영 두 명창의 역량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다산 정약용 얘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얘기임을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드러내며 대번에 판을 장악한다.

▲ 임진택 명창. ⓒ바꿈

예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힘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은 다산의 일대기를 통해 개혁정치와 애민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에 공감한 관객들의 연이은 추임새가 보여주듯, 이 작품은 200년 전 조선이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지난 2월 경기도 실학박물관에서의 초연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공연'이 열린지 사흘 뒤, 여운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임 명창을 만났다. 그는 "예술이 힘을 갖는 것은 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라며 예술의 본질에 대해 설명했다. 30년 전인 1987년에도 그랬노라며.

"6월항쟁 때 민중문예운동집단이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엄청나게 큰 한열이의 걸개그림이 길을 꽉 메우고, 그 걸개그림 앞에 이애주 교수가 맨발로 춤을 추면서 나가죠. 만약 걸개그림 없이, 이애주 교수의 썽풀이춤(분노의 살풀이춤) 없이 행진했다고 생각을 해봐요. 6월항쟁의 모습이 눈에 잘 보이지 않죠. 그 보이지 않는 항쟁의 어떤 기운, 역동성, 상징과 의미, 역사성...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드러내어 보이게 하는 힘, 그게 예술이에요.

87년 6월, 그동안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시민들이 밖으로 다 나왔지요. 자기 안에 분노와 저항이 숨어있었더라도 자기도 몰랐고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뛰쳐나온 거지요. 그게 예술의 힘이에요. 예술적 충격으로, 잠재해있던 분노와 저항의 감성이 몸 밖으로 새어나오니까 자신도 모르게 거리로들 뛰쳐나온 거지요. 장르로서의 예술만이 아니라 한 마디의 구호, 표어, 한 마디의 외침과 한 번의 손짓, 몸짓, 무언의 표정과 눈빛까지도... 그런 데서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같이 동요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같이 동의하고 동참한단 말이에요. 그게 판이고 마당굿이지요."

임 명창은 1987년 7월 9일 故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6월항쟁의 가장 상징적인, 절정의 순간으로 꼽았다. 하지만 정작 임 명창은 6월항쟁의 절정을 그 현장이 아닌 미국 땅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지켜봐야 했다. 광주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밀항 탈출, 망명한 윤한봉씨가 미국에서 한청련(재미한국청년연합)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87년 긴박한 정세에서 미국에서도 문화적 대중집회가 필요하다며 긴급히 협조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죽음에서 발단된 군부독재에 대한 항거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연세대생 이한열의 죽음을 보고 폭발한 것이 6월항쟁이라고 볼 수 있지요. 6월 초까지만 해도 그렇게 터져서 우리가 승리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그런데 한 달 전쯤 LA 윤한봉 형 쪽에서 연락이 오기를 '미주에서도 집회를 열고 사람을 모아야 하니 임형이 와서 공연을 해달라' 하더라고요.

그 당시 내 창작판소리 <똥바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때니까… 사실 국내 상황이 급박한데 한국을 떠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어요. 미국 비자 받기도 쉽지 않았고. 그런데 한청련 쪽에서 뉴욕 인근 스토니브룩(Stony Brook) 대학에 교섭해서 초청장이 온 거예요. 그 대학에 마침 한국학과가 신설되어 한국 전통예술에 대한 강연을 요청하는 형식이었지요. 묘한 것이, 내가 그 무렵 석계역(석관동·월계동 인접 전철역)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석계(石溪)를 번역하면 Stony Brook이라, ‘거참, 내가 사는 동네에서 초청이 왔네’ 하고 미국으로 떠났지요.(웃음)"
팟캐스트가 없던 시절, 광대가 그 역할을 했다

정치·세태 비판이 자유롭지 못했던 군사독재 시절, 임 명창은 자신의 책무가 요즘으로 치면 김제동, 김어준, 정봉주 등 인기 팟캐스트가 하는 역할과 비슷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인기를 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85년과 86년, 창작판소리 <똥바다>가 대학가를 휩쓸었어요. 80년대 초반 나보다 앞서 대학가를 휩쓸었던 공연은 공옥진 여사의 심청가 병신춤판으로, 학교 측 후원과 배려까지 곁들여져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내가 그 공연을 보면서 절치부심해서 만든 작품이 바로 창작판소리 <똥바다>입니다.

