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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의 ’이중 잣대’와 ‘황당한’ 변호사 손보기

[홍춘봉의 광부아리랑] ㊲27년간 ‘광부간첩’ 올가미 쓴 이병규씨

27년간 간첩혐의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이병규씨의 부인 임순성씨도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사례를 적시하고 있다.

<원고 임순성에 대한 피해 내역.
남편인 원고 이병규가 간첩의 누명을 쓰고 수감되자 가족들은 생계수단을 상실했다. 원고 임순성은 세 자녀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자녀들의 삶도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원고 임순성은 남편이 일하고 있던 탄광촌에서 조그마한 슈퍼를 운영하였기에 경제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아 원고의 친정 동생들도 함께 거두고 살았다.

▲이병규씨의 부인 임순성씨는 조작간첩의 부인이라는 올가미에 걸려 상상을 초월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프레시안(홍춘봉)

그러나 원고 이병규가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1985년 5월 17일 연행되자 가족들의 생활은 풍비박산이 났다. 당시 첫째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 둘째는 초등학교 2학년, 셋째는 4살 이었다. 또 함께 거주한 친정동생은 17세, 15세였다.

방송과 신문에 원고 임순성의 남편 이병규가 간첩이라고 보도된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집에 몰려와 간첩의 집이라고 구경거리로 삼는가 하면 사진을 찍기도 했다.

탄광촌에서 사람들은 원고의 아이들을 보면 간첩자식이라고 놀리는가 하면 원고 임순성을 간첩의 마누라라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해 대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몰려와 집에 돌을 던지며 이사를 가라고 욕설을 하는가 하면, 어린 자식들이 학교에라도 가면 간첩자식이라고 놀림과 무시를 당하여 학교도 제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떤 남자는 임순성에게 남편이 간첩으로 구속되었으니 살아 돌아오기가 힘들 것이라고 말하며 감언이설로 임순성을 유혹하기도 하였다.

원고 이병규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을 때, 보안사 수사관들이 원고 임순성을 찾아와서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마라, 변호사를 선임하면 더 안 좋아 진다”며 협박까지 했다.

원고 임순성은 도저히 살수가 없어 이사를 가려고 탄광촌에서 운영하던 가게를 내놓아도 간첩이 하던 가게라며 누가 사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남은 물건도 인수해 가지를 않았다.

부인 임순성은 할 수 없이 헐값에 가게를 판 후, 경기도 광명시로 이사를 하였고 월세 단칸방을 얻어 파출부 일을 나갔다.

큰 애와 작은 애가 초등학교에 가고, 임순성이 파출부 일을 나가면 원고의 막내아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어 방에 가두어 두어야만 했다.

그러면 막내아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를 못해 방에서 날마다 악을 쓰며 울고불고 했다. 그래서 이사한지 1년도 못되어 집주인에게 쫓겨났다.

원고 임순성은 1986년 12월 엄동설한에 인천에 있는 비닐하우스로 이사를 했다. 비닐하우스 안에다 방을 만들어 놓은 곳 이었다. 그 서글픔을 뭐라 말 할 수 있겠나? 그곳은 막내아들이 울어도 주변에서 뭐라고 하질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기 위해 부인 임순성은 경동산업이라는 공장에 취업해 철야, 특근, 휴일근무 등을 도맡아 해야만 했다. 남편의 면회도 일을 끝내고 밤새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아침 일찍 면회를 하고 돌아와 곧바로 출근해야 하는 등 삶의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원고 임순성의 친정아버지는 당시 강원도 홍천 구성포리에 살고 있었는데 육군 상사 출신으로 건강하던 친정아버지는 사위가 간첩으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고, 원고 임순성에게 ‘우리 집안까지 말아 먹는다’며 이혼하라고 강요하기도 하였다.

임순성이 이혼을 하지 않자 친정아버지는 우울증과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가는 결국 이병규가 구속된 지 1년 만인 1987년 1월 18일 당시 58세의 젊은 나이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고문과 불법 감금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원고 이병규와 7년 가까이 강제로 헤어지고, 그렇게 사는 동안 쌓인 부부 사이의 벽과 변화된 성격과 어려운 여건으로 말미암아 남편이 석방된 뒤에도 과거와 같이 단란한 부부관계는 회복할 수가 없었으며 그냥 고통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부인 임순성의 피해는 단지 남편이 감옥에 갇힘으로써 아내로서 받는 정신적 고통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경찰의 감시와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자신과 자식들의 삶에 위협을 받으며 인생이 왜곡 되어버린 현실적인 피해다.>

고등법원에서 이씨와 가족들이 입은 보안관찰과 경찰의 감시에 대한 보상금으로 1억5000만 원이 확정됐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대법원은 보안관찰과 경찰 감시로 인한 이병규씨와 그 직계가족에 대한 배상금 1억 50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따라 고등법원에서 판결한 이씨의 보안관찰, 경찰 감시로 인한 손해배상금은 모두 무효가 됐다.

