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권은 공약대로 '적폐'의 청산에 방점을 두며 여러 방면에서 개혁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그간 많은 비판을 받아왔던 검찰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을 계획중이며, 많은 이들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분명히 보다 나은 대한민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좋은 효과를 낳고,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원하며, 정부 역시 강한 의지로 추진했던 개혁이 과거의 역사 속에서 성공한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개혁이 번번이 실패로 끝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극소수의 '기득권'이 자신들의 '이미 얻은 권력'이 침해당하는 것을 극도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도 여러 개혁의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특히 북송 대의 대표적인 진보주의자 왕안석이 실시했던 '변법(變法)'이 대표적인 사례다.
왕안석의 변법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북송(北宋, 960~1127)의 제6대 황제인 신종(神宗, 1048~1085)의 지지를 기반으로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했던 인물이다. 왕안석이 추구한 변법의 근본적인 목표는 '부국강병'이었다.
당시 북송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북방유목민족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遼, 916~1125)에게 억눌려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요에 대한 일종의 '노예계약서'인 '전연의 맹(澶淵之盟, 1004)'을 체결한 이후, 북송은 해마다 막대한 세폐를 요에 바쳐야만 했다. 왕안석은 북송의 요에 대한 굴욕 외교와 재정난을 타파하기 위해 변법을 실시하였다. 특히 왕안석은 세 가지 쓸모없는 것, 즉 '삼용(三冗)'에 주목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개혁을 실시해 나갔다.
왕안석이 개혁하고자 했던 세 가지 폐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지나치게 방대했던 관료기구로 쓸모없는 관리가 넘쳐났던 용원(冗員), 둘째는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오합지졸 군대의 용병(冗兵), 마지막은 쓸데없는 재정 낭비의 용비(冗費)였다. 이러한 적폐의 개혁을 위해 왕안석은 각각 부국(富國)·강병(强兵)·취사(取士)에 관한 각종 신법(新法)들을 제정해 나갔다.
대표적인 개혁 법안 들을 소개하자면, 먼저 부국책으로는 '시역법(市易法)'을 들 수 있다. 시역법이란 일종의 중소상인 보호법이다. 동경(東京, 현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에 시역무(市易務)를 설치하고, 정부가 출자하여 중소상인의 남아도는 물건을 담보로 저리 대출을 해주거나, 이를 사들였다가 시장에서 부족할 때 다시 내다 팔았다. 이는 당시 폭리를 취하던 거상을 억제하고, 그들의 시장 장악을 방지할 수 있었다. 또한 물가의 안정과 함께 소상공인의 보호, 정부의 세수 증대와 같은 효과를 노릴 수도 있었다.
둘째, 강병책의 대표적인 신법으로는 '보갑법(保甲法)'이 있다. 보갑법은 10집을 1개의 '보(保)'로 규정하고, 성인 남자 두 명 이상인 집에서 한 명씩을 차출하여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향촌의 치안 유지와 함께 군대의 질을 높이고 정부의 군비 지출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셋째, 교육정책인 취사책의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당시의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정돈했던 삼사법(三舍法)이 있다. 태학을 상·중·하의 3단계로 나누고, 무학(武學)·의학(醫學)·율학(律學) 등의 전문 과정도 설립하여 전문인력 양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기존의 과거(科擧)와 음서(蔭敍)를 통해서만 관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에서 벗어나 태학의 성적 우수자에게도 관리가 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평민들도 시험을 통과하면 태학에 입학이 가능했기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직에 나아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전문교육을 통해 다방면의 전문가 양성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변법의 실패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변법은 신종의 강력한 지지와 왕안석의 뜨거운 열정, 그리고 백성들의 호응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변법은 머지않아 거대한 장애물과 맞닥뜨리게 된다. 변법의 근본적인 목적은 부국강병과 함께 일종의 '부의 재분배'로써, 변법이 성공하려면 기득권의 이익을 재조정하여 백성과 조정에 나눠줘야만 했다.
그러나 백성의 고혈을 빨아 호의호식하며 사치와 향락에 찌들었던 기득권들은 이미 넘치고도 남을 정도의 재산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변법에 의해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당하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거상들, 그리고 그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던 관료들이 본격적으로 왕안석과 변법을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변법에 대한 기득권의 공격은 먼저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던 여회(呂誨, 1014~1071)의 왕안석 변법에 대한 '10대 과실' 상소로 포문을 연다. 이 뒤를 이어 변법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비판이 아닌, 왕안석을 비롯한 신법당(新法黨)에 대한 인신공격이 뒤를 잇기 시작하는 등 반대를 위한 반대론이 꼬리를 물었다. 오랜 가뭄과 그로 인한 흉흉한 민심 등이 왕안석 일당이 추진하는 변법 때문이라는 억지 주장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기득권의 꼬드김에 넘어간 신종의 할머니 조태황태후(曺太皇太后, 1016~1079)와 어머니 고태후(高太后, 1032~1093)가 왕안석이 천하를 어지럽힌다고 울면서 호소하기까지 하자 신종은 결국 왕안석의 재상직을 파하였고, 이로 인해 변법은 크게 주춤하게 되었다.
이듬해 왕안석은 다시금 재상에 오르지만, 그가 없는 동안 신법당의 세력은 크게 약해졌고, 신법당 내부도 이미 사분오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왕안석은 기득권의 강력한 반발로 개혁의 의지를 잃기 시작하였고, 사랑하는 큰아들이 죽자 그는 스스로 재상직에서 물러났다. 여기에 왕안석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신종마저도 1085년에 죽자, 변법은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된다.
신종의 어린 아들 철종(哲宗, 1077~1100)이 등극하자, 그간 변법을 강력하게 반대해왔던 고태황태후(高太皇太后)가 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며, 신법당에 반대하는 수구파의 대표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을 재상으로 임명해 변법을 모두 폐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안석은 결국 1086년에 실의 속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고, 부국강병을 위해 야심차게 실시했던 그의 변법은 결국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공생하는 사회, 기득권의 내려놓기
왕안석의 변법이 모두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왕안석이 추진했던 변법들은 백성과 조정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는 훌륭한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왕안석의 변법은 아쉽게도 실패로 끝을 맺는다. 그 주 원인은 '이미 권력을 가진' 기득권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시역법만 하더라도 현대판 '대기업'의 횡포를 막고, '소상공인'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에서 적극 나서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손실을 입은 '대기업'이 자신들의 폭리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인'들과 결탁하고 왕안석을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개혁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실패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왕안석이 죽은 후 40여 년이 지난 1127년, 북송은 북방에서 새롭게 흥기한 여진족의 금(金, 1115~1234)에 의해 멸망당했다.
'왕안석의 변법'의 전개과정과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개혁은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 소위 '상위 1%'라는 사회의 극소수 기득권의 거센 반발로 성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기득권들은 막대한 재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거나 그 재부로 정치인들과 '유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이득을 극구 주장했던 기득권들은 결국 '북송의 멸망'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전형적인 '탐소실대(貪小失大)'이다. 이미 차고 넘칠 만큼 가진 자들이 조금만 내려놓는다면 부국강병과 조화롭고 공평한 사회 구현은 보다 쉬울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도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여러 변법을 추진하고 있으며, 그 과정 중에 분명히 기득권의 이익을 침해하는 법안이 제정될 것이다. 이때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국민의 호응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득권들 스스로 약자와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내려놓는 덕목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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