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임 대통령의 '탄핵 사태'로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각당의 후보를 정하고 본선 레이스까지 치러야 하는 '초스피드 대선전'인 만큼 열기가 뜨겁다. 더구나 보수 정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찢어지기도 했다.
사상 첫 '장미대선'이 진행되면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과거 '마이너 이슈'로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여성과 소수자 문제가 큰 쟁점이 됐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동성애 발언',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단설유치원 발언',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설거지 망언'과 '돼지흥분제 사건'. 과거에는 논란이 됐다가 가라앉았을 이슈들이 실제 후보 선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달라진 유권자들과 시대 정신이 드러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여성 조합원들과 지난달 27일 '선거 잇(it) 수다'를 진행했다. 무역회사 '미생' 조진웅(가명, 20대) 씨와 IT업계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강동원(가명, 20대) 씨, 전문직 종사자 송혜교(가명, 30대) 씨가 바라보는 5.9 대선과 그 이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개그 쇼' 수준의 대선후보 TV토론…"제가 갑철수 입니까"에 웃음만
프레시안 : 수다 시점(4월 27일)을 기준으로 약 열흘 후면, 19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조기 대선인 만큼 대선 후보들의 유세 기간도 짧다. 최근 TV 토론이 화제인데, 어떻게 봤는지. 또 마음에 둔 후보는 있는지 궁금하다.
송혜교 : 솔직한 마음으로, 대선 후보 TV 토론을 보고 있으면 말싸움에 짜증이 난다. 마음에 둔 후보가 실수해도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다. 선거는 '최악'이 아닌, '차악'을 뽑는 것이라고 하지 않나. 주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렇다고 주위 사람들이 TV 뉴스도 안 보는 정도는 아니지만, 유승민은 모를 수도 있다. 홍준표는 워낙 막말을 많이 해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주로 문재인과 안철수를 놓고 누가 더 나을까를 저울질한다. 그러다가 기권을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그럼, 옳은 말하는 심상정이라도 뽑아"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라. 인지도가 낮아서인지, 여성 후보이기 때문인지 반응이 시큰둥했다. 박근혜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여성 정치인에 대한 편견이 생겨 짜증이 난다.
강동원 : 회사에서 대선 관련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하루는 회사 근처에 문재인 유세 차량이 왔는데, 다들 '시끄럽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대선 후보 TV 토론을 보면서 '아, 이런 게 대선이지' 하는 생각에 짜릿하다. 특히 '동성애' 발언 논란으로 문재인과 심상정 간 구분이 확실해졌다. 두 후보 사이에서 갈등하는 친구들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이번 대선이 세 번째인데, '소외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처음이다. 정의당 당원은 아니지만, 심상정 캠프에서 운영하는 '심쿵'이라는 카카오톡 단체방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 내 마음에 드는 후보가 나온 것 같다. 심상정이라는 후보를 통해 나오는 얘기로 우리 사회가 그래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정치에 희망이 보인다.
조진웅 :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고들 하지만, 정책적으로 보면 심상정 쪽이다. 친구들 중 일부가 야권 후보의 표가 나뉠까 봐 문재인과 심상정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선거에서 후보별로 표가 나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이를 걱정하며 고민하고 있다. 선거는, 가운데 쌓아놓은 모래를 누가 더 많이 가져가나 같은 놀이가 아닌데….
대선 후보들의 TV 토론을 보면, 정책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인격 모독을 하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겨우내 촛불이 이룬 게 무엇인가 하는 회의감이 든다. 유권자로 처음 치른 대선의 결과가 박근혜였다. 그리고 '대통령 파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박근혜는 분명 대통령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탄핵이 답일까?'를 고민했다. 1000만 명이 든 촛불이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의문이다.
강동원 : 3차 TV 토론(4월 23일)에서 안철수가 "제가 갑철수입니까", "MB 아바타인가"라는 말은 너무 황당해 웃음만 나왔다.
조진웅 : JTBC까지 4차까지 토론했는데도 대선 후보의 토론은 개그 쇼 수준이다.
'불효' 조장하는 홍준표? 그의 지지율이 오르는 이유는…
프레시안 : 이번 대선은 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후보 지지자들의 반응이 더 격앙된 것 같다. SNS를 보면, 정치적 지향에 따라 굉장히 민감하다.
조진웅 : 홍준표 측의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 곧 효도'라는 식의 홍보물, 이해가 안 된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다른 후보를 선택하면 안 되는 건가? 정치적 지향이 다른 게 불효인가? 감정 소모를 조장하고 있다. 직장에서도 서열이 높은 사람과 지지하는 후보가 다르면, 입도 뻥긋 못한다. SNS에 정치적 지향을 드러내면 댓글이 주렁주렁 달린다. 대선 후보에 대한 비판이 자신에 대한 비판인양, 후보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것 같다.
강동원 : 홍준표 지지율이 오르는 데는 자신의 지지층을 잘 공략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선 후보나 정치인 중 상당수가 유권자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박근혜나 홍준표는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면, 막말처럼 상대방에게 내지르는 식으로 대응한다.
정치와 삶을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대선 후보들의 공약이나 정부의 정책은 복잡하다. 먹고사는 일도 힘든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박근혜와 홍준표는 그래서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접근한다. 최고의 마케팅 기법이다.
