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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아고라포비아'?

'여백 없는' 광화문 광장…"광장이 아니라 정원이다"

"새로 마련되는 시청 앞 광장이 집회나 시위의 천국이 돼 시청이 심한 소음에 시달린다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아울러 시청 앞 광장이 시정은 물론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 바란다."

2004년 2월, 서울시장으로 재임 중이던 이명박 대통령이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조성된 시청 앞 서울광장은 지난해 '촛불 정국'에 이어 올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높은 차벽으로 둘러싸였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의 광장이 화려하게 문을 열었다. 바로 지난 1일 시민들에게 개방된 광화문광장이다. 서울시는 지난 2일 광화문광장에서 집회·시위를 불허하고 전시회 중심의 공간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촛불 집회 이래 정부와 서울시의 '광장 공포증(아고라포비아·agoraphobia)'이 점차 심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 지난 1일 개방된 광화문광장에 몰린 인파. ⓒ프레시안

급기야 경찰은 3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의 첫 기자회견을 열던 시민단체 활동가 10명을 긴급 연행했다. 이들은 "집회·시위 등, 광화문광장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진행 중이었다.

이날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지난 5월 28일 서울시가 발표한 '광화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광화문광장 조례)'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광화문광장 조례에 집회 및 시위를 사실상 원천봉쇄하고 정부 기관의 행사를 우선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사실 서울시가 집회의 자유를 조례로만 막아버린 것이 아니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운 인공 조형물을 통해서 이곳에 집회 뿐 아니라 어떠한 대형 행사도 사실상 불가능하게끔 만들었다.

인공 조형물로 가득 찬, '여백 없는' 광화문광장

광화문광장 개방 이틀째인 지난 2일, 주말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광장을 찾은 박순영(46) 씨는 "광장이라고 하기에는 공간 자체가 너무 협소하다"며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넓은 광장을 생각하며 왔는데, 마치 전시회를 구경하는 기분"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집회나 시위를 막을 목적으로 각종 시설물을 많이 설치한 탓에 광장 자체가 협소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광화문과 가장 가까운 쪽에는 2771제곱미터(㎡) 규모의 '플라워카펫'이 설치돼 있어 시민들이 통행하기에 비좁다. 그 외에도 광장에는 지하 해치마당, 이순신 장군 동상, 12·23 분수가 차례로 들어서 있다.

올 한글날에는 가로 11.5미터, 세로 9.2미터 규모의 세종대왕 동상도 들어설 예정이다. 이 때문에 1만9000제곱미터에 이르는 광장 전체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너른 공간은 세종문화회관 앞 쪽에 있는 1751제곱미터 규모의 중앙광장에 불과하다. 광화문광장이 시민의 '광장'이 아니라 서울시의 '정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탁 트여 시민들의 자발적인 활동과 축제로 가득 채워진 외국의 주요 광장과 비교했을 때, 인공 조형물로 가득 차 시민들이 '관람'을 강요받게 되는 광화문광장의 모습은 서울시가 광장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 영국 런던에 위치한 트라팔가 광장의 모습. 영국에서 광장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축제와 난장의 공간이다. ⓒ신화사=뉴시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3일자 <한겨레> 기고문에서 "광화문광장이 시민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체현할 수 있는 공간인지 의심스럽다"며 "지금의 광장은 전통도 역사도 문화도 없이, 인공 조형물이 지배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테마파크 같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또한 "현재 광화문광장의 모습은 잘 치장한 조경 공간, 혹은 '열린 음악회'를 기다리는 관제 이벤트 공간 같아 보인다"며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유서 깊은 광장도 이런 식으로 공간을 규격화하고 박제화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민주주의 실험장'이었던 광장의 역사…광화문광장은?

지난 7월 16일 참여연대 주최로 열린 '광장을 열어라'라는 제목의 토론회에서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 혁명과 제도를 등장시켰던 유럽 도시들의 심장부에는 항상 광장이 있었다"며 "광장은 근대 시민계급의 정신적 역동성과 정치적 자율성을 실현하고 증언하는 장소였다"고 말했다.

신 교수의 지적대로, 세계 각지에서 광장은 참여 민주주의와 자율성의 상징으로 기능해왔다. 흑인민권운동의 지도자였던 킹 목사가 수많은 미국인들의 움직였던 명연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연설했던 장소는 교회당이 아니라 링컨기념관 앞 광장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의 요구가 터져나왔던 곳은 대학이나 국회가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이었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콩코르드 광장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이어가는 중심지 노릇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광장에서 처형됨으로써 전제 군주제도 함께 막을 내렸다. 또 조지 오웰의 소설 <카탈루냐 찬가>의 배경이기도 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은 프란시스 프랑코 군부 독재와 맞서 싸운 반파시즘 공화주의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탁 트인 스페인 카탈루냐 광장의 전경. 인공 조형물로 가득찬 광화문광장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commons.wikimedia.org

영국의 대표적인 광장인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은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등 반전·평화운동과 반세계화 운동의 메카로 불린다. 지난해 4월 G20 정상회담 반대 집회도 트라팔가 광장을 비롯한 런던 시내에서 열렸다.

그러나 과격하기로 유명한 유럽 시위대의 일부 폭력 행사에도, 영국 경찰은 이를 이유로 광장 전체를 폐쇄하는 일은 없다. 지난 5월, '집회'가 아닌 노 전 대통령의 '추모제'를 막기 위해 서울광장을 차벽으로 가로막았던 한국 경찰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광장을 열어라"

미국 연방대법원은 1983년 법원 주변 인도에서의 집회 허용 문제를 놓고 의미심장한 판결을 내렸다. 법원 주변 인도는 '전통적 공적 광장'에 속한다고 판결한 것. 여기서 전통적 공적 광장이란 도로, 인도, 광장 등 "오래 전부터 공중의 사용에 제공됐고 시민이 이 장소에서 상호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할 수 있는 곳"을 의미했다.

이 역시 지난 3일, 광화문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을 했다는 이유로 참가자 10명을 연행한 한국의 경찰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신 교수는 16일 토론회에서 "광장이 닫힌다는 것은 시민들이 나랏일에 대해 말하고, 논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다는 것, 오직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광장 폐쇄'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일 '시민 품으로' 돌아온 광화문광장이 앞으로 '열린 광장'으로 기능할지, 아니면 청계천에 이어 서울시의 치적을 자랑하는 '닫힌 정원'으로 남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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