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 꼬두물정류장(이하 꼬두물). 이름이 독특하고 예쁘네요. 생존학생들의 쉼터로 시작했지만 요즘은 동네 어른들도 자주 오신다고요.
노승연 : 화정천의 우리말 이름인 '꽃우물(華井)'을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한 게 '꼬두물'이에요. 바깥을 내다보면 화정천이 예쁘게 흐르고 있거든요. 그 옆에는 정부합동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가 있고요.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공간이에요.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은 다른 기관들도 헌신적으로 해오고 있잖아요. 저희는 참사를 함께 겪었던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분들의 회복에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청소년들은 스무 명 내외로 들락날락하고 마을 어른들은 사오십 명 정도, 대부분 부모님 연배쯤 되는 분이라서 청소년들하고 잘 어울리셔요. 어른들은 누가 세월호에 탔던 학생인지도 잘 모르세요. 편견 없이 대해주시니, 생존학생들도 편하게 지낼 수 있고요. 목공이나 천연비누 만들기 같은 작업장 학교도 운영하고, 밥도 같이 해먹어요. 특별한 프로그램 없어도 동네 청소년들이 학교 끝나고 와서 밥 먹고 공부하고 놀고 한숨 자기도 하는 그런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어요.
민들레 : 말하자면 마을에 하나씩 있는 느티나무 아래 같은 곳이네요.
노승연 : 마을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왜곡된 정보와 자극적인 기사를 보고 반감을 갖는 걸 보면서 이들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예전처럼 이웃으로 지낼 수 있게요. 그래서 '416공방'에 계시는 유가족들을 강사로 초청해서 천연 샴푸, 비누 만들기 수업을 열고 있는데 반응이 되게 좋아요. 선입견 없이 이웃으로 만날 수 있어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민들레 : 대학생 때 '소금버스'를 만들었다고요. 학생 신분으로 제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건 자원봉사 정도일 텐데, 협동조합 형태로 단체를 직접 만든 이유가 있나요?
노승연 : 저는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는데, 예술이 가진 사회적 기능, 치유의 역할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그런 역할을 사회에서 더 확장해보고 싶었어요. 삼선배움과 나눔재단의 지원과 여러 단체 후원으로 예산을 마련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협동조합을 선택하게 됐어요. 소금버스는 '사회적 재난 지역의 공동체 회복'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어요. 처음 계획은 버스 형태로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가려고 했는데, 언제든 드나들 수 있는 쉼터의 기능이 필요해지면서 고정된 거점 공간을 마련하게 됐죠.
민들레 : 요즘 대학생들은 스펙 쌓기와 취업 준비로 많이 바쁘잖아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활동하는 이유는 뭐죠?
노승연 : 일단, 여기서 지내는 게 저는 너무 재밌어요. 제가 입버릇처럼 "마을살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데요. 자기가 가진 걸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 다양한 세대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게 큰 매력인 것 같아요. 다양한 교육을 접하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들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요. 이를테면 비폭력 대화나 서클 대화 모임, 텃밭을 통한 먹을거리 자급자족 같은 것이요. 사실 취업 준비를 하는 또래들에 비해 이런 일을 하는 제 미래가 불투명할 수도 있지만,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경쟁 문화에서 벗어난 것이 큰 행복이기도 해요.
민들레 : 공간 소개도 더 자세히 해주시면 좋겠어요.
노승연 : 우선 '소금힐링방'이 있어요. 소금이 불면증, 스트레스 완화에 효과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생존학생들이 여기서 잠도 자고 편히 쉬면 좋겠다 싶어서 바닥부터 천장, 벽까지 전부 소금으로 만든 곳이에요. 지금은 마을 사람들도 많이 이용해요. 애들이 비밀 얘기한다고 들어가 있기도 하고요. 소금벽이 엄청 두껍고, 문을 닫으면 어둑어둑하거든요. 빛과 소금이 어우러져 테라피 효과가 있는 방이에요.
