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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이제 시민이 탄생했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⑦] 김인봉 안양군포의왕 친환경무상급식시민행동 상임대표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여기 이 지점이 잊히지를 않아요. 화염병이 떨어지니까 이 방향으로 가는 차를 붙들고 휘발유 좀 달라고… 차 세워놓고 그 자리에서 빨대로 기름을 빼서 즉석으로 화염병을 만들기도 하고 그랬어요. 소주병도 구해오고."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6차선이 넘는 사거리의 한복판이었다. 놀라서 되물으니 "그러니까 여기"라며 김인봉 안양군포의왕 친환경급식시민행동 상임대표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기꺼이 차에서 기름을 내어 줄만큼 "군부독재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도가 굉장히 높았다"고 그는 1987년 6월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당시 집회가 열렸던 길을 김 대표를 따라 걸으며 30년 전을 그려보았다.

"본백화점(현 본프라자)이 당시에 최고 좋은 건물이었어요. 여기가 제일 번화가였죠. 지금은 CGV인데 그때는 삼원극장이라는 유명한 극장이 있었어요. 바로 이쪽에 중앙시장이 있어서 사람이 지금도 많잖아요. 새로 지은 건물이 많지 않아서 거리 풍경이 당시와 다 비슷해요. 저기 높은 건물 옥상에서 유인물을 뿌렸죠. 그때 6월에는 여기에 2만 명가량이 모였어요. 완전 해방구가 된 거죠."

87년 안양지역에서 가장 큰 시위가 열린 때는 6월 26일. 전국 각지에서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시위에 나선 국민평화대행진 날이었다. 인파는 안양로 중앙사거리에서부터 우체국사거리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에 이르는 6차선 도로를 가득 채웠다. 김 대표는 청년 노동자를 비롯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주민들 대부분이 거리로 나섰다고 설명했다. 30년 전 그 길 위에 2017년 촛불집회의 풍경을 대입하며 한참을 더 걸었다.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경찰서까지 가서 거의 점령할 뻔 했어요. 경찰들은 서울에 진압한다고 다 가서 거의 비어 있었죠. 경찰서 담을 허물고, 담장 일부를 불에 그슬리고…."

경찰서는 시위대 말미가 서 있던 우체국사거리에서도 1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만큼을 일부러 걸어올 만큼 6월항쟁의 열기와 독재정권을 향한 분노가 뜨거웠으리라 생각하던 순간, 커다란 벽이 찬물을 끼얹었다. 안양경찰서는 이미 자리를 옮겼고, 그 터에서는 재건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장을 가린 커다란 벽과 천막 틈새로 아직 들어내지 못한 흔적을 간신히 구경하고 자리를 떴다.

▲ 김인봉 대표. ⓒ바꿈

"대중 전체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6월항쟁 이후 어느덧 30년. 그는 변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경찰서는 사라졌고, 단관 극장은 멀티플렉스가 되었다. 본프라자는 더 이상 지역 최대의 백화점이 아니다. 그 시간 속에서 김인봉 대표 역시 조금은 변했으리라.

"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에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어릴 때는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고 왔어요. 그런데 운동을 하면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해야 많이 할 수도 있고 진리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그렇다고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중 전체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로 생각이 많이 바뀐 거죠."

혼자 결정하고 실행했다던 김인봉 대표. 처음 체포된 일 역시 혼자 결단한 일이었고, 그 일은 1980년 4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군사교육 반대 유인물 배포 성대생 포고령 위반 검거')에 그대로 남았다. 대학에 입학한 지 겨우 한 달을 조금 넘긴 시점이었다.

"제가 되게 가난하게 살아서 고등학교도 못 갈 형편이었어요. 우리 엄마, 아버지가 일찍 이혼도 하고 어릴 때부터 혼자 살아서 대학 갈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런데 경북대에서 (1979년) 시위하는 걸 보면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대학교 가서 데모 한 번 하고 죽어야 겠다… 약자가 소리치는 건 정의라고 생각했어요."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이듬해,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데모 하려고 대학에 갔다'는 김 대표는 1980년대 계엄포고 위반 1호로 잡혀 들어갔다. 문제가 되었던 유인물에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 집체 교육(교련)을 거부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교련을 받았는데, 고등학생이 받은 건 군대를 면제해주지 않아요. 그런데 대학생은 교련하면 군대를 2개월씩 감해줘요. 그때는 대학에 가는 사람이 전체 몇 퍼센트가 안 됐잖아요. 여학생들은 반에서 한두 명 밖에 대학에 못 갔고, 내가 다닌 학교는 공업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전교생 1천 몇 백 명 중에서 (대학 진학자가) 몇 십 명이 안 됐어요. 학생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게 군사 문화라는 점에서도 문제인데, 거기에다 대학생에게만 혜택을 주는 불평등이 있었죠."