그때는 공연윤리위원회란 것이 있어서 정식 공연허가는 안 나왔고, 신촌 우리마당에서 초연하고 명동성당 마당에서 판을 키운 후 주로 전국의 대학 학생회 초청으로 순회공연을 했는데, 학교 측 후원과 배려는커녕 집안에 연금되거나 학교 경비원들로부터 출입금지 당하기도 해서 심지어는 담을 넘어 들어간 적도 있어요. 들어가 보면 학생들이 1천 명 넘게 모여 있는 데도 있고, 100명도 안 모인 곳도 있고, 빽빽거리는 마이크 스피커라도 준비된 곳이 있고 아무 음향도 준비 안 된 곳도 있는데, <똥바다> 공연을 시작하면 너무 재미있고 반응이 크니까 지나가던 학생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서 끝날 때면 수백 명, 수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어요. 판소리가 좋은 점이 뭐냐면 북 고수 하나만 데리고 가면 되니까… 이동도 간편하고, 몰래 숨어 들어가기도 쉽고, 도망칠 때도 간단하고.

전국의 대학교 안 간 곳이 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의 공연입니다. 듬성하게 앉아도 수용인원 5천명이 넘는 그 큰 노천극장에 돗자리 대신 가마니 한 장 깔아놓고, 마이크 1대 겨우 세워놓고 <똥바다> 공연을 하는데, 나 자신이 무아지경이 돼서 공연을 끝내고 정신을 차려 본즉 그 야외 노천극장 산등성이까지 관중이 꽉 들어차 있는 거예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그 기록이 깨진 것이 87년 6월항쟁 직후 이애주 교수가 벌인 ‘바람맞이 춤판’입니다. 만 명도 넘는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이틀 동안 북적댔으니까요. 그 기록은 90년대초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기획하고 문호근 선배가 연출한 <자, 우리 손을 잡자>에서 다시 갱신됩니다."
85년과 86년, 임 명창의 공연을 계기(?)로 모인 학생들은 곧장 집회를 하러 나가기 일쑤였다. “집회에 나갈 사람을 모으는 데 이용당한 게 아니냐”고 묻자, 임 명창은 “좋은 뜻으로 나를 활용한 것”이라고 정정하면서 장난기 서린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 공연 끝나면, 학생회장이든 문화부장이든 나한테 정중하게 책정된 출연료를 내놓은 대학이 있는가하면, 학생들 시위가 바로 이어져서 학생회 간부들 모두 시위에 앞장서거나 자취를 감춰버리는 통에 출연료는커녕 나 자신도 피신하느라 바쁜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어느 대학이라고 이제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때 입 싹 씻은 학생회 간부들, 소위 386세대 다수가 지금 국회의원이고 청와대에 들어가 있는 거죠.(웃음) 그래서 내가 우스개소리로 이런 말을 합니다. ‘386세대는 80년대에 내 <똥바다> 거름을 먹고 자란 세대다.’(웃음)

이참에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민예총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1985년 연극·미술·음악·춤·풍물·문학 등 예술장르만이 아니고 언론·출판 분야까지 합쳐서 만든 단체였지요. 황석영 선배가 바람 잡고, 동아투위 해직언론인 김종철 선배가 대표 역할을 맡아했는데, 6월항쟁의 씨앗이랄까 거름은 민중문화운동으로 뿌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제일 열정적이었고 행복했어요."

▲ 임진택 명창. ⓒ바꿈

6월항쟁은 미주 교포 사회에서도 펼쳐졌다

대학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주에서 ‘활용 당하기’ 위해 급히 갔던 미국에서 그는 두 달 가까운 기간을 머물렀다. 윤한봉이 앞장선 미국 땅에서도 그렇게 6월항쟁의 판이 열렸다.

