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친이명박계 핵심 정두언 의원의 도발적인 발언에 한 친박계 의원은 발끈하면서도 "지방선거 이후 당 주류세력은 무너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공격과 견제의 의미가 담긴 말들이지만, 계파 불문하고 박 전 대표의 본격적인 행동 개시 시점이 내년 지방선거 이후가 될 것이라는 공통적인 관측이 녹아있다.
이처럼 지방선거 전까지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정중동' 행보를 취할 것이라는 점은 정치적 상식에 가까웠다. 바닥 지지율을 헤매는 이명박 정부와 여간해선 존재감을 발휘 못하는 야당 사이에서 '여당 속 야당'이라는 절묘한 위치선정도 박근혜의 탄탄대로를 보장하는 듯 했다.
그러나 미디어법 정국을 관통하며 박 전 대표의 스텝이 꼬였다. '한마디 정치'로 늘 남는 장사를 해온 박 전 대표가 이번엔 게도 구럭도 잃었다. 미디어법을 반대하는 진영으로부터는 이명박 대통령과 생각이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됐다. 오락가락한 그의 행보에 '그네' 박근혜, 'U턴' 박근혜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연합 |
반대로 미디어법 처리가 '박근혜의 딴죽'으로 누더기가 됐다고 보는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야유를 퍼부었다. <조선일보>는 박 전 대표를 "경상도의 DJ"라고 했고, <동아일보>는 박 전 대표의 정치스타일을 "근혜님의 신탁통치"라고 비아냥거리며 "신념 있는 원칙주의자 박근혜의 원칙이 신의 뜻처럼 절대 진리인지, 아니면 금배지에 목을 매단 정치꾼과 구세주를 고대하는 일부 국민이 만든 신화인지는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 야권 인사는 "박근혜 전 대표에게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지난 12월 입법 전쟁 때, 그리고 이번 미디어법 정국에서다. 이번 정국에서 박 전 대표가 '원칙'을 고수했다면 정계 개편까지 가능한 파괴력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고 논평했다. 미디어법 정국에서 박 전 대표에게 기회가 열렸으나 그것을 차버렸다는 것이다.
갈림길 앞에서 진퇴양난
미디어법이라는 단일 사안을 넘어 박 전 대표는 이제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는 입장이 됐다. 그의 하락한 지지도가 독보적인 위상까지 위협받는 단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명박 대통령과의 정치적 관계를 예의주시하는 눈이 많아졌음은 위협적이고 불길한 징후다.
이상돈 중앙대 교수는 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친MB의 길을 가는 것도 박 전 대표의 선택이고 다른 길을 가는 것도 박 전 대표의 선택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대선을 몇 년씩이나 앞둔 시점의 지지도라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면서 "지금까지 박 전 대표가 누려온 높은 지지도는 친이 세력의 실패에 따른 반사적 이익 같은 측면이 있었다. 이제는 박 전 대표가 자신의 것을 내놓아야 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표의 딜레마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상돈 교수의 지적대로 핵심은 이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이다. 소극적 차별화를 거쳐 지방선거 이후부터는 이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나아가는 시나리오가 미디어법 정국을 거치며 쉽지 않게 됐다. 몇가지 피할 수 없는 굵직한 정치 일정에서도 박 전 대표가 운신의 폭을 넓게 가져갈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우선 조만간 단행될 개각시 친박 인사의 입각 여부는 전적으로 이 대통령의 권한으로 귀속됐다. '박근혜의 딴죽'이 보수진영의 힐난을 받는 상황에서 청와대가 굳이 박 전 대표에게 화해 제스추어를 쓸지가 불투명해졌고, 설령 친박 인사 입각을 타진하더라도 과거처럼 박 전 대표가 이를 승인하거나 거부할 위치는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5일 "이번 개각에서 적어도 한나라당 의원 3-4명을 입각시켜 정부의 정무적 판단을 보완하고 민심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당정 소통이 잘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건 정치인 입각을 최소화하려는 청와대 기류와 무관치 않다.
10월 재보선과 이어질 전당대회도 박 전 대표를 난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친박 진영은 박희태 대표의 10월 재보선 출마를 돕겠다는 입장이다. 박희태 대표가 친박계 의원들의 복당 문제를 원만히 해결했고, 친박 의원들에게 당협위원장 자리도 배려해 준 만큼 보은 차원에서 박희태 대표의 양산 출마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18대 총선 때 이 지역에서 만만치 않은 득표력을 보여준 친박계 유재명 씨의 출마를 주저앉혀야 하는 대가가 따른다.
한나라당과 친박연대의 통합론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친박계의 지원이 급한 박희태 대표가 최근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자리에서 한 발언이 발단이다. 하지만 친박연대 내부에서조차 통합론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 아직까지 우세하다. 또한 한나라당과 친박연대의 합당이 실현된다고 해도 이는 박 전 대표와 이명박 정부가 '공동 운명체'라는 각인효과를 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친박계는 박희태 대표를 지원하면서도 '대표직을 유지한 출마'를 꼬리표로 달아 가급적 박희태 체제를 오래 끌고가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복귀를 차단하고자하는 심산과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는 박근혜 전 대표가 전면에 나서는 게 득될 게 없다는 판단이 맞물린 선택이다.
그러나 친이계는 박 대표가 대표직을 달고 재보선에 출마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어서 박근혜계의 바람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또한 친이계가 추진한 9월 조기전대가 사실상 물 건너 가기는 했으나 박 전 대표와 친박계가 내년 1~2월로 예상되는 전당대회마저 수수방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이처럼 박 전 대표에게 선택의 시점이 다가온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 대통령과 본격적인 차별화의 길로 들어서기도 여의치 않고 공동 운명체의 틀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도 부담스러운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위험한 줄타기를 하며 반사이익만 챙기려다간 더 큰 위험에 봉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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