그런 김 대표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84년 12월 말께 안산공단에 취업을 했다. 공업고등학교 출신, 용접이 특기였다. 하지만 자신의 삶만으로도 버거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회 문제에) 당연히 관심 없죠. 어쨌든 그때는 살기가 좀 좋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전두환 때에 3저 호황이 왔잖아요. 박정희 정권 말기의 경제 위기가 극복되어 가고 있던 시점이 있었으니까, 억압된 사회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갖기는 지금도 다수라고하기 어려운데, 당시엔 더 그랬겠죠?"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이 가장 멀다'

노동운동을 하던 당시 김 대표는 일은 안산에서, 거주는 안양에서 하고 있었다. 안양에는 직원이 댓 명에서 많아 봤자 스무 명 정도에 불과한 소규모 공장('마찌꼬바')들이 즐비했다.

"공장들이 수도권 규제 정책에 따라 이동해 나가는 때였어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이 인천에 많이 갔으니, 우리는 수도권 옆으로 가서 소위 서울 주변을 조직화하자는 관점으로 안양에 왔어요."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학출'(대학 출신)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갇히기 일쑤였다. 대중을 상대로 공장 벽에 낙서를 하고, 유인물을 쓰면서도 '신식민지 예속 국가 독점 자본주의 타도하자!'나 '제헌 의회 소집하자'와 같은 일상 언어와는 거리가 먼, 사회과학적 용어들을 빼곡히 적어 넣었다.

"저는 다른 애들에 비해서 정말 가난뱅이 출신이어서 상대적으로 대중 정서에 가까운 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게(어려운 어휘를 쓴 구호 등) 말이 안 된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그런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나, 뭐가 중요한지를 모르는데…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도 애들한테는 잘 안 통했죠. 제가 확산하지 못한 잘못도 있고요.

이성중심주의가 강한 측면이 있어서 그랬던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문제를) 알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신영복 선생께서 예전에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데가 길이 가장 멀다'고 하셨어요. 아는 게 행동으로 옮겨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옮겨지는 시간이 필요한 거잖아요?"

안산과 안양을 넘다들며 노동자와 함께 하는 법을 고민하던 김 대표는, 아쉽게도 1년여 만에 공장 생활을 접어야 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 허리디스크가 오는 등 몸이 많이 망가져 있었다. 경찰에 연행됐을 때 당한 폭력의 후유증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추측’이라고 단서를 달며 말했다.

"5.18 나고 난 다음에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때 들어가자마자 밟더라고요. 군화발로 밟았어요. 한 30분 밟혔을 거예요. 아프지는 않았어요. 왜냐면 정신없이 맞았으니까. 그렇게 맞고 나니까 정신은 없었고, 몸이 쑤시는 거 밖에 없었는데 그때는 병이 안 났으니까…."

선택지가 없었다. 신체적으로 조금은 수월한 시민운동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한홍구 선생이 '청년학교'라고,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학교 같은 것을 서울에서 처음으로 했어요. 우리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안양지부에서도 청년학교를 했어요. 대중 조직 방안으로 교육 사업을 한 건데, 한국사나 철학, 경제 등을 가르쳤어요."

글을 읽지 못하는 성인들을 위한 문해학교를 열고,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약자들을 위한 모금활동도 진행했다. ‘진짜’ 생활정치를 실현하려 92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지방자치선거에도 출마했다. 엄청나게 달려왔지만 김 대표는 자신이 해온 일을 ‘실패’라고 말했다.

"더 이상 할 힘을 못 만들어 냈어요. 지친 거지요.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좋았겠지만, 온힘을 다해서 더 할 수 없었어요. 힘은 100을 다 내서 달리면 안 된다, 60으로 달리다가 열심히 할 때 80, 결정적일 때 100을 해야 한다. 120이나 200은 정말 죽을지 모를 때나 해야 한다는 게 이때 얻은 교훈이에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김 대표는, 조직 내부의 갈등과 분열 역시 못내 아쉬워했다.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중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에 내가 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수학에서 방정식을 연립으로 세워서 푸는 것처럼, 세상은 연립으로 푸는 것보다 더 많은 함수가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편견으로, 한 가지 고정관념으로 재단을 해요. 지금도 민주 대 반민주,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반대를 해요. 통일 전선에 대해서는 존중을 하지만요.

당시 민청련에는 좌파와 우파가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찢어졌어요. 대중 조직 중에서 좌우가 같이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는데 찢어져 버려서 우리 때도 같이 하지 못했는데 뭘 할 수 있나…."

"타인의 밥에 관심을…6월항쟁보다 더 감동"

그렇다고 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시락도 제대로 챙겨 다니지 못할 만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김 대표의 눈에 학교 급식 문제가 들어왔다. 2000년대 중반, 그는 '무상 급식' 운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최초로 타인의 밥에 대해서 투표를 던진 사건이라고 생각을 해요. 아이를 키우는 건 국가의 의무이고, 또 학부모들이 다른 아이들의 밥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공통체성에 굉장히 주목을 했어요.