그리고 공간 가운데에 주방이 있어서 누구나 와서 요리를 할 수 있는 게 특징이에요. 최근에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싱크대를 두 개로 늘렸어요. 그런 아이디어도 주민들이 내주셨어요. 자주 오시는 어머니들이 "역시 아가씨가 살림을 안 해봐서 모르네" 하면서 예쁘긴 한데 이렇게 작으면 어디다 쓰냐고.(웃음) 주방 한쪽엔 목공 작업도 할 수 있고 둘러앉아서 얘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요. 옥상에는 텃밭을 꾸며서 마늘이랑 양파랑 고사리, 대파 같은 걸 키우고 있어요.
민들레 : 공간 한가운데에 주방시설을 둔 건, 의도적인 공간 구성인가요?
노승연 : 네. 저는 같이 밥을 먹는 게 '일상성 회복'의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사적인 시간을 공유하며 편안한 대화의 장이 될 수도 있고요. 처음에 주방을 공간 한가운데 두느냐, 한쪽으로 붙여서 실용적으로 사용하느냐를 두고 논쟁하기도 했어요. 근데 제가 꼭 가운데 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렇게 하길 잘했어요. 어머니들도 집에선 정말 설거지하기 싫은데, 여기는 예쁜 화정천도 보이고 설거지할 맛이 난다면서 좋아하시더라고요. 두 명 있을 때나 열댓 명 있을 때나 늘 밥을 해 먹어요. 비 오는 날이면 어머니들이 집에서 파전 반죽도 해오시고요. 그럼 저는 얼른 슈퍼에 뛰어가서 막걸리를 사와요.(웃음)
꼬두물에서 생존학생 가족들과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비폭력대화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는데, 한 생존학생 어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세월호 참사로 유가족이 되고 나서는 만나기 어려워진 거예요. 자기 자식만 살아 돌아왔으니까. 언니를 위로하고 싶은데,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래요. 그러다가 꼬두물에서 비폭력대화를 배우고 나서 '같이 밥 먹고 싶다'는 말을 먼저 건넸대요. 어느 날 같이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는데, 그 언니가 살아 돌아온 아들 얘기를 먼저 꺼내더라는 거예요. 대학 들어갔단 소식을 들었다며 "너무 잘됐다. 학교 잘 다녀야 할 텐데" 하더래요. 그런 얘기를 먼저 건넬 만큼 마음이 열린 거죠. 마주 앉아 밥 먹고 얘기 나누는 일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 무척 중요하구나 느꼈죠.
민들레 : 큰 재난을 겪고 나서 유가족들과 마을 사람들 간의 갈등도 많았다던데, 꼬두물을 열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노승연 : 처음엔 '또 세월호 공간이냐'고 뭐라 하는 분들도 많으셨어요. 단원구 고잔동에 워낙 그런 공간들이 밀집해 있다 보니까 곱지 않은 눈초리를 받았죠. 단원고 안에 '기억교실'을 둘 것인지 없앨 것인지, 추모공원을 화랑유원지에 지을지 말지, 추모공원 안에 아이들 유골함을 놓을지 말지 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도 갈등이 참 많았어요. 어떻게 보면 주민들도 세월호 참사로 상처 받은 사람들인데, 그분들에 대한 위로나 심리 치유 프로그램 같은 게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웠죠.
민들레 : 마을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인터뷰 활동을 했다고 들었어요. 이번에 <우리가 모르고 있던 세월>이라는 자료집도 나왔던데요.
노승연 : 안산 주민들을 대상으로 구술 생애 기록 작업을 했던 걸 자료집으로 묶었어요. 우연히 마을 어르신이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너무 정치적으로 나가는 게 아니냐 하시는 거예요. 말문이 턱 막혔지만, 제가 그분들을 설득할 자신은 없었어요. 그래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겠다 싶었죠.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경험들을 하셨기에 세월호 유가족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계실까 궁금했어요.
