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주목할 점은 '최종적으로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대목이다. 성급한 결론이기는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북미 간 대화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볼 수가 있다는 지적은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지난 4월 말 대북 기조를 의회에 공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을 포함한 군사옵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만약 이러한 기조가 실제 북한 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무력 사용을 배제한다는 의미라면, 이는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를 끝내고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와 같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화 강조가 향후 구체화될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흐름에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인다.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도전과 기회
20여 년이 넘도록 한국외교의 중심이 북핵 해결에 놓여왔음을 감안하면 문재인 정부 하에서 향후 펼쳐질 북핵 외교의 진자운동(振子運動) 역시 한반도 분단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배태하고 있는 양축(남북관계 축에서 동북아의 국제정치 축까지)을 오고가면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북핵문제는 지금까지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국제정치 축으로 바싹 옮겨진 채 '도발-위기-협상-일괄타결-합의파괴'라는 순환적 패턴으로 진행되어 왔다.
북한은 6자회담 등에 참가하면서도 미국과의 양자회담에만 집착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반미적 사대주의'라고도 했다. 북한은 이렇게 한국을 의도적으로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려고 했다. 북핵 문제에서 한국을 '왕따'시키려는 북한의 전술은 "북한 핵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과 관련하여 예상할 수 있는 대북 정책 방향은 과거 노무현 정부 시절 추진한 평화번영정책과 유사한 경로를 택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를테면, 남북한 관계와 동북아에서의 국제질서라는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한 '하이브리드' 정책이 만들어 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공약으로 남북한 관계에서 "남북 군사관리체계를 구축하여 우발적 충돌방지, 군사적 긴장완화와 군비통제를 추진"함과 동시에 "북핵 문제 완전해결 단계에서 평화협정체결"을 내걸었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남북한 신뢰구축과 군비통제를 실현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원대한 그림을 그렸다.
동북아에서의 질서와 관련해서, 문재인 정부는 "주변 4국과의 협력외교를 강화하고 동북아 더하기 책임공동체를 형성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는 노무현 정부 시절 줄곧 강조해 온 '동북아 균형자론'을 버전(version)만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가 굳건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기조도 노무현 정부의 한미동맹에 대한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한반도 위기로 가는 길은 대화로 포장되어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국가안보실 1·2차장에 대화파(또는 비둘기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을 앉혔다. 북한의 거듭되는 미사일 도발에도 불구하고 얼핏 보면 대화가 우선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앞서 지난 5월 21일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부 장관 인사를 발표하면서 "과거 정부에서는 안보를 국방의 틀에서만 협소하게 바라본 측면이 있었다. 지금의 북핵 위기 상황에서는 우리의 안보에서 외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위한 국제공조와는 별개로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외교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그럼에도 "지옥으로 가는 길은 호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마르크스의 문구처럼, 대화로 포장된 길이 자칫 한반도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개연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북한의 추가적인 도발이 없으리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정일 시대에 김일성의 비핵화 유훈 언급은 위장 전술임이 드러났다. 2012년 7월 일본 <도쿄신문> 등 일부 언론은 조선노동당 내부 문서를 인용하여 "김정일이 생전에 대량의 핵무기를 생산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김정일 사망(2011년 12월 17일)전까지 두 차례의 핵실험(2006년 10월 9일, 2009년 5월 25일)을 하였으며, 2012년 4월 개정 헌법의 서문에는 김정일이 사망 전에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전변(轉變)시켰다고 명시했다.
김정은은 김정일 사망 약 2주 뒤인 2011년 12월 30일 북한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돼 본격적인 '김정은 시대'를 알렸다. 이듬해 4월에는 당 대표자회와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당·정 권력까지 모두 차지하면서 사실상 권력 승계를 마무리했다.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 3대 세습이었다.
그리고 불과 집권 14개월만인 2013년 2월 12일에 3차 핵실험을 감행하여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공고히 할 데 대한 법'을 채택(2013년 4월 1일, 최고인민회의)하였다. 이는 김정은 시대에서도 핵무기 능력을 계속 강화해 나가겠다는 강력한 신호탄이었다. 지금까지 북한은 4차(2016년 1월 6일), 5차(2016년 9월 9일) 핵실험을 이어 오고 있다.
