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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슬픈 냉기, 그리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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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슬픈 냉기, 그리고 바람'

김민웅의 세상읽기 <161>

지하도를 지나면서 라면 상자로 추위를 막을 준비를 하는 이들의 모습이 눈시울에 아프게 담겨 왔습니다. 한 사람이 누워 지낼만한 자리가 머리 속의 허름한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의 세계에서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해 가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무력하게 잠겨드는 삶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새삼 일깨우는 장면이었습니다.

사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도시 풍경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이는 그 익숙함이 결코 편안함으로 다가오지 않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집 없는 이들의 거리 노숙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 하나의 깨우침을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결국 자기 한 몸 누일 공간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하는 결론 비슷한 생각 말입니다.

물론 '인생이 도시의 한 모퉁이에서 때로 고달프게 자도 괜찮다'라든가 '한 몸 누일 데가 있으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 절박한 처지에 대한, 냉정하고 무심한 평론 따위를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빈곤의 궁지에서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숙명의 사회학'을 강론하려는 것 또한 아닙니다.

겨울바람이 뼈 속으로 스며들 야밤 노숙의 서러움을 오늘의 도시는 돌아보아 주지 않습니다. 다들 살아가는 일이 고되고 이웃을 돌아볼 겨를이란 도대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생기기가 참으로 어려워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화려해지고 있는 도시의 외관과 저 엄청난 낭비의 기념비 같은 거대한 조명들은 우리의 이중적 처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기도 합니다.

라면 상자가 난데없이 기하책의 정육면체 전개도처럼 펼쳐지는 자리에 하루의 인생을 담아 눕는 이들의 삶에서 우리는 자신의 평범한 소유조차도 졸지에 사치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돌아가 편안히 누울 곳이 있다는 사실 또한 엄청나게 대단한 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타자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증언해주는 재료가 되고 말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부당한 일이지요. 이웃의 비극이 나의 상대적 행운에 대한 감사를 일으키는 사건이 된다면 그건 우리를 더욱 이기적으로 만들어가고 말 겁니다. 도시의 품성을 더욱 가혹한 것으로 변모시키는 터전이 그만큼 더 늘어나는 셈입니다. 인생의 제비뽑기에서 잘못 뽑은 이들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결론 내리게 되는 한 우리는 그래서 자기를 지켜내는 더 많은 소유와 더 많은 권한을 향한 치열한 도전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결국 남는 것은 자기 하나 누일 공간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끝자리에 서보면, 기를 쓰고 쌓아올릴 탐욕적인 소유의 부질없음과 마침내 자신을 조잡한 인격으로 전락시키고 말 권력의 치사한 축적은 모두 자신을 결코 아름답고 위엄 있게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지는 않을까 합니다.

'날로 소박해지는 소유와 날로 깊어가는 성찰'이 사라진 인생에서 남는 것은 본질적인 황폐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소박함과 그 성찰의 깊이가 소중한 것으로 믿어지는 곳에서는 거리의 노숙은 더 이상 방치되지 않을 겁니다. 인생의 슬픔과 고단함, 그리고 희망 등을 서로 돌아보며 다독거리는 따스함을 나눌 줄 아는 우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겨울은 더욱 정겨워지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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