▲공권력의 부당한 보안관찰 피해보상을 법원이 번복한 사실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프레시안(홍춘봉)

이병규씨의 진술.

“변호사가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을 보고 황당해 하며 말했다. 이 사건은 청와대 하명 판결이라고 하더라. 대한민국에서 보안관찰과 경찰 감시로 인한 배상금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첫 선례가 되고 만다.

때문에 박근혜 정부는 유사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보고 이를 파기환송 처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권 입맛에 따라 법원 판결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또 다시 씁쓸한 기분을 맛보았다. 보호관찰과 경찰의 감시로 수십년에 걸쳐 24시간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는데 이를 무효시킨 대법원의 판단에 기가 막혔다.

노무현 정권에서 이 사건이 진행됐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정권이 바뀌고 보상금까지 대폭 삭감됐다. 유사한 간첩피해사건에서 다른 피해자들은 20억 원 이상 보상금을 받았는데 형편없이 낮아졌다. 정권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국민의 입장이 달라지는 것을 절감했다.”

특히 이씨는 자신의 사건을 재심으로 이끌고 민사소송 당시 변호사로 국가배상을 이끌어낸 인권 변호사를 정권이 바뀐 뒤 범죄자로 엮어가는 ‘정권의 칼날’을 보고 아연했다.

이씨의 회고담.

“전두환 정권에서 무고하게 간첩혐의를 뒤집어쓴 사건에 대해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재심을 담당했던 변호사는 나의 사건을 누고보다 잘 알기 때문에 변호사로 선임했다.

그런데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관들이 집에 찾아와 해당 변호사를 불법 혐의로 조사하고 소송 당사자에게 불리한 진술을 요구했다. 나는 대검수사관들의 조사를 받다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판단해 진술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위해 도움을 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려고 조사하는 것 같은데 이 조사에 응할 수 없다. 오늘 진술은 무효다. 당장 내 집에서 모두 나가라.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은 내 양심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당신들에게 절대 협조해 줄 수 없으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이후 나는 과거사정리위원장을 했던 김중권 변호사 재판의 법정에 증인으로 유일하게 출석해 4시간 이상 증언했다.

당시 검찰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증인으로 참석하지 않았지만 나는 혼자서 법정에 출두해 나의 변호사가 과거 과거사정리위원회 업무로 알게 된 사건으로 변호를 맡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진술했다.

지난 2016년 10월 박근혜 정부는 관련 변호사들을 불법 행위자로 몰아 기소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보안사는 나를 간첩으로 만든 대가로 수사관들이 특진하고 3억 원 이상의 특별 보너스까지 받았다고 들었다.

정권이 여러 번 바뀐 뒤 청와대의 입김에 따라 유무죄와 보상금 액수까지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조작된 간첩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던 이병규씨의 삶은 가족을 위해 연탄처럼 헌신적으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프레시안(홍춘봉)

평생을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던 이씨는 아직도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 간첩으로 유죄가 인정되면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과 일가친척 모두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 만다. 형제자매들까지 간첩의 가족이라는 올가미에 걸려 취업도, 여행도, 학교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이 모두 엉망이 되었다.

약혼까지 한 여동생이 시집을 가지도 못하고 좋은 직장에 합격하고도 취업을 못하는 형제자매들의 피해소식을 들으며 울화통이 터졌다. 처갓집안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장인이 집사람에게 이혼을 강요했고 결국 장인은 홧병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국가 공권력이 조작한 간첩사건으로 지난 세월 나와 가족들은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천만 다행으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듯이 27년 만에 무죄로 인정받았지만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아직도 간첩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

국가는 이제라도 공권력으로 억울하게 간첩혐의라는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은 당사자와 가족들을 달랠 수 있도록 제도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엄청난 복지공약을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선심성 퍼주기 정책보다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피해를 입은 국민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국가는 피해를 당한 당사자와 가족들에게는 사회적으로 그 손해를 보상 받을 수 있는 응분의 대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십년간 이를 악물고 살아온 나와 가족들은 아직도 그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가를 진정으로 신뢰하고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이 속히 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광부아리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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