"나는 서울서 6월 10일 집회(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까지 보고 떠났어요. 그리고는 미국에서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DC, 보스톤, 시카고, 댈러스 등 10여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교포들을 만났는데, 열기가 대단했지요. 지역마다 교포들이 수백 명씩 그렇게 많이 모인 건 몇 해 전 김대중 선생 망명 와서 연설한 이후 처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이한열의 장례식 장면은 뉴욕에 있을 때 뉴스로 봤어요. 백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형 걸개그림 앞세우고 맨발의 이애주 교수가 썽풀이춤 추며 걸어 나오는 모습에 한청련 식구들 모두 감격하는데, 사실 나는 걱정도 좀 됐지요. 이애주 교수는 나에겐 처형(妻兄)이니까… 내가 국내에 있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87년 이후 미주에서 교포들이 다시 수백 명 이상 운집한 사건은 87년 12월 ‘민중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백기완 선생을 몇 해 후 윤한봉 형이 초청해서 순회강연을 했을 때라고 들었어요. 그러던 윤한봉 형도 90년대에 귀국을 했으나 밀항탈출 이후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2007년 저 세상으로 먼저 갔고, 그 후 한청련도 조직적으로 분해가 됐다고 하는데 또 요즘엔 정치적 관심이 많이 줄어들어, 절창의 가객 장사익 형이 가야 교포들이 운집한다고 하더군요.(웃음)"

광주를 빼고는 6월을 얘기할 수 없다

임 명창이 87년 미국까지 가서 윤한봉을 비롯한 재미교포들과 더불어 6월항쟁의 판을 키우게 된 계기는 단지 그의 명성과 인기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사와 유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부터 5.18 광주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87년 6월항쟁을 얘기하려면 80년 광주민중항쟁을 먼저 얘기해야 합니다. 6월항쟁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규명하라, 학살자를 처벌하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을 얘기하려면 1979년의 부마항쟁과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80년대는 민주화운동가를 비롯한 지식인 대학생들에게는 광주에서의 학살과 민중항쟁에 대한 분노와 부채의식으로 점철된 시간이지요. 그런데 광주에서의 학살은 그 전해에 있은 부마항쟁과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79년 10월,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비호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의원직 박탈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대통령 박정희의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이 캄보디아(킬링필드) 사건을 예로 들며 집단학살을 감행하려는 기미를 보임에 이를 저지하려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차지철을 제압하고 박정희를 시해하는 거사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잠깐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김재규 씨에 대한 평가도 이제 역사적으로 점검될 필요가 있습니다. 김재규의 거사일이 1979년 10월 26일, 이 날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1909년 10월 26일로부터 꼭 70년이 되는 날이었지요. 그 상징성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각설하고, 박정희의 후계를 자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야욕으로 12.12 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고, 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친위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반년 전 부산과 마산에서 자행하려던 집단학살의 표적을 전라남도 광주로 바꾸어 겨냥해서 무자비한 명령을 내려 공수단을 투입합니다. 광주에서 무조건 수 백명 아니 수천 명이라도 죽여서 본때를 보이면 아무도 겁나서 못 일어난다, 이게 전두환 생각이었겠지요. 하지만 사태는 전두환 생각대로 만만하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광주에서 엄청난 항쟁이 일어난 거지요. 누구라 할 것 없이 시민들 모두 들고 일어나, 심지어는 총까지 들고 싸워 도청을 탈환하는 혁명적 시공간, 해방구가 열린 거지요.

사실 광주에서 지도자급 재야인사와 청년운동권 선배급은 계엄 확대 직전에 진행된 예비검속에 걸려 먼저 붙잡히거나, 그 전에 모두 피신하거나 했어요. 광주 청년운동권의 대표적인 선배급이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윤한봉 형과 녹두서점을 운영하던 김상윤 형인데, 두 사람 모두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전남지역 대학생 책임자로 징역 15년~20년을 선고받고 옥살이하다 석방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해야 할까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예비검속 대상이 아니었던 후배 윤상원이 광주의 운명을 떠맡아 마지막 새벽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하게 되지요.

