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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엄마는 내 편이어야 한다?

[작은책] 5월, 다시 가족을 고민하다

친정엄마 앞에서 시아버님과 전화할 일이 있었다. 내 통화를 지켜보던 친정엄마는 "우리 며느리도 나랑 저리 살갑게 전화하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의 그 말에 무척 화가 났다. 엄마에게 온갖 핀잔을 쏟아 냈다. 엄마가 먼저 올케에게 살갑게 해 본 적이나 있느냐, 우리 집안 식구들 평생 죄다 무뚝뚝하게 살아왔으면서 왜 이제야 누군가 살갑게 해 주길 바라느냐, 엄마 아들하고 전화해라, 엄마가 올케랑 길게 전화한다고 대화가 재미나 있겠느냐, 올케 삶에 대해 엄마가 얼마나 깊이 아냐, 진심으로 알려고는 했느냐, 그러니 대화가 재미있을 수 있겠나, 재미도 없는데 누가 선뜻 연락하려 하겠나, 그게 의무지 안부냐, 엄마마저 그런 생각 좀 하지 말아라…. 그날 나는 과했다. 나는 올케를 위하는 마음으로 엄마에게 화를 낸 것도 전혀 아니었다. 그저 10년 넘게 쌓아온 내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풀었다.

친정엄마는 내 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름 시댁과의 관계를 별 탈 없이 유지하고자 자아의 일부를 내려놓고 적절한 가면을 쓴 채 '하하 호호' 하는 그 노고를, 가부장적 제도 안에서 수고로운 내 모습을, 적어도 친정엄마라면 당연히 알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는 도리어 자기 며느리도 그런 노역을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란다는 욕망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놓았다. 나는 엄마에게 칼 같은 말들을 퍼부었고 엄마는 야멸찬 딸을 한탄하셨다. 우리는 한없이 서로의 상처를 찔렀다. 우리는 우리밖에 공격할 줄 몰랐다.

▲ 영화 <친정엄마>(유성엽 감독, 2010) 스틸컷.

결혼 이후 늘 시댁과의 안부 전화로 스트레스였다. 시댁에서는 꼬박꼬박 자주 안부 전화를 하라고 하셨다. 멀어서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가장 쉬운 효도라고 했다. 그것만 하면 된다고 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 같다. 그러나 시아버지와의 전화는 유독 어려웠다. 나에게는 주제 선정의 우선권이 없었고, 반박권이 없으며, 근본적으로 통화거부권도 없다. 대단히 억압적인 시부모를 만나서가 아니다. 모든 시부모와 며느리와의 안부 전화란 기본적으로 이런 형식이다.

시부모와의 안부 전화는 커뮤니케이션 행위가 아니라, 가부장제 문화의 위계가 실현되는 그 자체이다. 평등한 관계 맺기나 대화일 수 없다. 시부모님들이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안부 전화를 요구하는 이유, 친정엄마가 내 남동생이 아닌 올케에게 전화를 받고 싶어 하는 이유다. 확실한 위계, 더 큰 위계의 차이 속에서 그분들은 좋은 사람으로 있으면서도 힘을 실현하고 그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 경험은 당연히 달콤하다. 강제는 그들이 하는 말의 내용에 있기보다 그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위치 그 자체에서 나오며, 안부 전화를 통해 그 위치는 재확인된다. 얼마나 며느리의 안부 전화를 받고 싶겠나. 나 같아도 받고 싶다. 본인이 하고 싶은 어떤 말이든 '조언'이 되고 대답은 '네'라는 긍정형만이 돌아오는 판타지가 실현될 텐데….

그럼에도 인간과 인간의 마주침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그 어려운 안부 전화 속에서도 우리는 인간적 관계를 변화시켜 나간다. 각고의 노력이 요구된다. 나는 오랜 세월 수많은 안부 전화 사이사이 아버님을 당황시키는 저항의 씨앗들을 뿌려 놓았고 12년 차가 되니, 그 씨앗들이 제법 키가 자라서 억압적인 대화 속에서도 나를 지킬 공간을 꽤나 마련했다. 덕분에 점점 더 그럴듯한 대화들이 가능했을 뿐이다. 친정엄마 눈에 나와 시아버지의 전화 통화가 좋은 순간으로 보일 법도 했다. 억울한 점은 취약한 사람이 늘 더 노력해 왔다는 사실일 뿐이다.

그날 가족을 다시 고민했다. 나는 새로 맺어진 관계라는 이유로 그래도 시댁 식구들에게는 노력을 했다. 하물며 가부장적인 행태들을 일정 부분 수긍하면서까지 나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과 인간적 관계를 맺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런데 친정엄마에게는 그리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나에게 늘 그냥 주어져 있는 '무엇'이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친정엄마의 도움을 요구했다. 가족 중에서 엄마에게 가장 쉽게 화를 냈다. 엄마에게만 내 주장을 가장 거침없이 말했다. 그때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흔히들 결혼하고 애 낳을수록 자매가 좋다 하던데 자매가 있는 그 친구는 어떠한지 물었다. 친구 왈, "제일 착취하기 쉬운 상대니까".

우리는 가족끼리는 아무도 착취하지 않는 것처럼 상처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공동체, 애정의 공동체라는 허구. 하지만 마음 깊숙이 우리는 가족 내 누군가는 가장 착취당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가장 만만한 대상이 되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모두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당한 경험을 다양하게 풀어놓고는 하니까.

하지만 우리가 가족이야말로 갈등의 최전선이라고 말할 때마저도 내가 착취당할 때를 말하지, 내가 가족 내 누구를 착취하고 있는지는 자꾸 잊으려고 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편하게 이루어졌기에. 슬픈 일은 가족 내에서 이루어지는 억압의 형태들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정확하게 가족 내 취약한 위치를 따라 흘러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니 약자는 늘 층층이, 겹겹이 약자가 된다.

나는 시아버지에게 '오늘의 전화는 재미도 없고, 삶에 득도 되지 않아요'라고 말할 줄 모르면서, 괜스레 나의 통화를 부러운 듯 바라보던 엄마에게는 쉬이 격한 화를 낸다. 나는 엄마 앞에서는 참지 않는다. 엄마는 아들이나 바로 옆의 딸이 아닌 갑작스레 올케를 소환해 내고, 나는 마치 올케를 위하는 척했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거짓이다. 나는 그저 나의 울분을 위로했을 뿐.

'가정의 달'이라는 5월이 올 때면 기혼여성, 애 엄마, 맏며느리의 위치에 있는 나로서는 여러 고통스러운 고민에 직면한다. 마치 그간의 억압적인 행위들을 강화해서 해야만 하는 시기처럼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좀 편파적으로 5월을 보낼 것이다. 명절이 되면 자연스레 소파에 앉던 사람보다는 단 한 번도 소파에 앉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안부를 먼저 물어보려 한다. 가족 내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사실은 가장 쉽게 착취했던 구성원들이 있었음을 다시 생각하려 한다. 편하다는 사실, 친하다는 느낌, 익숙하다는 현실만으로 상대를 만만하게 대하는 곳이 가족 관계이다. 나의 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 안착하는지를 성찰적으로 살피지 않는다면 가족은 가장 부당한 장소가 된다. 그것도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 그러니 가정의 달이라며 곳곳에서 전파할 기만적 색채를 벗기는 5월이 되면 좋겠다. 그것이 가장 가족에게 솔직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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