근데 처음에 그렇게 말씀하시던 분들은 인터뷰를 못했어요. 하려다가 계속 계획이 틀어졌는데, 어떤 분은 인터뷰하고 나서 남편에게 혼났다며 그만하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개인의 얘기를 왜 자꾸 알려고 하냐는 분들도 많았죠. 자신의 삶이 너무 평범해서 기록할 가치가 있느냐고.
어떻게 보면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인터뷰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도 있어요. 옛날에는 '막걸리 보안법'이라고 해서 막걸리 마시다가 대통령 욕만 해도 잡아가던 시절이 있었대요. 그런 시절을 겪었던 분들이란 걸 알게 되니까 그런 반응들이 이해가 되기도 했어요. 세월호 얘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부 이야기를 하게 되니까 아마 부담이 되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국가에 저항해본 적도 없으니까, 그런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이 프로젝트가 평범하게 살던 개인이 자신의 삶에 긍정성을 부여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줬어요.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2011년 동일본에 대지진이 났을 때 "이 지진은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명이 죽은 사건이 2만 번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대요. 세월호 참사도 304명이 목숨을 잃은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사건이 304번 일어난 것으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숫자는 각자의 삶이 가진 무게와 사연들을 담아내지 못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인터뷰로 한 사람의 생애를 들여다보면서 '304'라는 숫자가 이야기하지 못하는 한계들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구술사 작업을 계속 하며 안산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풀어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민들레 : 마을 청소년들이 직접 인터뷰어로 나선 까닭도 궁금하네요. 프로젝트를 같이 했던 청소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노승연 : 마을의 여러 세대들이 만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서 제가 청소년들에게 먼저 제안했어요. 청소년 여섯 명과 6개월 정도 같이 준비했는데, 구술생애사에 대해서 공부하고 연습 삼아 부모님을 미리 인터뷰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첫 시간에 "구술생애사가 뭘까?" 하니까 진지하게 "구슬을 꿰면서 하는 건가요?" 묻던 친구도 있었어요.(웃음)
어떤 친구는 자기 엄마를 인터뷰하면서, 엄마가 왜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했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했어요. 엄마에겐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도 못 가고 돈을 벌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던 거예요. 인터뷰를 통해 그 삶을 이해하게 된 거죠. 그 얘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와, 반은 성공했다" 했어요. 나중에 그 친구들이 이 작업에 대해 각자 나름의 의미를 둘 때는 되게 뿌듯했죠. 안산에서 직장생활 하면서 환경단체 활동도 같이 하던 주민을 인터뷰한 친구는 "이름나지 않았지만 진실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다는 걸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청소년들이 평범한 개인의 삶을 깊이 만났다는 것이 참 감동이었어요.
민들레 : 꼬두물은 소금버스가 정차한 첫 번째 정류장이죠. 두 번째 정류장을 만들 계획도 있으신가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노승연 : 무력감, 좌절감을 경험한 세월호 세대들이 이곳에서 조금씩 변하는 모습들을 보면 참 놀라워요. 청소년들이 이 사회를 안전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게 지지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꼬두물에 오는 학생들 중에 운영 스태프를 뽑아서 평일은 학생들끼리 주체적으로 운영하게 돕고, 같이 회의하고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려고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3월부터는 꼬두물에서 같이 일하는 생존학생이 마을에서 청소년 중창단을 만들어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연습하고 있고요.
우리 목표는 이 공간을 잘 꾸려서 지역 주민들에게 돌려드리는 거예요. 실제로 마을에 살고 있는 구성원들이 운영하는 게 취지에 더 맞는 것 같아서요. 큰 아픔을 겪은 이 마을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당사자들이 고민하고 결정하며, 이 공간에서 일상을 회복하고 아픔을 같이 품어가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소금버스가 두 번째 정류장을 또 만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제일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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