조진웅 : '박근혜 신화' 역시 알고 보면, 단순하다. 그의 아버지 박정희가 보릿고개를 넘게 해줬다는 것, 즉 먹고살게 해줬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효과적인가. 그러나 논리를 단순화하다 보면, 사실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돼지흥분제', '동성애' 발언 논란…선거 전면에 등장한 페미니즘 이슈
프레시안 : 이번 대선의 또 다른 특징은 '여성'과 '성소수자' 등 약자 이슈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홍준표는 설거지 발언과 돼지흥분제 사건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고, 문재인은 동성애 반대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다. 안철수의 단설 유치원 설립 자제 해프닝도 우리 사회 가장 민감한 육아 문제를 건드렸다.
강동원 : 여성과 약자에 대한 홍준표의 인식, 결코 대선 후보 한 사람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송혜교 : 홍준표는 한마디로 '똘아이'다. 비상식적인 사람이다. 관련 기사에 '당시 유행이었다'라는 댓글이 있었는데, 홍준표뿐 아니라 그의 지지자 상당수도 문제의식이 전혀 없어 보인다.
프레시안 : 기자 입장에선 좀 충격적인 것은 그간 정치인 홍준표가 그렇게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는 점이다. 강간 모의는 범죄 행위다. 그런데 정치인 홍준표의 이미지가 그렇게 막 나가는 수준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그동안 영악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유리한 말과 행동을 해왔고, 그만큼의 검증이 없었던 셈이다. 이번에 완전 바닥이 드러났는데, 사실 그가 속한 구 새누리당, 혹은 자유한국당의 인식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동원 : 자서전을 쓴 사람이나 주변 사람 모두 같은 인식이라는 말 아닌가. TV 토론회에서 사과를 했지만, 다른 후보들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했다. 진실성이 없어 보였다.
조진웅 : '여자니까' 하는 식으로, 어떤 일을 성별에 근거해 구별하기란 쉽다. 페미니즘은 그래서 단순히 여성 권익 신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평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남녀의 성 차별에 권위주의가 녹아 있다. 로스쿨에서는 판검사와 변호사가 성적순으로 나뉘는데, 판검사가 되는 남성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학업 수준과 능력이 기준인데도 남성들은 '여자가 드세서…'라고 말한다. 지난해 논란이 된 '가임기 여성지도'도 사회에 팽배한 남성 권위주의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 때도 '치마 입은 사람이 문제'라는 말이 있었다.
강동원 : 여성이 남성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논리인데,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참, 슬픈 현실이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 건데….
내 일과 내 삶을 고민하며 다양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일자리도 그렇고 보육과 출산 정책 등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으로 단순하다. 육아와 일을 같이 하려면 슈퍼우먼이 되어야 한다. 아니면, 출산을 포기하거나 커리어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가 '3포' '4포' 등 포기자와 자기혐오를 양산하고 있다.
조진웅 : 대선 후보의 공약을 살펴봐도 '수박 겉 핥기'다. 1000만 촛불이 87년 체제 이후 가장 큰 변혁을 요구하고 있지만, '사회를 어떻게 변혁시킬까'와 같은 논의는 이미 사라진 것 같다.
차기 정부에 대한 기대? 박근혜 '똥'부터 치워 달라
프레시안 :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촛불이 만든 조기 대선이라고 하지만, '이러려고 촛불 들었나'라는 자괴감도 나온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 차기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조진웅 : 취업 4개월째인 사회초년생이다. 그런데 여성으로 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날 때 '여성'을 선택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견뎌야 할지. 개인적인 문제가 가장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배제되지 않는 그런 정치를 해주길 바란다. 정치권의 패러다임이 확장됐으면 좋겠다.
강동원 : 문재인이 2012년 대선 당시 특전사 이미지를 부각했다. 여성과 남성으로 단순화한 홍보 전략이었다. 그래서 항간의 말처럼 '어대문'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여성 정책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는다.
'여혐' 논쟁에 있어 가장 나쁜 놈은 누구일까. 남성도 여성도 아닌, 국가(정부)다. 국가가 선택을 강요하고 노동을 착취하고도 국민(시민)에게 보상하지 않는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논쟁도 방관한 채 뒷짐만 지고 있다. 사람들 역시 국가의 탓을 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전투가 벌어진다는 것은 국가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조진웅 : 국가란 표현은 추상적이다. 기득권이라고 생각한다. 기득권층은 현 제체가 유지되길 바라는 마음에 분열과 갈등을 즐긴다. 그럼에도 기득권이 직접 분열과 갈등의 한복판에 들어가야 끝나는 일인데, 그렇게 용기 있는 후보가 있을까? 더불어민주당이나 구 새누리당(자유한국당, 바른정당) 모두 한통속이라고 생각한다.
송혜교 : 사회적 이슈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사 제목만 보는 수준 아닐까? 보통은 그럴 것이다. 최근 들어 사람들이 더 극단적이 된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찬반이 극렬한 문제에 더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다음 정권에 대한 기대? 기대보다는 누가 되더라도 박근혜 정권의 '똥(적폐)'를 바로잡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누구든 나쁜 짓을 덜 할만한 사람이 차기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조진웅 :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 문제에 관심 없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기득권이 편리한 세상이 된다고 생각한다. 답은 결국 투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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