막강한 병력으로 도청을 진압한 계엄당국이 광주항쟁의 조직도와 수괴를 조작하려 하는데 예비검속에 걸린 김상윤 형은 체포되어 있었으므로 알리바이가 확실해서 조작이 어려웠지만, 윤한봉 형은 잡히면 수괴로 몰릴 가능성이 높고 북한 간첩과 연계시킨다든가 조작돼서 처형당할 위험이 높다고 봤지요. 그래서 본인도 피신을 안 할 수 없게 되었고 주변에서도 적극 피신을 도운 겁니다."

故 윤한봉 선생은 항쟁이 열흘 만에 진압된 뒤 5.18광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남아 1년 넘게 피신생활을 하다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는 극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임 명창은 자신을 미국으로 초청한 윤한봉 선생이 '당시 광주에서 죽음으로써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고 했다. 윤한봉 선생은 광주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 미국 땅에서 민족학교를 세우고 한청련을 조직하고, 재미한겨레동포연합을 결성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 재미동포의 권익을 위해 헌신했으며, 1989년에는 세계 각국의 민간단체와 협력하여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을 추진해내고, 이어 타민족 활동가들과 '반전·반핵을 위한 국제연대'를 조직하여 세계평화에 힘을 쏟았다.

마당극을 비롯한 문화운동으로 유신체제를 뒤엎다

6월항쟁 때만이 아니라, 임진택 명창의 무대는 항상 그렇게 시대와 함께 호흡했다. 숨 막히는 70년대, 임진택이 창출한 마당극 공연과 창작판소리 <소리내력> 공연은 언제나 '역사의 현장'이자 '질곡의 타파'였다.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 사건 때 현상금 걸린 주모자 3명 중 유인태 형을 숨겨줬어요. 은닉죄라나, 당시 주모자 현상금이 200만 원이었는데 간첩 신고를 하면 1백만 원이었죠. 큰누나 집에 숨겨줬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서 잡혀 들어갔는데, 나는 그냥 잡혀만 있었을 뿐 군법회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렇게 몇 달을 지내고 구속취소로 풀려났는데, 나중에 보니까 선배들이 은닉사실 말고는 내 이름을 끝까지 숨겨줬더라고.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을 공산주의로 몰아가려고 공작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일본인 기자 두 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연계시키는 거였어요. 내가 했던 일 중에 1973년 12월말, 박형규 목사님이 주재하시던 서울제일교회에서 <청산별곡>이라는 마당극 공연을 하던 날(이 작품이 우리 연극사에서 최초의 마당극이라 할 수 있음), 일본인 기자들이 찾아와 원작자인 김지하 시인과 학생운동 주요인물인 유인태, 이철 형을 만난 일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그 연락책이었더라고. 민청학련이란 것이 침소봉대(針小棒大) 부풀려서 조작한 사건이라, 그 일을 들켰더라면 적어도 무기징역은 받았을 거야.(웃음)"

그의 공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이고 운동이었지만, 그의 공연이 만들어낸 주변 상황까지가 예술을 넘어서는 또 다른 시공간을 창출하곤 했다. 때문에 임 명창의 이야기처럼 70년대 사회운동 세력들이 다 잡혀가고 씨가 말랐을 때 탈춤과 마당극, 문인들과 언론인, 종교인을 비롯한 문화운동 세력이 들고 일어나 유신을 뒤엎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부마항쟁(79년 10월 16~20일)에서 10.26 사태로 이어지는 그 짧은 기간에 펼쳐진 임진택의 마당극(마당굿) 역시 그런 힘을 발휘했다.