우리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는 제가 학부모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했는데, 그때는 친환경 급식을 만들었어요. 이전과 같은 급식비로 친환경 급식률이 70~80%가 됐어요. 안양시장을 압박해서 안양시장이 결정을 한 건데, 그게 서울 성북구에서도 된 거죠. 이렇게 친환경 급식이 한 곳에서 물꼬를 트니까 모두가 그걸 따라하게 되는 거예요. 6월항쟁보다 더 감동을 받았어요. 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는 경험을 한 거죠."

김 대표는 "경기도 급식을 좋게 만드는 데 안양의 역할이 크다"고 자평하면서도,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게 아쉬움을 표했다. 친환경 무상 급식 도입,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정책을 실행하는 것을 통해서 민주주의 훈련을 시키면 좋아요. 급식은 학교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모을 수 있어요. 학부모가 가장 예민한 문제니까요. 이걸 모티브로 해서 집에서도 먹어야 되는 게 있고, 학교 급식 만이 아니라 공공 급식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되는 것도 있죠."

식생활을 통해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그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김 대표의 말에서 생활 속 민주주의에 대한 짙은 고민이 묻어났다. 묻고 싶었다. 30년 전 6월항쟁은 왜 정치적‧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데서 그쳤을까. 김 대표는 "시민이 여기까지 오는 과정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나부터도 시민 민주주의가 뭔지 몰랐어요. 활자로만 있었던 거예요. 민주주의, 주민, 주인이라는 게 그저 말인 거죠. 요새 보면 집을 짓는데 그 앞집에서 시끄럽다, 돈 내놔라, 보상하라고 그래요. 자기 집을 지었을 때 시끄러운 건 고려를 안 하는 거잖아요. 각자 도생의 시기에 자유와 민주는 그렇게 이해가 됐어요. 공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국가가 어떻게 돼야 한다는 생각이 비로소 생기고 있어요."

▲ 화염병을 즉석 제조했던 곳을 가리키는 김인봉 대표. ⓒ바꿈

촛불집회, 비로소 시민이 태어났다

민주주의와 주권이 글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6월로부터 30년 떨어진 지점에서 열린 촛불집회를 통해서였다. 김 대표는 이를 '시민의 탄생'이라고 칭했다.

"시민의 탄생이라고 계속 이야기를 해요. 그 전에는 시민이 없었어요. 주권이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 무슨 시민이에요. 시민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시민 사회라는 말의 시민이 그거잖아요.

봉건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 시민 민주주의(civil democracy)에 대한 이해는 바로 주권과 시민의 의무, 이런 데 대한 이해에요. 우리는 비로소 시민 주권에 대한 눈을 떴어요. 이제야 시민 혁명을 정치적으로 이행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요. 그 전(1987년)에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했는데 사람들이 동의가 안 된 거죠."

학생운동이 확보한 공간이 6월항쟁을 열었듯, 6월항쟁이 시민혁명을 탄생시켰다. 이름만 있었던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드디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필요했던 시간 30년. 역사는 삐걱거렸고, 때로는 되돌아갔다. 이제 막 태어난 시민이 좌충우돌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이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진짜 시민으로 한 걸음 더 전진시켜야 될 것 같아요. 아마 곧바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가 촛불집회에서 시도를 해봤어요. 토론광장을 열었는데 대다수는 잘 안 됐어요. '각자 의견을 내봅시다'라고 했는데 그게 안 돼요. 집에서 촛불을 들어봅시다. 이런 게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이야기하는 시민은, 개개인의 멘탈이 강해져야 되는 거예요. 개별자로서 행동할 수 있어야 시민이죠. 촛불이 광장에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그에 의존하지 않아야 민주주의가 되는 거죠. 조금 더 자유롭게, 각각의 영역에서 액션이 일어나야 되는 거지 모여야만 액션이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예요."

나와 너의 운동이 별개로 존재하고 그걸 자신의 생활 속에서 행동하는, 그리고 그 운동을 서로 존중하며 공동체를 이룩하는 일. 김 대표는 2017 촛불의 남은 과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누적된 걸 확인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인터뷰의 말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했던 질문이 있다. 우리는 왜 87년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는 4.19혁명에 대해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노라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4.19혁명이나 6월항쟁이 임진왜란 같은 이야기일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타인을 통해서 (경험)한 적이 있는 것일 뿐이잖아요. 4.19나 5.18 때 사람들이 저항을 하고, 어떻게 전진해 왔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4.19를 다시 또 해야 할 거예요. 굳이 느낌이 안 오니까 (기억을) 안 해도 되겠냐고 말할 수는 있지만, 역사는 누적하지 않으면 전진이 안 돼요. 우리가 예전에 왜 이런 민주주의를 하게 됐는지, 전혀 이해가 없으니 민주주의가 안 되는 거죠. 누적된 걸 끊임없이 확인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만큼 나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발돋움할 자리를 되돌아보며 기억하는 일. 촛불광장에서 6월항쟁을 돌아보는 이유는 지난겨울 광장의 정신을 잊지 않고, 출발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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