5차 핵실험 후 북한은 "핵탄두가 표준화, 규격화됨으로써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된 보다 타격력이 높은 각종 핵탄두들을 마음먹은 대로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있게 됐다"고 발표했다. 한성렬 북한 외무성 부상은 올해 4월 14일 평양에서 가진 <에이피>통신 인터뷰에서 "최고지도부가 적절하다고 판단을 내리면 언제든지 핵실험을 할 것"이라며 6차 핵실험이 외부의 압력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어 북한 <노동신문>은 5월 25일 자 논평에서 미 대북정책의 '관여' 정책에 대해 "겉으로는 대화와 협상, 평화의 간판을 쓰고 있지만 실지로는 우리를 안으로부터 무장 해제시켜보려는 극히 위험천만한 계책"이라며 "양키식(미국식) 오만과 양면성의 극치"라고 힐난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와 대화 병행에 북한 특유의 강(强)의 전술로 맞대응한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반도 상공에 위기의 먹구름을 모으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한미동맹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는 일반적으로 가상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는 억지(deterrence)와 공격을 받았을 때 이기는 방어(defense)로 구성된다. 따라서 국가안보 수준을 단기간에 높이는 방법은 타국과의 군사동맹을 맺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억지로서의 한미동맹이 그랬다.
문재인 정부는 한미동맹을 '굳건한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고차원의 협력관계로 구축'하는 것으로 천명했다. 나아가 확장억제(지)력(extended deterrence) 강화 등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억지와 방어 역할을 모두 포함하는 동맹을 유지하는 데에는 비용이 들기 마련이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에 대한 인식은 '가치'(values) 측면보다는 경제적 측면이 강해 보인다. 따라서 동맹유지에서 오는 이득에 그 비용을 뺀 순이익을 어떻게 보느냐가 핵심이다.
그렇다면 동맹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해야 할 때 문재인 정부가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전제는 한국이 부담해야 하는 주한미군 비용의 상한선이 주한미군 주둔에서 오는 이익보다 커서는 안 된다(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외에, 한국과 미국 사이의 근본적인 정책적 갈등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를테면, 북한을 두고 한미가 항상 합의에 의한 일관된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미국과 한국이 전략적으로 고려하는 대상과 수준에서 상이성(discrepancy)이 존재해 왔다.
일례로, 동북아에서 한국과 미국의 공동의 적이 누구인지가 불분명하다. 일반적 견해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관심은 우선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목적으로 한국을 완충 지역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그러하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장기 외교전략은 한국이 미국과 동맹을 끊고 친중국적이거나 중립적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일개 '중국몽'으로 치부할 수 있으나 중국의 포석은 먼 곳을 향하고 있다. 적어도 태평양의 절반은 자국의 세력권으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시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미국과의 일전에 대비하여 유리한 국제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판 실크로드로 불리는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Initiative)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미국은 일본과의 동맹 강화에 방점이 찍혀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의 회담에서 미일동맹은 태평양 지역 안정을 위한 주춧돌(corner stone)이라고 했다. 아베의 일본은 오래 전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진입했다. 여기에다 미국은 한국까지 끌어들여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을 체결(2016년 11월 23일)토록 중재했다. 이른바 한미일 삼각연합 카르텔의 형성이었다. 아직은 느슨한 형태이지만 상황에 따라 더욱 조여질 수도, 아니면 반대로 진행될 여지는 남아있다.
요약하면,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국제정치 환경은 남북관계와 동북아 국제질서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북한 비핵화에 필요한 관련국들의 협상 카드는 레고(Lego) 장난감으로 비유할 수 있다. 어떻게 짝을 맞추느냐는 방법적 문제만 남아있다. 짝을 맞추기가 지연될수록 북핵 능력은 강화되고, 협상의 조건 역시 까다로워진다.
게다가 정권교체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이 체제를 보장한다는 의미가 아닌 이상 현재로서는 북한 핵 능력 강화 대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상황으로 굳어지기 전에 미국과 북한을 상대로 대담한 외교전략을 짜야한다. 그리고 이는 국제관계에서 힘(power)을 바탕으로 하는 현실주의와 국가의 의도(intention)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시각을 절묘하게 배합하는 전략서가 되어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