"내 마당극 중 제일 기억나는 작품이 뭐냐면, 이화여대에서 공연한 <노비문서>가 있어요. 1979년 10월 이화여대 운동장에서 사흘 동안 공연을 했는데, 하루에 수천 명씩 한 1만 명은 넘게 왔어요. 관중이 스탠드에도 꽉 차고 운동장에도 꽉 차고 넘쳐서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느낌이었어요. 10.26 이전에 부마항쟁이 있었지만 서울에서는 일체의 집회가 안 됐는데, 이화여대가 일종의 성역이어서 유일하게 허가된 마당극에 사람들이 모인 거지요. 사흘 동안 집회를 대신 한 거죠. 교문 밖에는 수백 명 전경들이 투구를 쓰고 대기 중이고…

그리고 그게 10.26으로 이어져요. 그 광경을 목격한 어떤 선배 연출가 한 분이 하는 말이 '임형이 연출한 게 운동장 마당에서 펼쳐진 <노비문서> 뿐 아니라 밖에서 전경들이 탈을 쓰고 왔다갔다하는 것까지 연출한 거다' 하는 거예요(웃음). 과연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봤죠. ‘전경들까지 탈을 쓰고 등장해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연극이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진 판을 마당극이라 말하기에는 개념 범위가 너무 좁다.

그렇지, 이게 바로 마당굿이야. '마당굿'이란 용어는 백기완 선생님이 발굴해서 쓰신 표현인데, 누구를 보여주려고 만든 연극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이 다 참가해서 일구어가는 판을 일컫는 개념이라, 바로 그런 마당굿판이 집회현장 · 시위현장에 맞물려 실현된 거지요."

촛불혁명! 임 명창은 박근혜를 탄핵시킨 촛불혁명 역시 그렇다고 말했다. 광장에 나온 모두가 참여하는 굿판! 임 명창은 “이명박 ‘쇠고기 파동’ 때는 사람들이 모였어도 좀 미진했지만, 이번 박근혜-최순실 타도 집회에서는 시민의 자율적 힘과 의지가 폭발적으로 모여 마당굿판이 성립된 것”이라 했다. 6월에서 광주로, 민청학련을 거쳐 촛불항쟁으로 역사 속을 종횡무진한 인터뷰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옮겨갔다.

▲ 임진택 명창. ⓒ바꿈

정치권, 30년 전 실패에 '마지막 책임'을 다하라

"촛불혁명을 두고 어떤 사람은 6월항쟁 이후 30년 만에 성공한 시민혁명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4.19 이후 도래한 시민민주혁명이라 말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기 직전 삼례와 원평 보은 등지에서 있었던 동학교도들의 취회야말로 촛불집회의 원형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각설하고, 최근 몇 달간 진행되어 왔던 촛불혁명과 그 결과로 이루어진 정권교체를 보면서 정말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속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87년 6월항쟁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87년에 양김(김영삼, 김대중) 선생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기쁨이 30년 전에 누릴 기쁨이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30년 전 그 때 6월항쟁의 열정으로 민주진영이 단합하여 정권을 교체했다면 친일세력, 분단세력, 군사독재세력, 재벌독점세력의 적폐가 이처럼 쌓이는 걸 미리 막았을 테고, 굳이 수구세력과 손잡고 정권을 획득함으로써 개혁의 걸림돌을 자초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 오래 묵은 영호남 지역감정도 진즉에 깨끗이 씻어낼 수 있었을 테고, 엉뚱한 대통령이 나타나 우리 강과 땅을 다 망쳐놓는 일도 없었을 테고, 어처구니없는 대통령을 만나 민생과 민주주의를 이처럼 훼손하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생각하면 참으로 아깝고 아쉬운 일이지요. 30년 앞설 수 있었던 적폐청산, 이제는 누가 책임지기도 어렵지만, 하지만 반성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해야 할 일이 좀 남아 있어요."

임 명창은 '마지막 책임'이 남아 있다며, 이번 대선 득표율 이야기를 꺼냈다. 6월항쟁 직후 그 해 12월 진행된 대통령 선거 당시, 백기완 선생의 선거운동본부에 단 한명의 특보로 참여했던 임진택의 경험이 녹아 있는 조언이었다. 당시 백본은 양김의 단일화를 이끌어 내려 애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6월항쟁의 열매는 노태우가 가져갔고, 이는 광주 학살세력의 정권연장을 합규적으로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에서 홍준표가 24%, 2등을 했어요. 이 표결 결과를 선거공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자칫 87년도가 재현될 수도 있었던 거지요. 만약에 바른정당이 새누리당에서 갈라져 나오지 않았다면, 유승민이 가져간 8%가 여기(홍준표)에 붙을 수 있어요. 그럼 32%죠. 그런데 문재인과 안철수 둘이 받은 표를 합쳐 보니 62%더라고요. 만약에 문 · 안 두 후보가 끝까지 팽팽하게 표를 나눠 가져갔다면 홍준표가 당선될 수도 있었다는 거죠. 정의당 표를 몽땅 이쪽으로 가져오지 않는다면 말이죠."

36(노태우):28(김영삼):27(김대중):8(김종필).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득표율이 19대 대선 결과와 묘하게 겹쳤다. 87년 때 자리 잡힌 정치체제가 박근혜가 탄핵된 지금도 여전히 공고하단 의미일 것이다. 임 명창은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지만 이와 동시에 정치권의 개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큰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했다.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가지고 갈 표가 어차피 40%였다면 안철수가 30%, 유승민이 10%, 홍준표가 10%, 정의당이 10% 득표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이고, 정계 개편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고 봐요. 수구보수 세력은 그 이기적 성격으로 볼 때10%의 지지로는 유지되기가 어렵지요. 지금 의원 수가 아무리 많아도 3년 안에 저절로 문 닫게 될 겁니다. 반면 진보정당은 두 자릿수 지지율을 확보하면 장래가 촉망되지요. 그런데도 이번 대선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은 TV토론 등에서 안철수의 내공 부족이 드러난 이유도 있지만, 연대해야 할 이웃정당의 부각을 두려워하는 민주당의 전략선택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 결과 정책 중심의 바람직한 다당제의 실현은 멀어지고, 적대적 공생이라고까지야 이제 말할 수 없겠지만 상호 의존적인 양당체제로 도로 굳어지는 양상이 생겨난 겁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음 국회의원 선거까지 3년이 남았는데 그동안 어떻게든 협치를 해야지요. 그러면 협치의 대상을 어디까지로 하느냐?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자유한국당만 빼고 가능한 만큼 모든 당과 협치를 해 달라 이거예요. 바른정당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를 터인데, 박근혜 탄핵 시점으로 돌아가보면 굵은 선이 보입니다. 200명 넘는 국회의원들이 동의해서 박근혜를 탄핵시켰잖아요. 얼마나 큰 힘입니까?

지금 당장 중요한 과제들부터, 과반수가 필요하면 과반수만큼, 2/3가 필요하면 2/3만큼 협치 범위를 신축성 있게 적용해서 바꿔나갈 것은 바꿔나가라 이 말입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해 80% 넘는 지지율이 나오는데, 이렇게 힘이 있을 때 자신과 경쟁할 수 있는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협치하라,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크는 것을 경계하지 말고 새누리당인지 자유한국당인지를 고사시키는 것을 전략으로 택하라. 그렇게 해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우파 정당이 세를 확보해야 민주당은 중도의 정당이 되는 거고, 그래야 정의당이 좌파의 대열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진보정당이 20%는 얻어야죠. 그렇게 되면 국민은 마음 놓고 정책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폭력적인 정치체제를 소멸시키는 것, 협치하고 연대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서 정책에 따라 국민이 원하는 바가 정치에 반영되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큰 그림을 그려 달라 이겁니다."

예술가의 예지, 시대감각을 믿어달라

임 명창은 예술가는 정면만이 아닌 왼쪽 오른쪽 측면에서 또는 뒤에서 보는, 거리와 여유를 가지고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 그 판에 몰두한 선수보다 훈수를 두는 이가 더 좋은 수를 잘 찾아내듯, 예술가의 역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40년 넘게 민주화운동의 복판을 지킨 문화운동가이자, 광대를 자처하는 예술가인 임진택 명창! 3시간 가까이 진행된 그와의 인터뷰를, 그의 내력을 가만히 곱씹어보자니 한 문장이 잔상을 남겼다.
"예술가의 예지랄까, 시대감각에 대해 존중하고 믿어 달라."

임 명창의 이 말이, 예술가를 정치적인 잣대로 재단해 돈으로 그 정신을 사려 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에서부터 박근혜 정부의 몰락이 시작됐다는 것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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